1318화. 지옥을 본 적은 있고? (3)
“히아아아아악!”
지옥에서나 들려올 듯한 찢어지는 비명과 고함이 충천한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승냥이는 그래 봐야 승냥이 아닌가.
범이 지키는 길목으로는 향할 수 없는 법이다.
해남 장로들의 무위와 만인방도들이 지닌 힘의 차이를 고려한다면 고려한다면 이 싸움은 범과 승냥이의 싸움이라고 칭하기에도 무색했다.
상식적으로, 이성적으로 따지자면 응당 승냥이가 발을 멈추고 물러서야 할 터.
하지만 광기에 휩싸인 승냥이 떼는 제 목덜미에 범의 이가 박혀도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콰드드득!
달려들던 만인방도의 몸이 단번에 횡으로 썰려 나간다.
하지만 뒤따르는 만인방도들은 바로 앞에서 제 동료의 몸이 썰려 나가고 있음에도 되레 그 쏟아지는 피와 내장 사이로 더 빠르게 몸을 날렸다.
“카하아아앗!”
사람의 목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든 괴성을 내지르며 눈을 까뒤집은 만인방도들은 있는 내력을 모조리 실어 도를 휘둘렀다.
카아아아아앙!
내력을 한껏 실은 도와 검이 충돌한다.
해남 장로의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도를 막아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장로의 내력이야 만인방도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준이 아니니까.
하지만 도에 있는 힘이 다 실려 있다 보니 손목에 막중한 타격이 오는 것까지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
두 눈에서 불을 뿜은 해남 장로가 단번에 도를 밀쳐 내고 검을 내뻗어 만인방도의 가슴을 꿰뚫었다.
콰드득!
“이 버러지 같……. 컥!”
그때, 가슴이 꿰뚫린 만인방도의 배를 단번에 뚫고 나온 도가 장로의 아랫배를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끄으……윽…….”
몸이 덜덜 떨린다. 단전이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관 장로!”
“이, 이런!”
관조영(管照影)의 두 눈이 충격과 분노로 번뜩였다.
‘제 동료를…….’
파아아앗!
이윽고, 연이어 날아든 도가 관조영의 목을 단번에 쳐 날렸다.
“이 개 같은 놈들아! 으아아아아아!”
해남 장로들이 발작하듯 고함을 내지르며 맹렬하게 검을 펼쳤다.
기세가 폭풍 몰아치는 바다에 이는 해일과도 같았다.
새파란 검기는 달려드는 만인방도들을 향해 일거에 들이닥쳤다.
콰가가가가각!
광기에 사로잡힌 만인방도들이 검기를 향해 거칠게 도를 휘둘렀지만, 칼로 파도를 막아 낼 수는 없었다.
검기에 휩쓸린 육체는 일시에 육편으로 화했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눈앞에서 그 광경을 직면한 만인방도들은 기세를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빠르게 가속하여 단번에 해남의 장로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승냥이는 범을 사냥할 수 없다.
하지만 승냥이보다 약한 인간은 범보다 강한 인간을 사냥할 수 있다.
인간만이 가진 특성 때문이다.
인간은 제 목숨을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니까.
푸욱!
심장에 검이 틀어박혀도 악착같이 도를 휘두른다.
서걱!
배가 갈려 내장을 쏟아내면서도 제 배를 움켜잡기는커녕 눈앞에 있는 이의 다리를 움켜잡고 물어뜯는다.
“아아악!”
콰드드드득!
장로의 가슴에 끝끝내 도를 박아 넣은 이의 두 눈에 희열이 들이찼다.
실로 섬뜩한 웃음이 만면에 번졌다.
그는 쑤셔 박은 도를 뒤틀며 상처를 더욱 크게 벌렸다.
“끄으아아아아악!”
생전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고통에, 장로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극심한 고통 앞에서는 지금껏 쌓아 온 수련조차 무의미했다.
장로는 순간 악에 받쳐 검을 휘둘렀다.
득의양양하게 웃는 이의 얼굴에 검이 틀어박혔다.
무학도 뭣도 아니다.
그저 발악에 가까운 찌르기였다.
이내 얼굴을 꿰뚫린 이가 고꾸라졌다.
하지만 심장이 꿰뚫린 이의 결말이라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허물어지는 이의 등을 향해 도가 연이어 날아들었다.
등판이 난자되어 쓰러지는 모습은 실로 처참했다.
“이, 이 미친놈들이…….”
장로들의 눈에 일순 공포가 어렸다.
이건 비무도, 대련도 아니다.
그 어떤 수를 쓰더라도 상대의 목숨만 끊어 놓을 수 있으면 되는 전쟁이다.
전쟁의 광기는 그들이 평생 고고하게 쌓아 올린 무학을 비웃고 조롱하며 짓밟고 있다.
어찌어찌 가까스로 숨 돌릴 시간을 번 장로가 막막한 심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좁디좁은 협곡에 만인방도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흡사 검은 강이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만인방도들은 해남 장로들의 해일 같은 검기를 막지 못한다.
하지만 장로들 역시 협곡으로 흘러드는 저 죽음의 강을 막아 낼 도리가 없었다.
하나, 그리고 또 하나의 목을 베고, 수십의 목을 베고 또 베어도 다시 수십이 달려든다.
한껏 끌어 올렸던 사기는 저 지독한 급류에 휩쓸려 발끝으로 빠져나가 버린 것 같았다.
“으…….”
아무리 많은 이가 몰려온다 해도 벽처럼 막아설 자신이 분명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적의 수가 많다 해도 한 번에 달려들 수 있는 적의 수는 셋에 불과하니까.
머리 위까지 쳐도 열을 넘지 않을 테니까.
심지어 그들 역시 홀로 막아 내는 게 아니잖은가.
함께 호흡을 맞춰 온 장로들이 함께 맞선다면 수천이 아니라 수만이 달려든다 해도 내력이 다하는 순간까지는 장판파에 선 장비처럼 막아 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앞에 선 장로의 두 눈엔 어느새 공포가 범람했다.
들끓던 혈기와 분노가 가라앉으니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없는 시체가 그의 앞에 널려 있다. 적들은 서슴없이 그 시체를 밟고 뛰어넘으며 쇄도해 오고 있다.
그리고 저 시체 더미에는 먼저 죽은 장로들의 시신 역시 뒤섞여 있을 것이다.
“으…….”
대지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해남 장로의 두 발이 순간 더듬거리듯 뒤를 주춤주춤 훑었다.
알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째서 이곳을 지켜야만 하는지.
하지만 머리로 안다 해서 목숨을 내던지며 그 일을 하는 게 그저 쉬울 리 없다.
게다가 목숨을 돌보지 않고 달려드는 만인방도의 광기는 단단하던 장로들의 각오에 균열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물러서지 마라!”
그 기색을 알아챈 금양백이 재빠르게 외쳤다.
하지만 한번 흔들린 기세를 되돌리는 건 무너진 모래성을 다시 쌓아 올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여파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아아아아아악!”
휘두른 도가 물러서던 장로의 허벅지에 틀어박혔다.
전력으로 적에게 맞서는 것과 허리를 엉거주춤 뒤로 뺀 채 막아 내는 것이 같을 리 없다.
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기만 했어도 입지 않았을 상처다.
하지만 지금 해남의 장로들은 실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비켜라!”
금양백이 단번에 장로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소리쳐 봐야 상황을 되돌리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그가 직접 나서는 쪽이 옳다.
생각은 짧고 대처는 빨랐다.
앞으로 뛰어든 금양백이 눈을 까뒤집으며 달려들던 만인방도들의 목을 연이어 뚫었다.
실로 빛살 같은 쾌검이었다.
이 공격 한 번으로도 금양백은 해남 장문인의 능력을 증명했다.
단번에 목이 꿰인 만인방도들은 썩은 짚단처럼 그 자리에 허물어져 내렸다.
‘다음…….’
서걱!
하지만 그 순간 금양백이 움찔했다. 그의 시선이 검을 쥔 쪽의 팔목으로 향했다.
목에 구멍이 나서 쓰러지던 만인방도가 죽어 가는 와중에도 악착같이 도를 휘둘러 그의 팔에 긴 자상을 입힌 것이다.
금양백의 두 눈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지독한…….’
물론 여력이 남은 것에 불과하다.
목이 꿰뚫린다 해서 곧바로 즉사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죽은 이들이 칼을 휘둘러 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익!”
파아아아아앗!
따라붙는 찝찝함을 털어 내기라도 하려는 듯, 금양백은 검으로 허공을 세차게 갈랐다.
이번에도 빛살과도 같은 쾌검이 선두에 선 적은 물론이고 그 뒤를 따르던 이들의 몸까지도 한 번에 베어 버렸다.
“크아아아악!”
“아악!”
아군의 등을 뚫고 별안간 제 몸까지 검기가 박혀 들자 만인방도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예상하지 못했던 공격이라 타격이 더 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달려들던 이들이 순간 멈칫했고, 그 상황은 더 큰 참상을 불러왔다.
“빨리 비켜! 이 개자식아아아아!”
푸우우욱!
엉겁결에 발을 멈췄던 이들의 등판에 아군의 도가 박혔다.
단번에 척추가 끊겨 나간 이들이 피거품을 물며 앞으로 허물어졌다.
뒤에 있던 이들은 그 등에서 칼을 뽑으며 쓰러지는 이를 짓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죄책감?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한번 달리기 시작한 병력은 무슨 수를 써도 멈출 수 없다.
아군을 밟아 버리지 않았다면 뒤따르는 이들에 의해 그가 짓밟혔을 테니 말이다.
“으아아아아아!”
악을 쓰며 돌진하는 그에게로 십여 차례의 검기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는 도를 들어 도면으로 목과 심장을 가리며 땅을 박찼고, 검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푸욱! 푸욱! 푸욱!
매서운 검기가 상반신을 연신 뚫었다.
붉은 피가 울컥울컥 솟구쳤지만, 그 와중에도 머리만은 보호해 낸 만인방도는 가열하게 도를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도 끝에서 뿌려진 피가 금양백의 상반신에 튀었다.
도는 채 금양백의 몸에 닿지 못했다.
그 몸의 한 치 앞 공간만을 베어 냈을 뿐이다.
하지만 그 피의 열기만은 여지없이 금양백을 덮쳤다.
“끄르륵…….”
마지막 힘을 다 쓴 만인방도가 앞으로 허물어졌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표독하게 바닥을 긁어 대는 모습을 보며, 금양백은 등으로 서늘한 한기가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파아아아앗!
그때, 금양백을 향해 시커먼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날아드는 것을 막아 냈다.
그러자 날아들던 것들이 빙글 회전하더니 순식간에 금양백의 검을 칭칭 휘감았다.
‘사슬낫?’
금양백이 눈을 부릅떴다.
기회를 잡은 만인방도들이 기세를 끌어 올리더니 어마어마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죽여라아아아아!”
“잡아끌어라!”
금양백이 검을 힘껏 당겨 봤지만, 십여 개의 사슬낫에 얽혀 버린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웃기지 마라, 이 개자식들아!”
그런 금양백 대신 반응한 이는 다름 아닌 당패였다.
금양백의 머리 위로 뛰어오른 당패가 독 병을 깨부수는 동시에 있는 힘껏 독장을 날렸다.
장로들의 활약 덕에 호흡을 돌릴 여유를 어느 정도 찾았기 때문인지, 그가 만들어 낸 독연은 거대한 화염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적들을 빠르게 뒤덮었다.
“모두 죽…….”
목이 터지도록 소리치려던 당패가 순간 목이 턱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잃었다.
‘저…….’
핏발 선 그의 눈이 독연 너머로 고정되었다.
작은 아이의 머리통만 한 구체가 그가 피워 낸 독연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당패는 알아챘다.
지금 독연을 향해 날아드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저 날아드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말이다.
“피, 피해에에에에에에에에에!”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거대한 폭음과 함께, 협곡 중앙에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쿠르르르르르릉!
좁은 협곡과 옆의 절벽이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처럼 뒤흔들렸다.
그리고.
휘이이이이이이잉!
그 폭발의 충격이 자아낸 가공할 풍압이 당패가 만들어 낸 독연을 일거에 밀어 냈다.
모든 것을 녹여 버릴 독의 폭풍이, 만인방이 아닌 해남을 향해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