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7화. 지옥을 본 적은 있고? (2)
절체절명의 순간.
일순 숨이 멎고 심장이 조여 오는 그때, 당패의 등 뒤에서 혜연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파아아아아앗!
십여 개의 권영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무겁고 진중한 평소의 권력과 달리, 쾌속하기 이를 데 없는 권격이 달려들던 만인방도들을 연속으로 쳐 날렸다.
콰드득!
권을 얻어맞은 만인방도의 턱이 단번에 으스러졌다.
그리고 피와 부러진 이를 쏟아 내며 뒤로 튕겨 나갔다.
혜연은 이를 악물었다.
다급하게 권을 펼치다 보니 상대의 목숨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물론 저들은 중독 때문이라도 곧 목숨을 잃을 것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혜연이 저들의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명복을 비는 불호 한번 욀 틈조차 주지 않고 적들이 다시 미친개처럼 달려들었다.
“큭!”
혜연이 벌어 준 잠깐의 시간 동안 어떻게든 정신을 되찾은 당패가 섬전같이 손을 휘둘러 독탄을 날렸다.
퍼어엉! 퍼어엉!
검은 독연이 자욱하게 연달아 터져 나왔지만, 독장을 섞지 않은 독탄만으로는 협곡 전체를 장악할 순 없었다.
독연 틈으로 굶주린 승냥이 떼들이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카가가가각!
위에선 쇠로 바위를 긁어 대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절벽을 박차고 올랐던 이들이 절벽 면에 도를 박아 가며 몸을 띄워 올리고 일거에 당패와 혜연을 덮쳐 오고 있었다.
“위!”
“예!”
혜연이 앞쪽에 달려드는 이들을 향해 즉시 연속으로 권을 날렸다.
동시에 당패의 소매에서 뿜어져 나온 극히 가느다란 우모침(牛毛針)이 강하하는 만인방도들을 향해 비처럼 뿌려졌다.
콰앙! 콰아앙!
앞에서 달려들던 이들은 혜연의 권에 얻어맞고 피떡이 되어 튕겨 나갔지만, 위에서 강하하는 이들은 전신에 우모침을 맞고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크하아아아압!”
미세한 바늘이 수없이 몸을 파고드는 끔찍한 고통.
하지만 만인방의 방도들은 제 심장에 검이 박힌 순간에도 도를 휘두르는 독종들이 아닌가.
그런 이들을 막아 내기엔 당가의 무학은 저지력이 부족했다.
당황한 당패가 재차 손을 소매 안으로 찔러 넣었다.
하지만 그 손이 다시 뽑혀 나오는 것보다 만인방도의 도가 그의 머리를 내리치는 속도가 더 빨랐다.
당패가 눈을 부릅뜬 바로 그 순간.
파라라라라락!
반월 형태의 기운이 급박한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느긋하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흡사 화사하게 핀 꽃 위에 내려앉는 나비 같았다.
그 기운은 이내 당패를 노리던 만인방도의 손목에 닿았다.
단련된 무인의 손목이 단숨에 갈라졌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잇따라 날아든 반월형의 선기(煽氣)가 당패를 덮쳐 오던 만인방도들의 육체로 쏟아졌다.
서걱! 서걱! 서걱!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벼운 움직임.
하지만 결과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쩍쩍 갈린 몸에선 검게 물든 독혈이 울컥울컥 터져 나왔다.
쿵!
숨이 끊긴 만인방도가 옆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를 본 당패가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 순간 벼락같은 고함이 귀를 파고들었다.
“정신 차리라고!”
“노, 녹림왕!”
“어차피 못 막는 거 막으려고 악쓰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십시오! 남은 건 다른 이들이 채울 테니까!”
그 말에 당패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의 독으로는 이들의 돌진을 완전하게 막아 낼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의 부담이라도 덜어 줘야 한다.
챙! 챙!
독병을 연이어 깨뜨린 그는 단번에 장력을 내뿜었다.
당가의 절독을 머금은 독장이 계곡의 뒤편까지 넓게 넓게 퍼져 나갔다.
독으로 벽을 쳐서 적의 접근을 막아 내는 것은 포기했다.
그 대신, 뒤쪽에서 달려드는 이들까지 모조리 중독시켜 버리겠다는 심산이었다.
엷고 넓게 퍼져 나간 독이 적을 뒤덮었다.
만인방도들은 밀려오는 독연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처럼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자욱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당가의 독이다.
이대로 뛰어든다면 그 결과는 뻔하리라.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만인방도들은 멈추기는커녕 기세를 더했다.
어차피 결과야 같다.
한번 돌진을 명한 이상, 호가명의 명은 바뀌지 않는다.
앞에서 밀려오는 독에 주춤주춤 멈춰 선다면, 독이 아니라 등 뒤에서 날아드는 도기에 목이 잘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살길은 오직 앞뿐이다!
만인방도들의 두 눈에 광기가 번뜩였다.
그들은 일제히 악을 쓰며 독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저 미친놈들이!”
임소병이 거친 소리를 내뱉었다.
수하들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야 그도 할 수 있다.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저 녹림이라는 거대한 단체를 그의 뜻대로 주무를 수 있다면, 적어도 십 년 내에는 만인방도들에게 뒤지지 않는 정예로 키워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녹림이 만인방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있단 의미는 아니다.
만인방은 만인방. 그들은 사파 내에서도 독보적이다.
역사가 일천한 만인방이 신주오패 중 하나가 되고, 끝내 사패련의 중심까지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저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저들이야말로 사파를 통틀어 가장 미친놈들이기 때문이다.
본디 구성원들의 충성심이 약해 통제가 쉽지 않다는 건 사파의 치유할 수 없는 고질병과도 같다.
그렇기에 머릿수로는 언제나 정파를 압도하면서도 정파에게 번번이 패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만인방은 다르다.
저들의 결속력과 충성심은 정파를 가뿐하게 뛰어넘는다.
임소병이 아무리 애쓴다 해도 저런 맹목적인 충성은 끌어낼 수 없다.
저 미친 결속력은 이미 사파의 영역…….
아니, 무인의 영역을 뛰어넘지 않았는가?
“뒤로 물러…….”
그 순간, 임소병의 등 뒤에서 한 무리가 순식간에 날아들어 그의 앞으로 치고 나갔다.
“해남?”
임소병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뒤쪽에서 달려온 해남의 장로들이 임소병은 물론이고, 혜연과 당패마저 뛰어넘어 만인방의 최전선과 맞부딪친 것이다.
“와라! 악적 놈들아!”
“이건 해남의 싸움이다! 나를 넘지 못하고서는 한 발도 뒤로 갈 수 없다!”
“죽어라, 더러운 만인방 놈들!”
쏴아아아아아아!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해남 장로들이 뿜어낸 해일과도 같은 검기가 만인방도들을 단번에 휩쓸었다.
“……허.”
임소병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이곳까지 오면서는 딱히 전력이 되지 않던 이들이다.
제 제자들을 지키는 데에만 급급해 발목이나 잡지 않았던가.
하지만 제자라는 족쇄는 이제 풀렸다.
그들은 해남이 어째서 구파일방인지, 그런 해남의 장로가 어떤 존재인지를 증명해 내고 있었다.
살아생전 겪을 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처절한 도주.
그 압박에 억눌려 있던 장로들의 검이 이 순간 모든 울분을 토해 내고 있었다.
촤아아아악!
바다를 닮은 푸른빛 검기가 겹겹이 쏘아진다.
정파의 고수가 수십 년에 걸쳐 꾸준하게 쌓아 올린 농밀한 내력이 실렸다.
만인방도들이 사파 중에선 정예라고 하나, 평범한 일반 방도가 구파일방 장로급의 검기에 실린 내력을 감당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카가가강!
“아아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악!”
사람이 아무리 강인해도 밀려오는 해일을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감히 해남의 검기 앞을 막아섰던 만인방도들의 운명 역시 뻔했다.
도를 휘둘러 부딪치면 도가 부러지고, 힘을 주어 막으면 내력에 휩쓸려 나간다.
“모조리 숨통을 끊어 놓아라!”
금양백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치며 검을 떨쳤다.
그의 검에 어렸던 푸른빛 검기가 허공을 격하고 뒤쪽에 떨어졌다.
뒤에서 치고 나갈 틈을 호시탐탐 노리던 만인방도들은 난데없이 날아든 검기에 사정없이 휩쓸리고 베였다.
“아아아악!”
“내 팔! 내 팔!”
군인이건 무인이건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최전선에 도달한 이들은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거꾸로 말해, 아직 최전선에 닿지 않은 이들은 광기에 완전히 물들지 못했다는 뜻과도 같다.
바로 앞에서 터진 참사를 지켜본 만인방도들의 눈에는 두려움이란 감정이 스쳤다.
“한 놈도 보내지 마라!”
금양백이 소리쳤다.
“예!”
그에 호응하여 해남의 장로들도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대답하고 함성을 질렀다.
광동을 돌파하는 건 지옥과도 같았다.
그 행보 속에서 단련된 건 비단 해남의 제자들뿐만이 아니었다.
평화로운 섬에서 고고히 수련만 거듭하던 해남의 장로들의 검에도 전에 없던 살기와 독기가 어려 있었다.
콰드득!
해남 장로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만인방도들이 무자비하게 베여 나갔다.
단번에 목이 꿰뚫린 이의 입에서 역류한 검은 독혈이 꾸역꾸역 쏟아졌다.
파아앗!
지체 없이 검을 뽑아낸 장로들은 단순히 자리를 지키는 정도에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들의 임무는 막아 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적에 대한 증오가 발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와라! 이 개 같은 만인방 놈들!”
그들의 두 눈에선 살기가 쏟아져 흘렀다.
“흐아아아아압!”
실력의 차이는 명백하다.
적어도 지금 선두에서 달려드는 만인방도들에게는 해남 장로들로 구성된 이 방진이 뚫을 수 없는 철벽과도 같았다.
하지만 만인방도들은 그 철벽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들이받았다.
흡사 제 머리로 종을 들이받아 울리고자 하는 새처럼, 기꺼이 제 목숨을 장로들에게로 내던졌다.
서걱! 서걱!
파도 같은 검기가 몸을 베다 못해 저며 내고 지나간다.
만인방도들은 심장이 잘리는 순간에도 도를 휘두르고, 허리가 끊겨 바닥에 쓰러지고도 칼을 휘둘러 장로들의 다리를 노렸다.
악귀가 따로 없다.
목숨이 끊어지더라도 상대를 해하겠다는 악의!
하지만 그들을 상대하는 해남의 장로들 역시 비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푸욱!
허리가 잘린 채 마지막으로 도를 휘두르려던 이의 뒷덜미에 검이 박혀 든다.
심장을 벤 검이 여력이 남은 이의 목을 단번에 잘라 내기도 했다.
콰드득!
끔찍한 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만인방도의 가슴으로 파고든 검이 갈비뼈에 걸려 덜컥이는 소리였다.
검이 가슴 안을 온통 헤집어 놓는 고통이야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목이 터지도록 비명을 내지르고도 남을 상황이지만, 전장의 광기에 먹혀 버린 만인방도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모양으로 제 가슴에 파고든 검을 양손으로 덥석 잡았다.
“어억?”
장로의 검이 봉쇄된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좌우에서 도가 쇄도해 왔다.
해야 할 선택은 하나, 검을 놓고 물러나야 한다.
하지만 그 당연한 선택을 막은 것은, 검수는 목숨이 끊길 때까지 그 손에서 검을 놓아선 안 된다는 가르침이었다.
평생을 들어왔던 그 말이 끝내 검을 붙들고 있게 했다.
서걱! 서걱!
날아든 도가 해남 장로의 몸을 종횡으로 가르고 지나갔다.
이윽고, 쩍 갈라진 단면에서 피가 솟구쳤다.
“이, 이 개자식들이!”
수십 년을 함께해 온 이의 생명이 꺼져 간다.
그 죽음을 눈앞에서 직면한 다른 장로들의 눈에 지독한 악의와 살기가 들끓었다.
베고, 찌르고, 죽이고, 저주한다.
강호가 생긴 이래 끝도 없이 이어져 온 광경이다.
정과 사. 서로 다른 길을 걷는 이들이 맞닥뜨린 외길에서는 언제나 같은 광경이 벌어지는 법이다.
스스로 추구하던 것도, 얻으려 하던 것도, 싸워야 하는 이유조차도 잊었다.
모두가 그저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 눈앞에 있는 이를 닥치는 대로 베며 살육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