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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16화 (1,317/1,567)

1316화. 지옥을 본 적은 있고? (1)

“오, 온다!”

“만인방이다!”

해남의 기세는 하늘 끝까지 올라 있었다.

해남도를 떠나 이 협곡까지 도달할 동안,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그저 죽고, 다치고, 또 도주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중간중간 교전을 벌여 상대를 격살하기는 했지만, 그 교전은 상대를 짓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발악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에 처음으로 방어를 신경 쓸 것 없이 있는 대로 공격을 퍼부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 기세가 얼마나 충천했겠는가?

하지만 협곡 끝에 모습을 드러낸 만인방을 확인한 순간, 끝을 모르고 타오르던 기세가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차게 식어 버렸다.

그리고 그 들끓던 기세가 사라진 곳을 차지한 것은 다름 아닌 공포.

이 상황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공포였다.

만인방.

그 이름이 가진 힘을 해남만큼 잘 아는 이들이 있겠는가?

마침내 지독하게 그들을 쫓아오던 이들에게 뒤를 잡혔다는 사실이 해남의 제자들을 어찌할 수 없는 절망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저, 절벽을!”

만인방의 방도들이 좁은 협곡의 절벽을 타며 그들에게 돌진해 왔다.

냉정하게 본다면 딱히 대단한 재주도 아니다.

해남의 일대제자 정도만 되어도 절벽을 타오르는 건 몰라도, 몇 장 정도 높이의 절벽 면을 타고 달리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은 상황에 따라 받아들이는 게 달라지는 법.

마침내 저들에게 뒤를 잡혔다는 공포감.

그리고 절벽을 타고 달려드는 만인방도들이 뿜어내는 기세는 해남의 항전 의지를 순간적으로 꺾어 놓기에 충분했다.

“도, 도망쳐야 해!”

“이 미친놈아! 어디로 도망가! 여기는 협곡 안이라고!”

사방이 막혀 있다.

심지어 저 절벽 위조차 얼마나 적이 더 포진하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

거기다 그들은 이미 어설프게 절벽에 달라붙은 이들이 어떤 식으로 참살당하는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달아날 곳이 없다.

남은 것은 맞서 싸우는 것뿐.

하지만 어떻게?

저 만인방을 상대로 그들이 무슨 수로 맞서 싸우겠는가?

그게 가능했다면 이곳까지 달아나지도 않았을 텐데.

“다, 다 죽을 거야! 다 죽는다고!”

손 쓸 수 없는 공포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전력이 부족하고, 실력이 달린다고 해도 전투는 치를 수 있다.

하지만 사기를 잃어버린 이들은 손도 써 보지 못하고 쓸려나가고 만다.

좁디좁아 달아날 곳도 찾을 수 없는 협곡.

그곳에서조차 뒷걸음질을 치는 이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 순간.

“정신 차려! 이 새끼들아!”

누군가의 노호성이 쩌렁쩌렁 터져 나온다.

놀란 이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곽환소가 핏발이 선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우린 이미 해남에서 죽었다!”

“사, 사형?”

곽환소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죽더라도 더럽게 죽지는 않겠다고 여기까지 왔다! 잊었느냐!”

해남의 제자들이 이를 악물었다.

곽환소의 말이 틀린 게 없다.

어차피 이 강남으로 향하며 살아서 강남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믿은 이가 몇이나 되던가?

“어차피 죽을 거면, 비겁하게 죽지 마라. 해남의 제자답게 죽어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곽환소가 바닥을 박찬다.

그리고는 해남 제자들의 머리를 타 넘어 뒤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말보다는 행동. 죽는다면 자신이 제일 먼저 죽겠다는 의지.

이런 격한 상황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말이 아닌 행동인 법.

그 등을 본 해남 제자들의 눈에 독기가 차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때를 놓치지 않고 금양백의 고함이 터져 나온다.

“장로들은 뒤쪽으로 이동해서 만인방을 막아라!”

추상과도 같은 기세.

저 달려드는 만인방의 기세에 눌리지 않겠다는 듯 금양백이 전신으로 기운을 내뿜는다.

“목숨이 끊기는 한이 있어도 놈들의 칼이 제자들에게 닿게 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이곳에서 뼈를 묻어라!”

“예! 장문인!”

장로들 역시 악을 쓰듯 대답했다.

그들은 이미 살 만큼 산 이들.

그럼에도 이 강남으로 온 이유는 오직 하나.

단 한 사람의 제자라도 살려 강북으로 보내기 위해서다.

“가자!”

장로들이 단숨에 뒤쪽으로 달려든다.

“제자들은 위에서 추락하는 이들을 협공하라! 위쪽이 완전히 처리될 때까지 자리를 지켜라!”

“예! 장문인!”

금양백 역시 명문인 해남의 장문인.

한발 뒤로 물러나 있을 때는 그 존재감이 돋보이지 않았지만, 위기가 닥친 순간에만은 자신이 어째서 해남의 장문인인지를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두렵겠지.’

금양백이 뼈가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조차 이토록 두려운데 저 어린 제자들이 얼마나 두렵겠는가?

하지만 두려움은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다.

오직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콰아아앙!

금양백이 즉각 바닥을 박차고 후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지금 그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이들을 북돋는 게 아니다.

‘막아 낸다.’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서 이 협곡을 빠져나가야 한다.

설사 그 대가가 금양백의 목숨이라고 한들 말이다.

그리고!

“환소! 뒤로 물러서라!”

“장문인?”

순식간에 곽환소를 따라잡은 금양백이 곽환소의 어깨를 잡아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제자들을 지휘해라!”

“장문인, 여기는 제가 맡겠…….”

“명이 들리지 않느냐!”

내력까지 실은 어마어마한 호통이 곽환소를 후려친다.

곽환소가 얼이 빠진 얼굴로 금양백을 바라보았다.

“물러서라! 지금 제자들을 지휘해야 할 이는 내가 아니라 바로 너다!”

“…….”

“어서!”

“며,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예?”

“너만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알겠느냐?”

“자, 장문인?”

“가라!”

금양백이 곽환소를 반쯤 집어던지듯 밀쳐 냈다.

그리고는 그를 지나쳐 후방으로 속도를 높였다.

“제자들에게는 손가락 하나 댈 수 없다! 이 더러운 사파의 개들아!”

당패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소매 안으로 밀어 넣은 손이 파르르 떨린다.

암기를 쓰고 독을 쓰는 이에게 있어서 손이 떨린다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

하지만 이건 당패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살기를 있는 대로 내뿜으며 달려드는 만인방도들을 맞이하는 최전선에 선 이라면 누구라도 당패와 같은 공포를 느껴야 할 테니까.

‘독은?’

아직 있다. 하지만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다.

세상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

이곳에 진을 치고 있는 이들과 하오문의 추격조를 상대할 때는 세상 든든했던 독들이 호가명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더없이 모자라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계산을 하고 있을 틈이 없다.

주춤한 하오문도들을 뛰어넘은 만인방도들이 피 냄새에 눈이 돌아 버린 승냥이 떼처럼 미친 듯이 악을 쓰며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으하아아압!”

당패가 손에 들린 독병을 쥐어 깨뜨리는 동시에 있는 대로 장력을 내뿜었다.

당가의 독장은 본래 독의 위력을 죽이지 않기 위해 더없이 섬세하게 운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당패가 날려 대는 독장은 그의 다급한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나 평소보다 배는 거칠었다.

화아아아아악!

피어오른 독연이 앞으로 밀려 나간다.

하나 달려드는 만인방도들은 짙은 운무처럼 피어오른 검은 독연을 보고도 달려오는 기세를 조금도 죽이지 않았다.

‘뭐?’

무슨 대처법이라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당패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진다.

그러나 연이어 당패가 본 광경은 그가 알던 상식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선두에 선 만인방도들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들던 속도 그대로 독연 안으로 뛰어들어 버린 것이다.

당패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진다.

해약?

아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당가조차 만들어 내지 못하는 독의 해약을 이들이 무슨 수로 미리 복용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앗!

피어오른 짙은 독연.

살아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버텨 낼 수 없을 그 지옥의 운무 같은 독연 속에서 만인방도들이 일제히 뛰쳐나왔다.

“카하아아앗!”

두 눈에 핏발이 선 만인방도가 단숨에 당패에게 달려들어 도를 내리쳤다.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란 당패가 제대로 신법도 발휘하지 못하고 거의 나자빠지듯 뒤로 물러난다.

콰아아앙!

그가 있던 바닥에 도가 내리쳐지며 폭음이 울렸다.

‘독이 안 통해?’

아니다!

“끄으…….”

도를 내리친 이의 전신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당패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빠른 중독의 증상이었다.

현기증이 나는지 비틀대던 만인방도가 그 자리에 털썩 쓰러진다.

이내 그의 입에서 검은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온다.

“아…….”

그리고 그 순간 당패는 깨달았다.

저들은 중독에 대한 대책을 가지고 있는 것도, 독연을 피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독에 중독되는 한이 있더라도 목숨이 끊기기 전에 달려들어 그의 몸에 칼을 박아 넣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일 뿐이다.

말도 안 되는 전략.

아니, 전략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광인의 짓거리.

하지만 그 대처는 분명 효과가 있었다.

하오문의 추격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들은 그의 독을 정면으로 얻어맞고도 한 번의 칼을 휘두를 힘 정도는 남길 수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증명된 순간, 당패가 펼쳐 내었던 절대의 방어진이 급속도로 붕괴한다.

“쥐새끼!”

독연을 통과한 이들이 연이어 날아들며 당패에게 도를 휘둘러 댄다.

중독으로 전신이 시커멓게 물든, 그 숨이 끊어지는 게 채 몇 호흡 남지도 않은 이들이 어떻게든 당패를 지옥길에 동반하겠다는 듯 발작적으로 달려들었다.

“큭!”

당패가 나려타곤(懶驢打滾)의 수로 바닥을 구르며 날아드는 도를 피해 낸다.

겨우 몸을 빼낸 당패가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독장을 다시!’

하지만 그 순간 그가 본 것은 이전보다 더 강한 기세로 그에게 날아들고 있는 세 개의 도였다.

당패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는 순간.

콰앙! 콰앙! 콰앙!

칠공(七孔)에서 검은 피를 뿌리며 악귀처럼 당패에게 달려들던 만인방도들이 포탄에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뒤로 튕겨 나간다.

“소가주!”

“혜, 혜연 스님!”

“일어나십시오! 어서!”

“예!”

즉각적으로 반응한 혜연이 당패를 구해 냈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크하아아아아앗!”

“죽어라, 쥐새끼들!”

뒤로 몸을 빼고, 다시 몸을 굴리는 동안 소비된 두 호흡.

겨우 그 두 호흡의 시간이 전황을 뒤집었다.

피워 올린 독연은 흐트러졌고, 그 옅어진 독연을 뚫고 만인방도들이 개떼처럼 달려든다.

‘이, 이게 만인방?’

당패의 두 눈에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이 피어난다.

독이란 아무리 지독하더라도 상대를 중독시킬 시간이 필요한 수단이다.

그건 거꾸로 말하면 용이라도 죽일 만한 독에 중독된 이조차 숨이 끊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상대의 내력이 약하다면 그 시간을 극단적으로 줄일 수 있지만, 상대의 내력이 강하다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이놈들은 그 시간, 생에 마지막 남은 짧은 틈을 당패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데 쓰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이런 놈들을 그가 무슨 수로 막으란 말인가?

“소가주!”

혜연의 호통을 들은 당패가 발작적으로 비도를 날렸다.

순간적으로 느낀 독에 대한 무력감이 그의 선택을 이끌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절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콰드득! 콰드득!

정수리를 노리고 날아든 당패의 비도가 적의 팔뚝에 틀어박힌다.

그 비도에 실린 내력은 살을 뚫고 뼈마저도 으스러뜨렸지만, 저들의 전진을 막아 내지는 못했다.

“카하아아앗!

”전장에서만 볼 수 있는 광기.

그 광기에 눈을 까뒤집은 만인방도들이 단번에 당패와 혜연을 덮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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