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5화. 나는 알 것 같은데? (5)
“으으…….”
절벽에 악착같이 매달린 이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아아아아아악!”
여기저기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온다.
조금 전 아래로 뛰어내린 이는 채 땅에 닿기도 전에 날아든 검기에 꼬치처럼 꿰뚫렸다.
“으…….”
그 순간 위에선 목이 잘린 시체가 피를 뿜으며 추락하는 게 보였다.
위쪽에선 절벽 면에 붙은 동료들을 마귀 같은 화산 놈들이 도륙하고 있었다.
아래에는 악에 받친 해남 놈들.
위에는 악귀 같은 화산 놈들.
달아날 곳 따윈 없다.
선택할 수 있는 거라곤 아래의 검기에 꿰뚫려 죽거나, 위에서 달려드는 마귀들의 검에 베여 죽는 것뿐이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죽는 게 두려웠다면 애초에 도를 잡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식으로 죽는 건 원치 않았다.
저 절벽에서 뛰어내릴 때만 해도 이런 결과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쩌다가…….
서걱!
그 순간, 그의 손에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위에서 청명이 날린 검기가 절벽을 붙든 그의 손을 단번에 끊어 놓은 것이다.
“끄아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아래로 추락했다.
하지만 몸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날아든 검기가 그의 몸을 순식간에 도륙 냈다.
탓!
절벽을 박찬 청명은 추락하는 흑의인과 검을 휘둘러 대는 해남의 제자들을 흘끗 보고 쓰게 실소했다.
해남 제자들의 눈에 살기가 가득하다.
그럴 만도 하다. 이제까지 내내 공격당하는 사냥감의 입장이었으니까.
그런데 처음으로 적들을 손쉽게 도륙 내는 입장에 섰으니 그동안의 울분이 폭발할 만했다.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다.
위기를 한차례 넘기기는 했지만 여전히 협곡에 머물러 있다.
게다가 위에서 강하하는 이들 때문에 발걸음이 지체됐다.
한번 멈춘 수레를 다시 움직이는 데는 몇 배의 힘이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청명의 시선이 문득 일행의 가장 선두로 향했다.
그곳에 선 세 사람을 본 순간 청명의 입꼬리가 절로 살짝 올라갔다.
“병아리 놈들이.”
이제는 그도 인정해야 했다.
저 병아리들은 강하다.
카아아아앙!
날아들던 창이 단숨에 위로 튕겨 올라갔다.
그리고 그렇게 열린 공간으로 파고든 이가 섬전 같은 검기를 날렸다.
쇄애애애애액!
단숨에 십이 검(十二劍).
웬만한 검수도 삼 검(三劍) 이상을 발출하기 어려울 만큼 짧은 틈에 무려 열두 번의 찌르기가 뿜어져 나왔다.
실로 대단한 쾌검이었다.
애초에 창은 찌르기 위한 병기인지라 무언가를 막아 내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콰득! 콰득! 콰득!
조걸의 검이 순식간에 상대의 몸에 십여 개의 구멍을 뚫었다.
그렇다 한들 억울할 건 없었다.
손에 쥔 게 창이 아니라 검이나 도였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테니까.
조걸은 상대가 쓰러지길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앞으로 박차고 나가 허물어지고 있는 이의 턱을 검 손잡이로 쳐서 날렸다.
쾅!
짧고 강한 타격음과 함께 상대의 상체가 꺾일 듯 젖혀졌다.
그 열린 공간으로 다시 한번 조걸의 검이 쏘아졌다.
“아아아악!”
옆구리에 구멍이 뚫린 이가 악을 쓰며 창을 내질렀지만, 조걸은 거기에 조금도 신경을 두지 않고 되레 전진했다.
카아아앙!
날아들던 창은 뒤쪽에서 튀어나온 검에 튕겨 나갔다.
쇄애애애액!
조걸의 검기가 연이어 쏟아졌다.
상대가 주춤한 틈을 타 조걸의 어깨를 밟고 앞으로 뛰어든 윤종이 단숨에 검을 횡으로 그었다.
섬전처럼 찌르고 들어오는 검기를 튕겨 내기 무섭게 묵직한 검이 횡으로 갈라 온다.
엉겁결에 창대를 내밀긴 했지만 윤종의 검은 무쇠로 만든 창을 마치 대나무처럼 대번에 갈라 버렸다.
“헉!”
실로 정순한 내력이다.
같은 무학을 익히더라도 사람에 따라 그 내력의 크기도 성질도 달라진다.
서두르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으며, 묵묵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끊임없이 반복해 온 윤종의 내력은 화산의 그 누구보다 정순하고 묵직했다.
파아아앗!
애병이 두 동강 나서 순간 대처할 방법을 잃은 적들에게 조걸의 검기가 재차 쏟아졌다.
촤아아아악!
빠르게 꿰뚫린 육체의 뒤편에선 뜨거운 피가 쏟아져 내렸다.
“다, 당황하지 말고 물러나며 찔러라! 저놈들의 수에 말려들지 마라!”
계산이 빠른 이들도 있었다.
윤종과 조걸의 호흡은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합격이란 으레 이미 정해진 초식들을 상황에 맞게 전개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위력적인 동시에 딱딱하고 융통성이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지금 펼치고 있는 건 단순한 합격술이 아니다.
그저 서로 맞춰 온 호흡일 뿐임에도 전문적인 합격술 이상으로 맞아떨어지는 공격과 방어가 교차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저기에 휘말려 들어간다면 손도 써 보지 못하게 될터.
그렇다면 장병의 이점을 살려 저 뛰어난 호흡을 발휘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게 정석이었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이들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 그들에게 남은 수는 장병의 효용을 살리는 것뿐이니까.
다만 그들이 놓친 것은 그저 하나였다.
그들이 거리를 벌려 준 이가 다름 아닌 화산의 제자라는 것.
적이 물러나자 조걸과 윤종이 약속이라도 한 듯 좌우로 공간을 벌렸다.
그 열린 공간으로 화산의 장문대리, 백천의 검이 쏘아졌다.
화아아아아악!
파르르 경련하는 검 끝에서 무수한 매화 잎이 쏟아졌다.
흐르고 또 흐른 꽃잎들이 세찬 급류처럼 협곡을 채우며 밀려 갔다.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매영조화(梅影造河).
붉게 물든 꽃잎으로 이루어진 세찬 급류가 물러나는 적들을 향해 몰아쳤다.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적들이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검기로 이루어진 강을 사람의 힘으로 막아 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이 좁은 협곡에서 몸을 피할 방법도 없다.
선두에 선 창수가 하릴없이 창을 휘둘렀다.
창을 휘두르는 그 순간 그의 입에선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실소가 새어 나왔다.
콰아아아아아아!
그리고 그 웃음이 채 가실 틈도 없이 매화의 강이 그들을 덮쳤다.
수백 개의 명검으로 이루어진 강에 인간이 던져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막아서는 이들이 육편이 되어 버리며 뻥 뚫린 공간으로 조걸이 달려들었다.
그의 입에서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우와! 소림 안 가도 되겠네!”
“닥치고 칼이나 휘둘러, 미친놈아!”
얼이 빠져 버린 창수들의 몸을, 조걸의 검이 연신 꿰뚫었다.
그들이 저항하며 발작처럼 휘두른 검은 윤종의 단단한 방어를 뚫지 못했고, 조걸의 검은 연이어 적들의 육체를 유린했다.
그리고 숨을 돌릴 만할 즈음에는 백천의 검기가 폭발적으로 날아들었다.
좁디좁은 협곡에서 벌어진 전투다.
함부로 검을 떨치다가는 적이 아니라 아군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화산의 앞을 막아선 이들이 창으로 무장했던 것 아닌가?
하지만 화산의 검수들은 그런 좁은 협곡에서 싸우는 것이 장기라도 되는 양 검을 펼치고 있다.
“으아아아아악!”
파죽지세(破竹之勢).
남궁도위의 검은 강대했고, 혜연의 주먹은 훌륭했다.
그럼에도 이 셋이 적을 베어 내는 속도는 그 두 사람의 검과 주먹조차 무색하게 했다.
하나하나 완벽하지는 않지만, 서로 다른 세 검이 조화되는 순간 그 파괴력이 대단했다.
쇄애애애액!
바람을 가르다 못해 공간을 찢어 버릴 기세로 쇄도한 조걸이 단련된 육체를 짚단처럼 손쉽게 뚫어 버렸다.
“뒤, 뒤로!”
흡사 악귀처럼 달려드는 조걸의 기세에 밀려 물러나던 이들의 얼굴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놀라 고개를 든 순간 그들의 머리 위로 폭발적으로 피어오른 매화 잎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전신을 날카로운 면도날로 난자당하는 듯한 고통에 악에 찬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그 비명이 채 목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전에 날아든 검이 핏발 선 목을 단숨에 쳤다.
파아아아앗!
백천이 적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의 매화검이 쾌속하게, 동시에 더없이 정확하게 적들의 사혈을 파고들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정확하게 펼쳐진 검은 화산이 추구하려 하는 이상을 완벽하게 구현해 낸다.
“몰아붙여라!”
“예!”
백천이 만들어 낸 공간으로 조걸과 윤종이 다시금 약속이라도 한 듯이 뛰어들었다.
수련이란 고통 그 자체와도 같다.
육체를 학대하고 정신을 몰아붙인다.
상처를 입고 불면에 시달리고 때로는 통곡하고 싶을 정도로 가혹하다.
그렇게 하루, 또 하루.
몇 달, 그리하여 또 몇 해.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자신을 스스로 몰아붙여 왔는가?
아무리 쌓아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달라졌다는 확신 따위는 눈곱만큼도 들지 않는다.
하나를 넘어서도 또 다른 벽이 앞을 막아서고, 지독한 절벽을 맨손으로 타고 올라도 그 위에는 더 높은 절벽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무학의 길이란 끝이 보이지 않는 가시밭길을 끝없이 나아가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그렇게 쌓고 또 쌓아 올린 것들은 반드시 그 손끝에, 검 끝에 남는다.
콰가가각!
쇠로 만든 창이 날아드는 조걸의 검을 용케도 막아 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조걸의 검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창대를 갉았다.
‘뭣?’
콰가가가각!
창대를 갈아 내듯 꿰뚫은 검이 창을 든 이의 심장에 틀어박힌다.
상대는 경악을 어쩌지 못하며 어떻게든 자신을 죽인 이를 다시 한번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조걸은 이미 그를 지나쳐 나아가고 있었다.
누구도 막지 못한다. 누구도 상대할 수 없다.
빛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쾌검이 연이어 적들을 꿰뚫는다.
“막는 놈은 죽는다!”
피가 몰려 얼굴이 붉어진 조걸이 목이 터지도록 소리쳤다.
그 압도적인 위세에 협곡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했다.
‘됐군.’
앞쪽의 상황을 주시하던 임소병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미 적들은 완전히 압도됐다.
이대로라면 협곡을 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적이 준비한 수는 거의 바닥났을 것이고, 이미 그들은 협곡을 절반 이상 돌파했으니까.
오히려 좁은 협곡이 다수를 상대하기에 더 나을 거라는 청명의 판단이 틀리지 않은 것이다.
‘이곳만 돌파하면!’
한결 수월해진다.
그렇다면 강남을 돌파하기도 그리 어려운 일은…….바로 그 순간이었다.
무언가를 느낀 임소병이 움찔했다.
뒤쪽을 획 돌아보니 뭉게뭉게 피어오른 독연이 보였다.
그 독연 너머, 하나의 선처럼 좁아진 계곡의 끝에서 낯설지만 익숙한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벅. 저벅.
느릿하게 걸어 협곡 안에 선 이가 고개를 들어 모두를 응시했다.
마치 이 모든 일을 구경하겠다는 것처럼.
“……호가명!”
임소병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만인방의 군사이자 사패련의 군사.
독심나찰 호가명이 마침내 그들을 따라잡은 것이다.
호가명은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로 범벅된 협곡과 널려 있는 시체는 이들이 얼마나 분전했는지를 확연히 보여 주고 있었다.
“조금 늦었군.”
하지만 그럼에도 해남과 천우맹은 여전히 이 협곡에 발이 묶여 있다.
“그래도…… 완전히 늦지는 않았다. 그걸로 충분하지.”
임소병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앞쪽에 있는 백천을 향해 생애 가장 커다란 소리로 고함쳤다.
“장문대리! 서두르십시오!”
피 토하듯 고함을 내지르자 호가명의 시선이 임소병에게로 향했다.
눈빛이 서늘했다.
“그 분전은 칭찬하지. 하지만 여기까지다, 쥐새끼들.”
호가명이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한 놈도 남기지 마라.”
그 명이 떨어진 순간.
좌우로 솟아오른 드높은 절벽을 타고, 병기를 뽑아 든 만인방의 병력이 수백 년 만에 신선한 고기를 본 지옥의 아귀들처럼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