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4화. 나는 알 것 같은데? (4)
전투에서 위를 잡는다는 것은 절대적이다.
더구나 발이 닿지 않는 허공에서라면 그 효용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생각해 보라. 몸을 날릴 수도 없고, 땅을 디뎌 힘을 실을 수도 없는 허공.
그 허공에서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게 된다면?
‘저, 저거!’
절벽이 이십여 장에 달하지만 낙하하는 시간은 금방이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은, 시간을 찰나로 쪼개어 살아가는 무인들에겐 결코 짧지 않았다.
강하하던 이들이 황급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마찬가지로 옷자락을 펄럭이며 떨어지고 있는 동료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붉은 비가 폭우처럼 쏟아지는 것도.
콰득! 콰드득! 콰득!
핏방울처럼 긴 잔영을 남긴 무수한 검기가 가공할 기세로 흑의인들의 육신을 파고들었다.
“끄으아아아아아아!”
시간을 두고 연이어 떨어지는 검기가 육체를 뚫고, 뚫고, 또 뚫는다.
몸뚱이 곳곳을 수십 개의 굵은 강침이 뚫고 지나가는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그 고통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비명을 내지르는 것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발작적으로 도를 휘둘러 쏟아지는 검기를 막아 보려 했지만, 발 디딜 곳도 없는 허공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검기를 모두 막아 낸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콰드드득!
몸에 두른 기운을 찢은 검기는 연약한 살에 여지없이 박혀 들었다.
그리하여 근육을 뚫고, 뼈를 으스러뜨리고, 내장마저 찢어발긴 후 몸을 뚫고 나가 또 다른 이의 육신에 틀어박혔다.
촤아아아아!
숭숭 뚫린 구멍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진다.
진짜 사람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피가 뒤섞이자 피처럼 보이던 검기는 더 짙은 혈우(血雨)가 되었다.
“으아아아아앗!”
하지만 인간은 언제 어느 때고 생존본능을 발휘한다.
허공에서는 저 검기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의 눈에 띈 건 다름 아닌 가까운 절벽이었다.
이를 악문 흑의인들의 눈에 순간 독기가 어렸다.
허공을 밟고 이동할 경지가 되지 못하는 이들이 발판으로 선택한 건 다름 아닌 제 동료의 육체였다.
함께 수련하고 사선을 넘나들어 왔지만, 생존이라는 절대 명제 아래서는 동료애 따위야 썩은 짚단만도 못한 법이다.
쾅!
흑의인들은 제 옆에 있는 이들을 가차 없이 걷어차고 그 반동으로 절벽 면으로 몸을 날렸다.
“엇!”
어떻게든 도를 휘둘러 검기를 막아 내려던 이들은 생각지도 못하게 등 뒤에서 가해진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균형을 잃었다.
쏟아지는 검기로 떠밀린 것이다.
그 뒤에 일어날 일이야 너무도 뻔했다.
“끄으아아아아아아악!”
처절하게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를 뒤로한 흑의인들은 다급하게 절벽에 달라붙었다.
물론 절벽에 붙었다 해서 검기가 날아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허공에서 전신으로 막아 내는 것과 몸을 고정한 채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검기만 막아 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니까.
하지만 그들은 곧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카가가가강!
미친 듯이 도를 휘둘러 빗방울 같은 검기를 쳐 날린 흑의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막을 수 있다!’
검기 하나하나에 실린 위력은 대단치 않다.
허공만 아니라면 어떻게든 막을 수 있다.
그러니 다른 동료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가 목소리에 내력을 실어서 있는 힘껏 고함을 치려 할 때였다.
서걱!
순간 등에서 불로 지지는 것 같은 화끈한 통증이 번졌다.
“끄륵…….”
단번에 척추가 끊어져 나가는 감각에, 제 운명을 직감한 이가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타앗.
그 순간 누군가가 그의 허리와 어깨를 내리밟으며 위로 솟구쳤다.
그 반동에 아래로 떠밀려 떨어지며 보게 되었다.
마치 한 마리의 비조처럼 절벽을 타고 오르는 한 사람의 모습을.
서걱! 서걱! 서걱!
모두가 머리 위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검은 화산의 무복을 입은 검수가 절벽을 고속으로 이동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을 확실하게 끊어 내고 있었다.
“이, 이 개자식이!”
그제야 아래에서 자신들을 공격하는 이의 존재를 알아챈 흑의인들이 황급히 넓은 반경을 방어하며 도를 휘둘렀다.
파아아앗!
유이설은 침착하게 절벽을 박차고 허공으로 도약했다.
실로 급박한 상황이지만, 우아하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녀가 물 흐르는 듯 유려하게 검을 뻗었다.
쇄애애애애액!
그러자 먹이를 쫓아 강하하던 매처럼 떨어져 내리던 청명이 즉각적으로 검을 뻗었다.
청명의 암매검과 유이설의 매화검이 허공에서 부드럽게 맞닿는 순간이었다.
빙글.
두 사람은 서로의 힘을 이용하여 몸을 회전했다.
카강!
연이어 두 검이 서로를 밀어 낸다.
그 반동을 이용해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절벽에 날아들었다.
쾅!
발이 절벽에 닿기 무섭게 두 사람이 섬전으로 화한다.
다시 본래의 색을 되찾은 하늘에서 내리쬔 태양 빛이 두 사람의 검을 더없이 희게 물들였다.
무언가를 느긋하게 바라볼 여유 따윈 없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해남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화산의 제자들마저 넋을 잃고 절벽 위를 바라보았다.
“……사숙.”
조걸이 반쯤 넋을 놓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숙은 저런 거 할 수 있습니까?”
그 말에 백천이 위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절벽을 평지처럼 밟으며 이동하는 두 사람이 쉴 새 없이 검을 떨쳐 절벽의 흑의인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백천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흉내도 못 내지.”
백천은 자신이 유이설보다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 강하지만, 스스로 쌓아 올린 무위에서는 그도 자신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평지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저 절벽 면에서 싸운다면 백천은 유이설이 검을 날리기도 전에 검을 버리고 살려 달라고 빌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경신법이라는 측면에서는 화산에서 유이설을 당할 자가 없다.
청명이 놈이야 애초에 논외지만, 백천이 평생을 노력한다고 해도 유이설의 신법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래도 물속에서는 내가 이긴다.”
“……추합니다, 사숙.”
백천이 한차례 얼굴을 실룩였다.
그리고 말없이 절벽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청명과 유이설이 순간적으로 많은 흑의인들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고 하나, 아직 더 많은 흑의인들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다.
그래도 중요한 건, 강하하던 이들이 절벽에 달라붙게 되며 이미 한번 실기했다는 점이다.
전술에 있어서 적합한 시기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논할 필요도 없다.
머리 위로 떨어지던 핏빛 검기가 그 힘을 잃었다는 걸 알아챈 이들이 재차 강하하려 들었지만, 아래에 있는 이들이라고 바보는 아니었다.
“날려라아아아아아!”
해남 문주 금양백의 벼락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온 순간, 해남파의 제자들이 검 끝에 끌어모은 혼신의 검기를 절벽 면을 향해 쏘아 댔다.
검이 맞부딪치는 순간에 순간적으로 검기를 내뿜어 적을 상하게 만드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해도, 이리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바다를 닮은 푸른 검기가 몰아치는 파도처럼 일제히 흑의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서걱! 서걱! 서걱!
절벽에서 뛰어내리려던 이들이 아래에서 솟구친 검기에 연이어 베였다.
그들이 날린 도기는 청명을 해하지 못했지만, 해남이 날린 검기는 그들을 확실히 베어 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악!”
숨통이 끊겨 떨어지는 이들을 보며 금양백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극단적인 전법이란 언제나 기회와 위험을 동반한다.
제대로 통한다면 어마어마한 이득을 얻게 되지만, 자칫 실패한다면 정공으로 들이닥치느니만 못하게 된다.
위에서 갑작스레 강하해 온 이들을 부지불식간에 맞닥뜨리는 것과, 절벽을 타고 내려오는 이들에게 느긋하게 검기를 쏘는 것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상황을 이렇게 뒤바꾼 건, 바로 위로 솟구친 두 사람이었다.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한 걸까?
사방이 꽉 막힌 상황에서 적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강호에서 구를 대로 구른 이들조차 당황하고 우왕좌왕할 만한 상황이었다.
기껏해야 방비를 단단히 하는 수밖에 없었을 터.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적의 위를 노려 아래로 곧장 떨어지지 못하게 만든다는 발상을 어떻게 할 수 있었던 걸까?
그렇게 순간적으로 말이다.
만약 금양백이 지휘권을 가진 상황이었다면, 이 상황에 대처할 수 있었을까?
‘생각할 것도 없지.’
저 둘이 없었다면 이미 적들은 그들의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해남의 제자들을 도륙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협곡까지 진입하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만약 그가 한낱 짧은 자존심에 목매어 억지를 부렸다면 해남의 운명은 이미 끝나 있었을 테니.
“장문인!”
그 순간 백천의 커다란 고함이 금양백의 귀를 파고들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자 검기에 베인 흑의인들이 피를 뿌리며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 중간중간에 용케도 검기를 피해 낸 이들이 있었다.
“막아라!”
“예!”
금양백이 일갈하자 해남의 장로들이 곧장 위로 박차고 올랐다.
악에 받쳐 독기 가득한 장로들의 검이 기세가 한풀 꺾인 흑의인들을 사정없이 베어 냈다.
위의 상황을 일별한 백천이 고개를 획 돌렸다.
저 정도 상황이라면 더는 지켜볼 이유가 없다.
저들 중 다수가 숨이 붙어 아래까지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이미 기세를 잃고 부상을 입었으니 결국 해남의 공세를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럼 남은 건?
쿠우우우웅!혜연의 주먹이 단번에 적을 밀쳤다.
여전히 대단한 광경이었지만, 백천은 혜연의 주먹에 얻어맞은 이가 나가떨어지고도 정신을 잃지 않고 바닥을 긁어 대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죽어라아아아아!”
이내 적들이 악에 받쳐 혜연에게 일제히 창을 내질렀다.
탓! 탓! 탓!
혜연의 손이 크게 원을 그리며 세 개의 창을 모조리 쳐 냈다.
하지만 튕겨 나간 창 중 하나가 허공에서 멈추더니, 이내 처음보다 더 빠른 속도로 혜연을 향해 날아들었다.
쇄애애애액!
날카로운 창끝이 혜연의 가슴에 닿는다.
막아 낼 수 없음을 직감한 혜연이 이를 악물며 가슴께에 내력을 끌어모으는 순간.
카아아아앙!
뒤쪽에서 날아든 검이 혜연의 가슴에 거의 닿은 창을 단숨에 쳐 냈다.
서걱!
이어 발출된 검기가 창수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창수를 보며 혜연은 순간 멍해졌다.
“교대입니다.”
“자, 장문대리!”
혜연이 제 앞으로 내려서는 백천을 보며 소리쳤다.
“저는 아직……!”
“압니다. 하지만 여기서 힘을 다 빼선 안 됩니다. 뒤쪽을 도와주십시오! 당 소가주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그 말에 혜연이 후미 쪽을 바라보았다.
“어서!”
“……예!”
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그러자 백천의 좌우로 두 사람이 날아들었다.
탓. 탓.
왼쪽에 조걸. 오른쪽에 윤종.
중앙에 선 백천이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너무 지체된 것 같지?”
“확실히 그런 면이 있습니다.”
“길게 끌 것 없죠.”
백천이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혜연은 훌륭하다.
남궁도위는 대단하다.
하지만 그래도 백천에겐 역시나 이 두 놈이 세상에서 제일 든든했다.
“단숨에 간다. 이 협곡 끝까지!”
“예!”
“예, 사숙!”
백천과 조걸, 그리고 윤종.
화산의 세 검수가 단숨에 적들을 향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