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2화. 나는 알 것 같은데? (2)
지원하려던 백천이 발을 멈추고 멍하니 뒤쪽을 바라보았다.
녹색 장포를 입은 당패의 등이 보였다.
그가 퍼트린 독분과 독액, 그리고 발출해 낸 암기들이 후미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이 정도였나?’
당패에게 뒤를 맡겼던 건, 독과 암기라는 특성이 위험에 처한 이를 광범위하게 지원하기에 용이하고 후미에 따라붙는 이들을 저지하기에 최적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백천이 원한 건 저지였다.
저런 일방적인 학살이 아니라 말이다.
‘소가주님.’
백천의 눈에 얼핏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그는 물론 당패를 존중한다.
하지만 당패가 그렇게까지 도움이 될 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냉정히 말해, 천우맹에서 온 이들의 면면을 감안한다면 당패는 겨우 전력이 될까 말까 한 존재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당패는 그런 백천의 생각이 모두 오산이었음을 자신의 손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나라면 뚫을 수 있을까?’
저 독의 향연을?
‘안 되겠지.’
뚫을 수야 있다. 무리한다면 뚫는 것쯤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중독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전장에서 저런 극독에 중독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백천이 아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둘이다.
당패가 지닌 독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시간을 끌거나, 당패가 이 좁은 협곡이라는 지형을 벗어나 독의 위력이 줄어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그건 승리가 아니야.’
그때면 당패는 이미 얻고자 하는 것을 모두 얻어 낸 이후일 것이다.
이어진 승부에서야 승리하는 게 어렵지 않다고 해도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건 승부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패하는 길이다.
백천은 당패의 손에 들린 독병을 날카롭게 보았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 낸 독을 말이다.
“저 독은 대체…….”
“아저씨가 무리하셨네.”
들려온 목소리에 백천이 옆을 보았다.
강남에 진입한 이후로 내내 무심한 얼굴로 일관하던 청명이 놈의 입에 묘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기둥뿌리를 뽑을 생각인가? 하여튼 통이 크다니까.”
“무슨 소리야?”
“저 독, 잘 봐 둬.”
청명의 말에, 백천이 다시 당패를 바라보았다.
청명이 말했다.
“당가가 비무에선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들 하잖아. 상대에게 던진 암기가 무슨 사고를 부를지 모르고, 중독된 이의 상태가 언제 심각해질지 모르니까. 그렇지?”
그거야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건 반만 맞는 말이야.”
“응?”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상대도 독과 암기를 상대한다는 부담을 이겨야 하거든. 비무에서 제 실력이 안 나온다는 건 당가 놈들이 입에 달고 사는 엄살이나 다름없는 말이지.”
백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관점으로 보면 청명이 놈의 말도 딱히 틀리지 않다.
익숙한 검이나 도 같은 병기를 상대하는 것과 독과 암기를 장기로 삼는 이들을 상대하는 건 전혀 다르니까.
상대 역시 낯선 무학에 대한 부담을 안고 승부에 임해야 한다.
“당가가 진짜 불리한 부분은 그런 게 아니라, 바로 저거야.”
“저거라니?”
“저 독은 비무 같은 데서는 못 써.”
“왜?”
“해약이 없거든.”
백천의 눈이 일순 흔들렸다.
“당가 놈들 중 반은 독에 미쳐 있고, 반은 암기에 미쳐 있지. 그리고 암기 중에 그 위력이 너무 지독해서 사람에게 쓸 만한 게 아니다 싶은 것들은 금용암기니 어쩌니 하면서 당가인들조차 쓸 수 없게 봉인되어 있어.”
“그건 상식이잖아.”
“그게 얼마나 개소린지 생각해 봐. 안 쓸 거면 폐기하면 되지, 왜 봉인을 해?”
“어…….”
백천이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언젠간 쓸 생각이니 폐기하지 않는 거야. 정말 위기가 닥쳐 오면 강호의 금도고 나발이고 모조리 다 끌어다 갈겨 버리겠다는 거지.”
“…….”
“그리고 그건 암기뿐만이 아니야. 당가에서 가장 지독한 절독. 해약조차 없어서 치료가 불가능한 것들. 그래서 쓰는 것만으로도 타 문파의 반발을 불러올 독들은 당가 가장 깊숙한 곳에 봉인되어 있지.”
“그게…….”
화아아아악!
그 순간 당패의 손끝에서 다시 독연이 피어올랐다.
독연을 휘감은 독장(毒掌)이 어떻게든 길을 열어 보려던 혈의인들을 단숨에 밀어 냈다.
청명은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았다.
해약이 없는 걸 걱정해 줄 필요 없는 놈들을 만났을 때, 당가가 가진 진짜 힘이 드러난다.
당가는 평범한 문파와는 다르다.
일반적인 문파에선 무학을 연구하는 이가 극소수고, 대부분은 무학을 익혀 경지를 높이는 데 전념한다.
하지만 당가는 가문 내에 적지 않은 이들이 오직 독과 암기를 연구하는 데만 평생을 바친다.
그 이유야 너무 간단하다.
훌륭한 무학을 만든다고 해서 그 무학이 문파의 수준을 끌어올려 주는 것은 아니다.
문파의 힘을 만드는 건 무학 그 자체가 아니라 제자들의 무위다.
이것이 무학의 역설이다.
심오한 상승무학은 익히는 이를 드높은 경지로 이끌어 주지만, 난해하기 짝이 없어 드높은 재능과 지독한 고련, 끝없는 세월을 요구한다.
어디 소림에 무학이 부족하던가?
무당에 제자를 천하제일로 이끌 무학이 없던가?
이미 존재하는 무학조차 다 익히지 못해 허덕이는 게 명문 제자들의 현실이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익힐 더 높은 경지의 무학을 연구하는 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연구한다 해도 만들어 낼 수가 없고, 만들어 낸다 해도 익힐 수가 없다.
‘하지만 독은 다르지.’
설사 그 독이 절대고수끼리의 승부에서는 무의미한 수준으로 전락한다고 해도, 세상에 절대고수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대부분 무인들에게 당가의 독은 사신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좀 더 빠르고 쉽게 중독시킬 수 있는 독을 만들어 내는 것만으로도 당가 자체의 힘이 커질 수 있는 것이다.
“본인이 얼마나 강한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적어도 당가는.”
“…….”
“더 중요한 건, 그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가다.”
백천이 살짝 얼굴을 굳혔다.
그러자 청명이 그 얼굴을 살피고는 히죽 웃더니 물었다.
“당패 정도는 언제든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무, 무슨 소리를…….”
“동룡아. 네가 그래서 아직 동룡이인 거다. 세상은 넓고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백천은 뭐라 반박을 하려다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괜히 반박해 봐야 추해질 뿐이다.
청명의 지적이 그리 틀리지 않았으니까.
청명이 당패 쪽을 보다 중얼거렸다.
“다만…… 지금 무리하고 있는 것도 맞지.”
과하게 독을 뿌려 대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 후미에 선 이가 당보였다면, 열두 자루의 비도만으로도 다가오는 모든 이들을 주살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당패는 비도만으로는 적을 막아 낼 수 없다.
그러니 수량에 한계가 있는 독을 계속 소모하는 것이다.
“길게는…….”
“길게는 못 버티겠지?”
청명과 백천의 말이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
청명은 조금 놀란 눈치로 백천을 새삼스레 보았다.
백천은 이미 청명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모습이 어째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지금 백천은 청명과 대화를 하고 있다.
예전이었다면 청명의 말속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을 텐데, 이젠 스스로 답을 내어놓으려 하고 있다.
‘이젠 병아리라고도 못 하겠네.’
위기는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고, 전쟁은 무인을 완성한다.
어쩌면 이 지독한 추격전 속에서 가장 성장하고 있는 건 백천일지도 모른다.
“청명아! 네가 앞으로…….”
“틀렸어.”
백천이 움찔하며 말을 끊었다.
틀렸다고?
당패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에 봉착할 것이다.
하지만 당패가 쓰고 있는 독의 특성상 그를 지원하기는 불가능하다.
도우러 간다고 해도 저 독 속에서 싸워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협곡을 뚫는 속도를 높일 수밖에 없고, 그게 가능한 건 청명이 놈뿐일 텐데?
“하나 기억해 둬, 사숙.”
청명이 얼핏 잔혹해 보이는 웃음을 흘렸다.
“전쟁에서 사람이 제일 많이 죽는 순간이 언제인지 알아?”
“갑자기 무슨…….”
“이겼다고 생각할 때.”
“…….”
“사람은 그때 방심하거든. 그러니까 확실하게 기억해 둬. 우리가 상대하는 놈들도 사람이다. 놈들은 어떻게든 우리를 죽이려고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어.”
청명의 두 눈이 위쪽으로 향했다.
벽처럼 솟아오른 드높은 절벽이 마주 보고 있다.
그 틈새로 보이는 건 너무도 좁고 긴 하늘뿐이었다.
“온다.”
청명의 말에 백천의 몸이 덜컥 굳었다.
‘폭약? 아니면 기름?’
순간적으로 과거에 겪었던 흑룡채의 참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아니! 그건 불가능해!’
백천은 고개를 내저었다.
폭약으로 절벽을 터뜨린다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높은 산 위에서 대량의 기름을 퍼부으려면 그 준비를 하는 데만 해도 대량의 인력이 필요하다.
장일소가 그걸 해낼 수 있었던 건, 이미 준비해 둔 덫 안으로 구파일방을 끌어들이는 식으로 싸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장일소가 대단한 것 아니던가?
하지만 이번에는 그게 가능한 상황이 아니다.
호가명은 그들을 뒤쫓는 상황이고, 천우맹과 해남이 이곳으로 향할 거란 예측을 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제 수족 같은 수하들도 아닌, 연맹의 인원들을 동원해 미리 대비를 갖추는 건 호가명이 아니라 제갈량이 현신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그럼 대체 뭐가 온다는 말인가?
고민의 순간은 길지 않았다.그 순간 백천은 보았다.
길게 이어진 좁다란 하늘이 순간 짙고 검은 무언가로 뒤덮이며 협곡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협곡을 뒤덮은 무언가는 점차 선명해졌다.
백천이 순간 눈을 부릅떴다.
저건 구름 같은 게 아니다.
“위에서! 빌어먹을! 위에서 온다!”
그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늘을 뒤덮은 건, 사람이었다.
저 위에서 무수한 사패련의 무사들이 뛰어내리고 있었다.
이곳을 통과하려는 이들의 머리 위를 모조리 뒤덮고도 남을 만큼의 수였다.
‘안 돼!’
백천의 눈에 다급함과 초조함이 어렸다.
이 협곡을 돌파할 수 있는 이유는 적이 앞과 뒤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중앙에 자리한 해남의 제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고.
하지만 저 위에서 공격해 오는 이들이 중앙에 있는 해남의 제자들과 뒤섞인다면?
‘끝장이다!’
이렇게 좁은 곳에서 난전이 벌어진다면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일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으로? 뒤로? 그 어느 쪽으로도 물러날 수 없는데!
“갔다 온다.”
“뭐?”
파아아아앗!
그리고 그 순간, 백천의 옆에 있던 청명이 섬전처럼 위로 솟구쳤다.
“처, 청명아!”
어느새 한 손에 암향매화검을 뽑아 든 그는 가파른 절벽을 마치 평지처럼 질주했다.
검 끝에서 흘러나온 붉은 검기가 긴 잔영을 흘리며 흰 절벽 중앙에 붉은 선을 그려 냈다.
파앗!
그리고 그런 청명의 옆으로 또 한 사람이 달려 올라갔다.
“사고!”
당소소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평소처럼 표정이랄 게 없는 유이설이 솟아올라 청명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청명, 그리고 유이설.
두 사람이 떨어져 내리는 무수한 사패련 무사들을 향해 환영처럼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