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0화. 상대가 당신이라면 양보해야지. (4)
투우우우웅!
앞쪽에서 터져 나오는 타격음을 듣는 순간, 이자양의 몸이 움찔했다.
‘이게 소신승(小伸僧) 혜연인가?’
그의 두 눈이 거세게 떨렸다.
강하다. 아니, 강하다는 말만으로는 표현이 다 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혜연뿐만이 아니다.
남궁도위의 실력 역시 그가 생각한 수준을 까마득히 넘어섰다.
그들이 보여 주는 힘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전율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이렇게나…….’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니 질투조차 나지 않을 지경이다.
물론 저들은 애초에 수많은 후기지수들 사이에서도 격이 다르단 평과 천하의 기대를 온몸으로 받던 이들이다.
그러니 저들과 그를 비교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나 충격을 받은 건, 저들이 불과 몇 년 만에 이토록 강해졌다는 것이다.
고작 그 시간 동안 격차가 이렇게 까마득히 벌어졌다는 점이 가장 놀라웠다.
‘후기지수 비무대회에서는 절대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때도 저들은 분명 강했다.
이기는 건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분명 그 차이가 절대 이 정도는 아니었다.
시간을 두고 정진해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맞상대할 수 있겠다는 희망 정도는 품을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혜연과 남궁도위가 보여 준 무위는 그런 이자양의 생각을 여지없이 박살 냈다.
그가 부지런히 뛰는 동안 저들은 이미 하늘을 날아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까마득히 멀어진 것이다.
‘대체 그 몇 해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타고난 재능이 다르다는 말로는 설명이 다 되질 않았다.
“더 빨리 달려요!”
“안으로 들어가!”
등 뒤에서 연신 쏟아지는 고함을 들으며 이자양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달렸다.
지금은 이런 것에 일일이 충격을 받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협곡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터무니없이 좁았다.
혜연이 부지런히 길을 열고 있지만, 몰려온 이들이 완전히 진입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노리고 공격해 온 이들을 다른 화산의 제자들과 해남의 장로들이 막아 내고 있었다.
“더 빨리 움직여! 빌어먹을, 쓸데도 없는 검은 왜 뽑고 있어! 검 넣고 더 밀착해, 이 자식들아!”
이자양이 피를 토할 기세로 악을 썼다.
울분과 짜증, 자신에 대한 실망, 무력감이 고스란히 담긴 목소리였다.
“예!”
해남의 제자들이 몸을 구겨 넣듯 협곡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됐어!”
“움직여! 이 인간들아!”
그때, 임소병이 쩌렁쩌렁 소리를 쳤다.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화산의 제자들이 날다람쥐처럼 해남 제자들의 머리 위를 타 넘고 앞쪽으로 달려 나갔다.
“장로님들은 중간으로 가시고! 머리 위에서 공격이 올 수도 있으니 방비하십시오!”
“알겠네!”
금양백이 이끄는 장로들이 크게 대답하고는 협곡 안으로 섬전처럼 이동했다.
협곡 밖에 진을 치고 있던 이들이 어떻게든 발목을 잡아 보려 했지만, 남궁도위와 혜연에게 전력의 절반 이상을 잃은 그들의 힘으로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다 된 건가?’
일단 진입까지 성공했다면 절반은 된 것이라 봐야 한다.
이자양은 뒤쪽을 돌아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주 깊은 곳에 묻어 뒀던 희망이 머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때.
‘엇?’
그가 두 눈을 부릅떴다.
좌우로 솟은 절벽 때문에 좁은 시야로, 똑똑히 보였다.
그들이 통과해 온 빽빽하고 컴컴한 숲이 요동치듯 흔들리는 모습이 말이다.
“저, 저기…….”
수풀이 격하게 뒤흔들린 끝에, 그 안에서 붉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객이 무수하게 뛰쳐나왔다.
빽빽한 숲에서 달려 나온 그 혈의인들은 곧장 협곡 쪽으로 쇄도해 왔다.
순간 이자양의 전신에 소름이 타고 올랐다.
“오, 옵니다! 뒤쪽! 뒤쪽이에요!”
그가 비명처럼 고함을 쳤다.
“빌어먹을, 뒤쪽이라고!”
그 목소리는 다급하다 못해 처절했다.
이자양은 해남의 제자 중 그나마 병법에 조예가 깊다고 자부할 만한 이였다.
그런 그이기에 알 수밖에 없었다.
이 좁디좁은 협곡에서 앞뒤 양쪽으로 포위당한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말이다.
게다가 지금 뒤쪽에서 쇄도해 오는 이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그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일전에 그들을 습격했던 이들과 같은 부류인 듯했다.
“자, 장로님들, 뒤쪽입니다! 뒤쪽을 막아야 합니다! 빌어먹을, 장로님들!”
이자양이 악을 쓰며 상황을 알리려 애썼지만, 그 목소리는 전장의 소음에 파묻혀 버렸다.
‘아, 안 돼!’
이자양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미 화산의 제자들과 장로들은 앞쪽으로 이동한 뒤다.
그럼 저 혈의인들은 평범한 해남 제자들의 뒤를 잡게 된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이미 확인하지 않았던가?
“이런, 빌어먹을!”
이자양이 다급히 땅을 박차며 몸을 띄워 올렸다.
장로들이 바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그라도 가야 한다.
저들을 막아 낼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사제들보다는 그가 나을 테니까.
몸을 띄우자 협곡의 입구까지 순식간에 쇄도해 온 혈의인들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위가 뒤틀리는 듯했다.
이자양의 결심이 무색하게 혈의인들이 협곡 안으로 뛰어드는 속도가 더 빨랐다.
‘마, 막아야…….’
그 순간이었다.
퍼어어어엉!
퍼어어어어엉!
협곡의 입구에서 폭음이 울려 퍼지더니 시커먼 매연이 삽시간에 입구를 집어삼켰다.
‘뭐지?’
파앗.
그와 거의 동시에, 누군가가 손을 뻗어 허공에 있는 이자양의 발을 낚아채 아래로 끌어당겼다.
“어엇!”
“내 앞으로 가지 마십시오.”
“……예?”
“중독될 테니까.”
이자양을 바닥으로 끌어 내린 자가 널따란 소매 안으로 양손을 밀어 넣었다.
“협공이라……. 뻔하지만 좋은 수지. 하지만 한 가지를 놓쳤군.”
전력의 후미에 있던 사내, 당패였다.
“강호의 격언이지. 당가의 뒤는 쫓지 마라. 너희 스승은 그런 것도 안 가르쳐 준 모양이지?”
당패가 소매 안에서 독병과 독단을 꺼내더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내 자욱하던 독연이 흐려지며 거기에 뒤덮였던 이들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끄, 끄륵…….”
혈의를 입은 이들이 제 목을 움켜쥐고 크게 경련하고 있었다.
고통이 극심한 모양으로, 손에 쥔 무기마저 놓친 채 발작하는 이들도 있었다.
독이 무서운 이유가 이것이다.
대련에서 일 대 일로 승부를 나누는 상황이라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수 있으니 독이 제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그리고 설사 중독이 된다 해도 내력으로 어느 정도 누를 수 있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순간순간이 다급한 전장에서 언제 어디서 터져 나올지 모르는 독을 항시 경계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리고 중독을 다스릴 여유도 당연히 주어지지 않는다.
“큭!”
“저 개 같은 놈이!”
앞서던 동료들이 중독되어 쓰러지는 걸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뒤따르던 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직 독연이 뻔히 보이는데, 무슨 수로 그 안에 뛰어들겠는가?
“해독단을 복용해라!”
“예!”
혈의인들이 일제히 무언가를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당패가 비웃음을 흘렸다.
“해독단이라. 나쁘지 않은 대처지.”
지금 앞에 있는 이가 당가의 적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사람들은 당가를 잘 모른다.’
심지어 저 화산조차 당가라는 문파를 완벽히 이해하진 못할 것이다.
당패는 당군악이 잡은 방향이 옳다고 생각한다.
독에 너무 골몰하다 못해 함몰되어 일신의 무력이 부족하다는 청명의 지적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도 십이비도 수련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동시에, 그 지적만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가는 남궁세가와 쌍벽을 이루는 강호의 명문세가다.
그런 당가인들이 정말로 멍청하고 어리석어서 한계가 명확한 독에 모든 걸 걸었겠는가?
독에는 암기가 가지지 못하는 완벽한 강점이 있다.
지금까지 당가라는 문파를 지탱해 온 완벽한 강점이.
“약해 빠진 놈에 불과하다! 단숨에 베고 간다!”
당패가 피식 웃었다.
확실히 저 말도 맞다.
그는 약해 빠졌다.
그가 가진 일신의 무력은 저 혜연이나 남궁도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화산검협이나 화산정검은 논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게 당패가 저들보다 쓸모가 없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그는 다름 아닌 당가인이니까.
“쳐라!”
독연이 잦아들자 혈의인들이 쓰러진 제 동료의 시신을 넘으며 단숨에 당패에게 달려들었다.
동료가 죽는 것을 봐서인지, 독을 경계하기 위해서인지, 기세가 더없이 살벌했다.
하지만 당패는 급한 기색도 없이 태연자약하게 손에 든 독병의 마개를 열었다.
“이해가 그렇게 어려운가?”
마개를 열린 순간, 평생 독을 다뤄 온 그조차도 몸을 움츠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독기가 병 속에서 흘러나왔다.
“당가인의 무력은 그런 식으로 따지는 게 아니라는 걸 말이야.”
카아앙!
독병을 허공에 띄운 그는 그 병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화아아아악!
병이 깨지자 안에 들어 있던 독액이 당패의 장력과 뒤섞여 활짝 펼친 부채처럼 퍼졌다.
위력이 아닌 범위를 점하기 위한 당가 특유의 장력.
그 장력이 실어 나르는 건 강렬한 내력도, 가공할 힘도 아니다.
바로 정제된 독이다.
“어엇!”
달려들던 이들은 순간 저도 모르게 헛숨을 내쉬었다.
공격은 쳐 내면 된다.
내력은 맞부딪치면 된다.
하지만 장력과 뒤섞여 쏟아지는 독은 막아 낼 방법이 없지 않은가?
“읍!”
화산이 폭발할 때 뿜어져 나오는 고열의 분진처럼 장력이 덮쳐 왔다.
결국 이들은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리며 장력에 맞섰다.
눈을 감고 호흡을 멈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력 자체에 실린 힘은 강하지 않다.
독만 흡입하지 않는다면 저 정도는 맨몸으로도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좋은 대처가 아니었다.
뜨거운 증기 같은 무언가가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감았던 눈을 뜨려던 이들은 순간 당혹했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극심한 가려움이 전신을 덮친 것이다.
“큭…….”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고작 숨 한 번 내쉴 만큼의 짧은 순간이 흐르자 가려움은 참지 못할 가려움으로 돌변했다.
그 가려움은 이내 쓰라림으로, 그리하여 결국 격렬한 고통으로 변해 갔다.
“끄으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전신을 인두로 지지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피부에 달라붙은 독이 실제로 피부를 녹이고 있었다.
“꾸르르륵…….”
칠공(七孔)에서 검은 피를 쏟아낸 이들이 하나둘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피부가 시커멓게 녹은 채로 절명한 인간이 자그마치 열이 넘었다.
정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이놈…….”
동료들이 반쯤 녹아 죽어 가는 모습을 본 이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당패를 주시했다.
당패는 손에 든 열두 개의 비도에 태연히 독을 바르고 있었다.
암녹빛을 띤 액체가 비도를 물들였다.
이를 보는 이들의 등골엔 순간 서늘한 한기가 스쳤다.
“물론 나야 약하지. 그런데…….”
당패가 비도를 든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내가 쓰는 독은 쓰는 사람의 실력과는 관계가 없거든. 그게 당가의 무서운 점이지.”
비도를 들지 않은 손이 소매 안에서 나왔다.
독단이 들려 있는 걸 본 순간, 혈의인들이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주춤 물러났다.
“아무래도 나는 당씨가 맞나 보네.”
“…….”
“사람을 죽인다는 거리낌보다는 이 독들을 실전에서 써 본다는 즐거움이 더 큰 걸 보니 말이야. 와라. 가주께서 친히 하사하신 독을 듬뿍 먹여 주마.”
사천당가 적자 당패의 두 눈에서 번들거리는 살기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