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6화. 대체 놈은 뭐지? (6)
“상황은?”
“아직 전투는 벌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호가명의 눈이 차게 빛났다.
이미 전투가 시작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그럼에도 아직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건, 협곡을 앞에 두고 저들이 멈춰 섰다는 의미.
그리고 멈춰 섰다는 건, 저들이 고민하며 망설이고 있단 뜻이다.
“……거리는?”
“이 속도대로라면 일각 내에 도착합니다!”
“일각이라…….”
저들이 호가명이 있는 본대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없어.’
다른 이는 몰라도 임소병은 절대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장일소가 그를 진짜로 잡을 마음은 없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임소병은 녹림이라는 오합지졸을 지휘해 그들에게 대등히 맞섰다.
만일 임소병이 장일소에게 충성하겠다고 했다면, 호가명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사패련의 요직에 앉혔을 것이다.
그 정도로 임소병의 능력은 탁월하다.
그만한 이가 이런 간단한 계산에서 실수를 저지를 리는 없다.
그렇다면…….
“뚫겠다는 건가, 그 협곡을?”
호가명이 눈을 반개하며 생각에 잠겼다.
저들 내부에서 결론이 어찌 났는진 알 수 없어도, 어쨌든 그 길을 고민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정말로 그게 가능한가? 심지어는 해남을 이끌고?
“놈들의 수는 얼마나 줄었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해남은 이 할 이상의 손실을 본 것으로 보입니다.”
“이 할이라.”
병법에서는 삼 할 이상의 병력을 잃은 군세는 더 이상 군으로 치지 않는다.
병력의 삼 할을 잃어버리는 순간 사기가 땅으로 꺼져 더는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해남에게 일반적인 군의 경우를 가져다 댈 수는 없다.
저들은 군으로 따지자면 수십 년동안 특수한 훈련을 받은 정예 중의 정예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만한 피해를 입은 해남을 이끌고 협곡을 통과하기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일 터.
그러니 우회하는 것이 상식일 텐데…….호가명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저들이 우회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 남부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기를 바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저들이 광동을 빠져나가기 전에 뒤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완급을 세밀히 조절하며 저들을 절벽까지 몰아넣었다.
상식이 있다면 벌써 우회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움직임이 없다는 건, 누군가가 협곡행을 주장하고 있단 의미.
그리고 그게 누구일지는 너무도 뻔했다.
‘대체 놈은 뭐지?’
화산검협은 이 와중에 그 협곡을 돌파하겠다는 건가?
벽처럼 틀어막아 놓은 곳을?
“그, 그건 불가능합니다.”
보고하던 이가 아연실색하며 말했다.
“귀신도 건너다 떨어진다 해서 낙귀곡이라 불리는 곳 아닙니까? 그놈들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쿡쿡쿡쿡.”
그때 괴량이 흘린 짙은 비웃음이 끼어들었다.
“저런 것들을 수하라고 끌고 다니려면 인내심이 대단하셔야겠군.”
순간 보고하던 이의 얼굴이 수치로 붉게 물들었다.
호가명이 힐끔 괴량을 돌아보며 물었다.
“네 생각은 다른 모양이지?”
“놈이 돌파하지 않을 리가 없지.”
괴량이 제 입술을 핥았다.
“좁디좁은 협곡, 절대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방어선?”
“…….”
“그건 우리 기준이지. 놈에게는 그리 보이지 않는다. 반드시 돌파하지.”
“그렇다고 굳이? 피해가 커질 뿐인데.”
“뻔한 소리를 하는군, 군사. 나를 시험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헉헉대느라 머리에 피가 잘 돌지 않는 건가?”
“군사께 그 무슨 무례한……!”
호가명이 살짝 손을 들어 발끈하는 이를 만류했다.
괴량의 말이 들을 만하다 생각해서가 아니라, 아직 쓸모가 있는 수하의 목이 이런 곳에서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계속해 봐.”
“너희는 그 화산검협이 나름 병법에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더군.”
“……부정하지 않지.”
호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화산검협을 겪은 이라면 모두가 인정하는 바일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찬찬히 따져 보면 그의 행동에는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다.
앞만 보고 움직이는 게 아니다.
두 수, 세 수, 심지어 수십 수 뒤를 보고 움직일 줄 안다.
이건 과대평가가 아니다. 이젠 화산검협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착각?”
괴량이 단언했다.
“놈은 병법 같은 건 몰라. 그런 걸 애써 익힐 놈이 아니지.”
호가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같은 의미로 방주도 병법을 모르지. 하지만 그들은 병법을 깊이 연구한 자를 가볍게 농락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아나?”
“글쎄?”
“병법을 아는 게 아니라, 자신이 상대하는 이들이 무얼 노리는지를 아는 거야.”
호가명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건 경험이나, 감각, 어쩌면 본능이라고 불러야 할 영역이겠지. 우리 같은 이들은 놈의 감각이 비상하다고 말하지만, 너희 같은 것들은 절대 그렇게 끝내지 않지. 패한 데는 이유가 있어야 하니까.”
호가명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니 돌파할 거란 건가?”
“그래. 네가 돌파하지 않기를 원하니까. 상대가 원하는 대로 끌려간다면 지금 당장의 피해는 면한다 해도 결국 더 큰 수렁으로 빠진다는 걸 놈은 알고 있겠지.”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호가명이 눈을 가늘게 뜨며 단언하듯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그 화산검협을 과대평가한 거겠지.”
“음?”
“팔이 잘리는 것과 목이 잘리는 것 중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팔이 잘리는 걸 택해야 옳다. 상대가 팔을 잘라 내기 위해 내민 칼을 피하겠답시고 목을 내미는 건 머저리나 하는 짓이지.”
괴량이 비릿하게 웃었다.
“확실히 그렇겠지만…… 그렇게 번번이 목을 내밀고도 지금까지 살아남았으니 놈이 화산검협인 거다. 당연히 택해야 할 길만 택해 왔다면 지금쯤 기껏해야 섬서의 신진고수 정도였겠지.”
맞는 말이다. 그리고 호가명은 알고 있다.
이 말은 장일소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장일소가 호가명의 권유를 항상 받아들였다면, 그는 절대 지금의 패군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화산검협과 패군. 둘 다 그의 상식을 벗어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로군.”
결론을 내린 호가명이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속도를 높여라! 전력으로 간다.”
“예!”
함께 달리던 이들의 속도가 배는 더 빨라졌다.
괴량이 의외라는 듯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여력을 남기지 않을 셈인가?”
“정말 놈이 협곡을 뚫을 각오를 했다면…….”
호가명이 씹어뱉듯 말했다.
“나는 그곳을 놈의 무덤으로 만들어 줘야겠지. 만인방의 땅에 묻히는 것만큼 놈에게 치욕적인 죽음도 없을 테니까.”
“큭큭. 그것도 좋군.”
호가명은 대꾸하는 대신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놈이 정말 강행을 선택했다면, 여기가 승부처다.’
이 협곡을 뚫리면 놈이 광동을 빠져나가는 걸 지켜봐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반드시 련주가 놈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렇게 되기 전에 놈을 이곳에서 죽여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호가명의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흘러나왔다.
‘반드시 여기서 죽여 주마, 화산검협.’
* * *
“후우.”
남궁도위는 깊게 심호흡하며 숨을 골랐다.
‘토할 것 같군.’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전투를 조금이라도 겪어 본 이라면 저 지형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를 수 없다.
협곡은 겨우 사람 셋이 어깨를 맞댈 정도의 너비다.
횡으로 가르는 일 검으로도 눈앞의 적을 상대할 수 있다는 의미.
홀로 가기에는 넓고 둘이 가기에는 좁다.
그리고 그 협곡의 앞에는 쉰 명 정도가 진을 치고 있다.
하나같이 눈빛이 형형한 것을 보아, 결코 만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남궁도위는 지금 저곳에 제 발로 뛰어들어야 한다.
오직 그의 검 하나만 믿고.
‘미친 짓이지.’
속은 울렁거리는데, 입에서는 자꾸 실소가 새어 나왔다.
화산이 미친 짓을 저지르는 모습을 지켜볼 때는, 황당함을 느끼면서도 내심 그 모습을 동경하기도 했다.
어쩌면 남궁도위가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이유에 그 동경이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도 저들처럼 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그들처럼 저질러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니 알게 되었다.
저들이 그 미친 짓들을 저지르며 얼마나 큰 압박과 심적 갈등을 이겨 왔는지 말이다.
‘성공하면 영웅.’
남궁도위가 제 애검을 힘껏 움켜잡았다.
‘실패하면 다시없을 등신인가?’
또다시 실소가 새어 나왔다.
화산이 매화도에서 남궁세가를 구해 낸 일은 더없이 영웅적인 행위였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매화도로 진격하던 도중 사패련의 칼날 아래 처참히 쓰러졌다면 어찌 되었을까?
비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이들이 화산을 비웃고 그들의 무덤에 침을 뱉었겠지.
설마 협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 이들을 그리 비웃겠냐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실패한 협의를 칭송하지 않는다.
그저 어리석다 혀를 차고 비난할 뿐.
남궁도위 역시 마찬가지다.그가 여기서 저들을 뚫어 내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는 남궁세가 역사상 최악의 가주로 평가될 것이다.
어쩌면 가문의 부흥을 제 손으로 날려 버린 천하의 등신으로 대대손손 욕을 먹을지도 모른다.
‘나도 제정신은 아니로군.’
뱃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장담컨대 예전의 남궁도위였다면 이 상황에서 절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에 뒤돌아 달아나 버리거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남궁황을 찾았겠지.
하지만 지금 남궁도위는 제 의지로 이곳에 서 있다.
이것만으로도 나아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긴장감에 손이 벌벌 떨려도, 어쨌거나 여기에 이렇게 서 있으니까.
‘아버지도 이런 기분이셨을까?’
어쩌면 이제야 그는 매화도로 향하던 남궁황과 같은 시작점에 선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 옆에서 청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오는?”
남궁도위는 그 질문이 제게로 향했단 걸 조금 늦게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다른 모두의 시선 역시 집중되어 있었다.
‘뭐라 대답해야 하지?’
허세를 부릴 수도 있다.
담담한 소회를 이야기해도 될 것이고, 필사의 의지를 표명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남궁도위의 선택은 모두 아니었다.
“……겁나 죽겠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황당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하지만 청명만은 그 대답이 무척 흡족한 듯 씨익 웃었다.
“그럼 됐어.”
고개를 끄덕인 청명이 백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숙.”
“그래.”
“이 새끼 쓸 만해.”
“원래 쓸 만하셨다.”
“……사숙. 말이 좀 꼬인 것 같은데, 원래 괜찮은 분이셨다라고 해야 합니다.”
“아, 그래?”
“……둘 중 하나만 합시다. 둘 중 하나만.”
윤종의 말에 백천은 한숨을 푹 쉬고는 남궁도위에게 시선을 주었다.
“소가주님. 그럼…….”
“예!”
남궁도위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선봉입니다.”
백천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
“선봉에 서고 싶어 하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조걸이 즉시 콧김을 내뿜었고, 유이설의 어깨가 움찔했다.
심지어 혜연마저도 슬그머니 그 머리를 들이밀었다.
남궁도위는 단호히 말했다.
“선봉은 제 겁니다. 양보 못 합니다.”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바보들뿐이라니까.’
남궁도위를 잠깐 바라본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확실하게 해 주십시오.”
“예!”
백천은 모두를 훑어보았다. 투지에 불타는 이도 있고, 두려움에 떠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 순간 어떤 감정을 품고 있든,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다.
백천의 곧은 눈빛이 수풀 너머의 협곡으로 향했다.
“가자!”
“타아아아앗!”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남궁도위가 검을 뽑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다른 이들도 뒤질세라 악을 쓰며 적들을 향해 돌격했다.
“하아아앗!”
순간 쏟아지는 기합과 고함에 진을 치고 있던 사패련의 무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온다!”
“놈들이다! 자리를 지켜라!”
“파고들어 온다!”
이들이라고 대책 없이 그저 자리만 지키고 있진 않았다.
적들이 어떤 방식으로 싸웠는지 질리도록 듣고, 그에 대한 대비도 이미 마친 뒤였다.
“방패!”
쿵! 쿠웅! 쿠웅!
커다란 목책 뒤에서, 옆에 뉘어 놓았던 방패를 들어 올렸다.
두껍고 무거운 쇠를 통으로 사용하여 만든 방패였다.
일반적인 군인이라면 자세를 잡기는커녕 여럿이 달려들어도 들어 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할 만큼 거대했다.
그 방패들이 일제히 땅에 콱 박히며 굳건히 자리했다.
그들의 무위로 화산검협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화산검협도 이 두꺼운 방패를 뚫기란 쉽지 않을 터!
“창!”
방패를 든 이들 뒤에서 창을 애병으로 쓰는 이들이 자세를 낮추며 포진했다.
화산검협의 검이 멈추는 순간 매서운 창날이 여지없이 그의 몸뚱이를 파고들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단단한 포진을 향해 뛰어든 이는 화산검협 청명이 아니었다.
“하아아아아아아압!”
귀가 터져 나갈 것 같은 거대한 기합과 함께, 새하얀 백광이 순간적으로 충천했다.
그 눈 부신 빛은 단단히 박아 세운 방패 위로 단숨에 날아들었다.
“뭐, 뭣……?”
방패를 든 이들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거대한 폭음이 일었다.
사람과 방패가 뒤섞여 날아간다.
일 검에 상대의 방어선 일각을 붕괴시켜 버린 남궁도위가 땅을 박차며 외쳤다.
“막는 놈은 모두 죽는다! 내가 남궁세가의 남궁도위다!”
장강까지는 모르겠지만, 하늘 어딘가까지는 반드시 닿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