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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05화 (1,306/1,567)

1305화. 대체 놈은 뭐지? (5)

조걸이 긴장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사형…….”

“쉿.”

하지만 그의 입이 열리기 무섭게 윤종이 말을 틀어막았다.

빽빽한 수풀 사이로 보이는 광경을 말없이 살피던 윤종은 얼굴을 굳혔다.

좁디좁은 협곡.

사실상 협곡이라는 말보다 갈라진 절벽이라는 말이 조금 더 어울리는 좁은 소로에 수많은 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기세가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돌아가자.”

“예.”

윤종과 조걸이 조심스레 몸을 돌렸다.

몸이 스칠 때마다 수풀이 바스락거렸다.

미세한 소리지만 흡사 귀를 긁어 대는 듯 거슬렸다.

최대한 수풀을 건드리지 않도록 몸을 숙여 조심스레 이동한 두 사람은 산의 뒷면에 접어드는 순간 몸을 일으켜 앞으로 질주했다.

한참 동안 질주한 그들은 산으로 이어지는 초입의 깊은 숲으로 접어들었다.

햇빛조차 잘 들지 않는 깊은 숲속으로 들어서니 전방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접니다!”

조걸이 외치자 그제야 날아들던 살기가 일순 씻은 듯 사라졌다.

허리께까지 자라난 수풀을 뛰어넘은 조걸은 제 앞에 앉아 있는 이들을 흘끗바라보았다.

해남의 제자들이 이곳저곳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꽤 줄었구나.’

조걸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니 상황이 좀 더 객관적으로 보였다.

처음 함께 해안에 도착했을 때에 비해 그 수가 확연히 줄었다.

수만 줄어든 게 아니다.

더 큰 변화는, 이들이 뿜는 기운이다.

언뜻언뜻 조걸에게로 꽂히는 해남파 검수들의 시선엔 섬뜩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조걸에게 적의를 보이는 게 아니다.

이곳에 접어들어 휴식을 취한 지가 꽤 되었음에도 앞선 전투에서 곤두섰던 신경과 살기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땀과 오물로 젖어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아보기 힘든 의복, 피와 먼지가 말라붙은 얼굴.

입술은 마를 대로 말라 쩍쩍 갈라졌고, 퀭한 두 눈 밑에 자리한 음영은 이들의 얼굴을 한층 더 무거워 보이게 했다.

무인이라기보다는 전투에 지친 군인들과 비슷해 보인다.

조걸은 새삼 이들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깨달았다.

만일 이곳까지 함께 이동하지 않았다면, 조걸은 해남에서 봤던 이들과 지금 이곳에 지쳐 주저앉은 이들이 같은 사람이란 걸 믿지 못했을 것이다.

‘불과 며칠일 뿐이었는데.’

물론 조걸이라 해서 이들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요 며칠 사이에 겪은 일들은 보통 남들이 몇 년 사이에 겪어야 할 고난을 뛰어넘는 수준이었으니까.

조걸 역시 청명을 만나 천천히 성장한 게 아니라, 이들처럼 갑작스레 전장에 내몰렸다면 비슷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들보다 더한 몰골이었을 것이다.

혹은 이런 몰골조차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 살아 오지 못했을 테니까.

골똘히 생각하며 걷던 조걸은 순간 발밑에 느껴지는 감각에 움찔했다.

황급히 발을 물렸다.

“아……. 죄송합니다!”

그가 밟은 것은, 해남 제자가 땅에 내려놓은 검이었다.

내려놓았다기보다는 던져 놓았다, 혹은 버려두었다는 말이 조금 더 어울렸다.

하지만 어쨌든 타인의 애병을 건드리는 건 굉장히 무례한 행위다.

타인의 애병에 함부로 손만 대어도 칼부림이 나는 게 예사다.

그런데 심지어 지금은 발로 밟은 상황이니…….

그러나 해남 제자는 제 검이 밟힌 걸 보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조걸을 흘끗 일별하더니 말없이 밟혔던 검을 대충 끌어다 앞에 툭 던져 놓았다.

조걸의 신발에서 검신으로 옮겨 간 진흙을 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 윤종이 조용히 다가와 채근했다.

“가자.”

“예, 사형.”

조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윤종의 뒤를 따라 걸었다.

조금 전 본 광경이 계속 머릿속에 껄끄럽게 남았다.

‘그래도 제 검인데.’

화산의 제자인 조걸 역시, 제 검을 목숨처럼 아끼라는 교육을 받아 왔다.

교육이라는 건 흰 천에 천천히 스미는 먹물과도 같아서, 오랫동안 같은 말을 들으면 사는 동안 저도 모르게 스스로 그 말을 지키게 되는 법이다.

명문인 해남은 화산보다 더 엄정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해남의 제자가 제 검을 마치 굴러다니는 나무 막대기처럼 다루고 있다.

목숨처럼 중요한 검을 저리 막 다룰 만큼 지친 것일까?

아니면 이곳에서는 그 목숨조차 저리 하찮다는 의미일까?

조걸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머릿속을 비웠다.

모두 의미 없는 생각이고 망상이다.

두 사람은 천우맹 일원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사숙.”

윤종의 부름에, 임소병과 무언가를 논의하던 백천이 시선을 주었다.

“다녀왔느냐?”

“예, 사숙.”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윤종이 굳은 얼굴로 설명했다.

“앞쪽에 있는 협곡이 생각보다 훨씬 좁습니다.”

“지난번 흑룡채가 있던 곳에 비하면 어떠하더냐?”

“그곳보다도 더 좁은 것 같습니다.”

백천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흑룡채로 진입하는 골짜기 역시 높고 가팔라서 위쪽에서의 공격에 대응하기가 힘들었다.

한데 그보다 더 좁다면 피할 곳도 마땅치 않으니 더 위험할 것이다.

“적들은?”

“물 샐 틈 없이 막고 있습니다. 협곡이 좁아서 밖에서 보기엔 그 수가 많지 않았지만, 그 뒤로 훨씬 길게 늘어서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출구 쪽에도 너른 진을 치고 있다고 가정하면…… 그 수가 적어도 오백 이상은 될 겁니다.”

“……오백이라.”

백천이 담담히 되뇌었다.

담담한 목소리와는 달리, 내심은 그리 편치 않았다.

‘끝이 없군.’

이곳까지 오면서 벤 이들의 수가 셀 수도 없다.

지금까지 살면서 저지른 살생보다, 요 며칠간 저지른 살생이 더 많을 정도다.

그런데도 줄어드는 적보다 충원되는 적의 수가 더 많다.

이젠 암담함을 넘어 절망감마저 느껴졌다.

“협곡을 통과하지 않고, 산을 오르는 건 어떠냐?”

“산세가 굉장히 가파릅니다. 저희는 몰라도 해남의 제자들이 과연 잘 따라올 수 있을지…….”

“……매복도 있겠지.”

“그럴 겁니다. 스치듯 살기를 느꼈습니다.”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걸이면 몰라도, 윤종이 확인한 이상 확실할 것이다.

절벽에 매복한 적쯤이야, 화산의 제자들에겐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평지에 도사린 적보다 더 수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의 모두가 화산의 제자인 건 아니다.

굳이 해남을 논할 것도 없이, 당장 남궁도위나 당패만 하더라도 절벽 위에서는 제 실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산을 제집처럼 누빈 임소병쯤 되면 모르겠지만.

백천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청명은 나무둥치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백천의 눈썹이 순간 꿈틀했다.

저놈이 화산의 제자들을 절벽에 매달고, 물속에 처박을 때는 그저 효율적으로 괴롭힐 방법을 찾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선 몇 번이나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 모든 수련에 의미가 있었음을 말이다.

물론 평화로운 세상에선 의미가 없는 수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죽고 죽이는 싸움이 이어지는 전시에는 그 모든 경험들이 목숨을 구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저놈은 이걸 모두 예상한 걸까?’

알 수 없다. 하지만 물어볼 수도 없다.

이 전투에 돌입한 이후 청명은 극단적으로 말수를 줄이고 있었다.

그리고 쉬는 순간이 오면 지금처럼 눈을 감은 채 오직 제 체력을 회복하는 데만 집중했다.

그래야 한순간이라도 더 싸울 수 있다는 듯이.

백천도 알고 있다. 그게 옳다는 것을.

회의랍시고 주고받는 대화 중에 절반쯤은 의미가 없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게 아니란 걸 확인하기 위해, 가슴속에서 치미는 불안감을 억누르기 위해 체력 소모에 불과한 대화를 쉴 새 없이 주고받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명은 마치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해야 할 일들만 기계적으로 해 내고 있다.

순간순간 저놈이 과연 그가 알고 지내던 청명이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사숙?”

백천은 길게 숨을 내쉬고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녹림왕.”

“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습관처럼 부채 끄트머리로 머리를 벅벅 긁은 임소병이 말했다.

“우회하는 게 제일 현명한 방법이겠지만…… 본디 전쟁에선 옳은 판단만을 따를 수가 없지요.”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회는 도주의 시간을 늘릴 뿐이다.

적을 쓰러뜨리는 속도보다 적이 충원되는 속도가 더 빠른 이상,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많은 이들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뒤쪽은…….”

“생각 안 하는 쪽을 추천합니다.”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뭐, 생각한다고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은 앞으로 가는 것만 생각해야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임소병이 앞서 말했던 것처럼, 옳다는 걸 알고도 이행하기 힘들 때가 있다.

머릿속에서 지워 보려 안간힘을 써도 뒤에서 만인방이 따라붙고 있음을 계속 생각하게 됐다.

‘아마 지척까지 도달했겠지.’

거리가 얼마나 될까? 두 시진? 아니면 한 시진?

여기서 이렇게 멈춰 있었으니, 적어도 한 시진 내에는 이곳에 도달할 거리까지 가까워졌을 것이다.

“그럼 결국은 뚫어야 한다는 말인데.”

백천은 주저앉아 있는 해남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지쳤는데, 지금부터 이어질 격렬한 전투를 버틸 수 있을까?

어제부터 오늘까지 이들은 고작 일각밖에 쉬지 못했다.

눈조차 붙일 수 없는 시간, 심지어는 운공을 하기에도 더없이 모자란 시간이다.

수련만 해도 극한까지 몰릴 상황이거늘, 며칠 동안 목숨의 위협을 버텨 내야 했다.

그런 이들이 이 전투를 버틸 수 있을까?

“……우회하는 방법도 생각해 봅시다.”

“장문대리.”

“피하는 게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윤종, 적의 수준은 어때 보이더냐?”

윤종은 굳은 얼굴로 차분하게 말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패련에서 온 놈들도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간간이 섬뜩한 기세가 느껴졌습니다.”

백천이 임소병에게 재차 말한다.

“저기를 뚫는다고 해도 피해가 커진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설령 피해가 크지 않다고 해도 저기서 모든 걸 소진해 버리면 쫓기다가 죽는 길밖에 남지 않습니다.”

“흐음.”

“내리는 비는 피하고 봐야지요. 저기만 통과한다고 끝이 아니잖습니까.”

백천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임소병은 안색을 굳힌 채 생각에 잠겼다.

그때, 불쑥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협곡으로 가.”

백천이 시선을 획 돌렸다.

어느새 눈을 뜬 청명이 검을 허리에 차며 다가오고 있었다.

“청명아.”

“저기만 넘으면 돼.”

“……청명아. 너는 그렇겠지만, 저들은…….”

“사숙.”

백천이 입을 다물었다.

“저기만 넘으면 돼.”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던 백천이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이 저리 말할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애초에 도주로를 이쪽으로 정한 이도 청명이 아니던가?

백천이 말했다.

“그렇게 하자. 하지만 피해가 너무 커지면 뚫어도 의미가 없다는 건 기억해야 한다.”

“피해?”

청명은 우습다는 듯 나직이 웃었다.

새하얗게 드러난 이가 이상할 만큼 섬뜩해 보였다.

“상황을 똑바로 봐야지, 이 책상물림들아.”

“……뭔 소리냐?”

“설령 우회할 길이 있어도 나는 저기로 갔을 거야.”

백천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청명이 씹어뱉듯 말했다.

“좁은 길에선 포위당하지 않지. 앞에 있는 적만 상대하면 그만이잖아?”

백천의 손이 순간 살짝 떨렸다.

하지만 청명은 그런 그의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차게 웃었다.

“백 명이고, 천 명이고 베기만 하면 길이 열리는 곳이지. 더 이상 좋은 길이 어디 있어.”

백천은 등을 타고 오르는 한기를 애써 무시하며 한숨을 쉬었다.

“……출발은?”

“지금.”

청명의 눈에 스산함이 깃들었다.

“대신 각오해 두라고 해. 생각 이상으로 끔찍할 테니까.”

모두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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