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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04화 (1,305/1,567)

1304화. 대체 놈은 뭐지? (4)

적호가 숨을 죽였다.

감히 고개를 들어 장일소의 눈치를 살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개 장일소를 모시며 겪는 가장 큰 고통이 장일소의 잔혹한 성정 때문에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것이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그건 만인방과 장일소를 잘 알지 못해서 하는 소리다.

장일소를 가까이서 모시는 이들이 가장 곤욕스러워하는 건, 장일소의 눈치를 살피며 태도를 바꿔야 하는 것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장일소의 눈치를 살피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지금 장일소는 분노하고 있다.

분노까진 가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불쾌해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적호는 장일소를 꽤 오래 보았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두고 장일소라는 사내를 짐작한다는 게 얼마나 헛된 일인지 잘 알았다.장

일소가 어떤 모습을 보이든, 그 속내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를 속이고 있다…….”

장일소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 가명이가 말이지?”

적호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장일소의 반응을 기다렸다.

생각은 굳이 할 필요 없다.

해야 할 보고는 모두 마쳤다.

이제는 그저 장일소의 판단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윽고, 장일소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적호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래. 그게 다인가?”

적호는 말없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의미가 없음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장일소의 표정을 살폈지만, 증기에 반쯤 가려진 그 얼굴은 어느새 평소처럼 권태로워 보이기만 했다.

“그렇게 호들갑을 떨 일도 아닌데, 쯧쯧.”

“……련주님.”

“누구 있니?”

“예, 련주님!”

대기하고 있던 어린 시비가 재빠르게 달려왔다.

그녀의 손에는 술과 잔이 올려진 쟁반이 들려 있었다.

장일소가 빙그레 웃으며 칭찬했다.

“눈치 빠른 아이로구나.”

시비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장일소는 느릿한 손으로 술을 따르고는 술잔을 들어 보였다.

“끝났으면 가 보렴.”

적호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이미 생각했듯이, 그의 할 일은 끝났다.

알아낸 것을 보고하는 것만이 제 일이었고, 이에 대해 무언가 판단을 내리는 건 오롯이 장일소의 몫이었다.

감히 그가 말을 얹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적호는 쉽사리 물러나지 못했다.

느릿하게 술을 한 모금 머금은 장일소가 이채를 띤 눈으로 적호를 지그시 보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니?”

“…….”

“아니면, 같이 술이라도 한잔?”

“련주님…….”

적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주제넘다는 것은 알지만, 지금은 그 주제넘은 짓을 저지르면서라도 곧이곧대로 말해야 할 때다.

“군사에 대한 련주님의 신뢰가 굳건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음.”

“하지만 이 건은 그리 쉽게 넘기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

장일소가 재미있다는 듯 적호를 바라본다.

적호는 그 시선을 받으면서도 차분히 말을 이었다.

“중소 문파만을 움직인 것이라면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하고 기다려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오문에 개인적으로 접촉한 것은 명백히 선을 넘은 일입니다.”

적호의 눈에 얼핏 열기가 끓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해선 안 될 일을 벌이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장일소의 나른한 시선과 적호의 시선이 마주쳤다.

여전히 둘 사이에는 수증기가 자욱했다.

한참을 말없이 적호를 보던 장일소가 나직이 소리 내어 웃었다.

“해선 안 될 일이라니.”

그의 눈에서 요사스런 광망이 쏟아졌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듣고 싶은데?”

적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련주님. 군사에게 주어진 권한은 막대합니다. 물론 사패련을 움직일 권한은 오직 련주님께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군사는 그 모든 권한을 대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가 사사로이 중소 문파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다시 말하자면…….”

적호가 씹어뱉듯이 말한다.

“군사가 다른 마음을 품고 하오문과 힘을 합친다면, 그가 가진 권한을 바탕으로 모반을 꾸미는 것 역시 그리 어렵지 않을 거란 뜻입니다.”

장일소는 순간 적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불시에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적호는 그의 이어질 반응을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모반?”

“…….”

“하……. 하하하.”

“…….”

“모반? 하하하핫. 모반이라니!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작게 시작된 웃음은 점점 격렬해졌다.

얼마나 온몸을 들썩이며 웃어 댔는지 잔에 든 술이 탕 안으로 쏟아졌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장일소는 한 손으로 배를 부여잡은 채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찔끔 배어난 눈물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훔치며 간신히 웃음을 갈무리했다.

“아……. 이렇게 웃어 본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나…….”

장일소는 아직 웃음기가 묻은 두 눈을 곱게 휘며 말했다.

“진짜 재밌었단다. 그러니 이제 그만 가 보렴.”

“련주님…….”

장일소는 다시 권태 묻어나는 얼굴로 욕탕 벽에 등을 기댔다.

“물론 너야 네 의무를 다하는 중이겠지만, 내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 의미 없는 일에 어울려 주는 것도 처음에나 재미있는 법이란다. 가명이가 모반이라니, 차라리 법정 그 늙은이가 머리를 기른다는 말을 믿는 게 낫겠구나.”

“이 일은 그리…….”

“그만.”

순간 적호의 몸이 움찔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장일소의 두 눈에선 감정이라 할 만한 것이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그럴 리가 없음에도 공기가 서늘해진 듯 오싹했다.

“네가 가명이를 모함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입을 열어야지.”

“저는…….”

“가명이에게 그 권한을 준 건 다름 아닌 나란다.”

장일소가 웃었다.

입술은 어느새 붉게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넌 지금 내 선택이 틀렸다고 말하고 있는 거란다. 이해하겠니?”

“저, 저는 그럴 의도가…….”

“알고 있다잖니.”

장일소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네가 그럴 의도로 한 말이었다면, 이 탕이 아직 이렇게 투명할 리 없지 않니.”

적호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이 투명한 물이 제 몸에서 쏟아져 나온 피로 붉게 물든 광경을 순간 머릿속에 그려 본 것이다.

“어쨌거나 기특하구나. 그 마음은 충분히 알겠으니 그만 가거라.”

하지만 적호는 고집스레 물러나질 않았다.

장일소는 한숨을 쉬며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충심이 있는 거야 좋지만, 그 충심만큼 머리가 따라 주질 않는 이들을 상대하자니 퍽 귀찮았다.

“련주님.”

“아직 할 말이 남았어?”

“……의도를 논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위험성을 논하고자 함입니다.”

“위험?”

“예. 사람의 마음은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저 현상만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군사가 이끌고 간 병력과 남부의 중소 문파들, 그리고 하오문의 전력까지 합치면 저들은 충분히 련주님을 위협할 만한 전력을 갖춘 게 됩니다.”

“…….”

“제가 경계하는 건 군사가 아닙니다. 바로 천면수사입니다. 만일 이 모든 일의 뒤에 그가 있다면…….”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겉으로야 장일소에게 대적하기 쉽지 않아 보이는 정도일지 모르나, 중요한 건 그 전력을 움직이는 게 천면수사와 호가명이란 점이었다.

그들은 확신이 없다면 결코 쉽사리 움직이지 않을 터.

최악의 경우엔…… 이미 돌이키기 힘든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한시라도 빠르게…….

“흠.”

하지만 장일소는 여전히 묘한 미소를 띤 채 태평하게 잔에 든 술만 바라보았다.

한 점 흔들림 없이 고요한 술을 내려다보다 그가 물었다.

“가명이가 천면수사와 거래를 한다?”

“…….”

“그리고 나를 노린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라도…….”

“그럼 별수 있겠니? 죽어야지.”

순간 당황한 적호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을 부릅뜬 그가 되물었다.

“려, 련주님?”

“왜?”

“아, 아니……. 어찌 그런 말씀을…….”

“어린애처럼 굴지 말거라.”

장일소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마치 적을 앞에 둔 것 같은 귀기 어린 미소였지만, 목소리는 담담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니 죽어도 할 말이 없지 않으냐?”

“……군사를 그렇게까지 믿으십니까?”

“아니.”

장일소는 재미없다는 듯 말했다.

“그게 너라도 마찬가지란다. 내가 맡긴 일이고 내가 준 권한이다. 그 권한이 나를 노린다면 목을 내주는 수밖에.”

“그 권한을…….”

“그건 안 될 말이란다. 나는 신이 아니야. 내가 모든 것을 틀어잡고 있으면 나는 여기까지가 전부인 사람으로 끝날 뿐이지.”

혈색이 돌며 빨개진 입술이 벌어지고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나아가다 등에 칼을 맞아 죽는 게, 앉아서 썩어 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으냐. 그렇지?”

“…….”

“이제 물러가거라.”

적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면, 적어도 저를 광동으로 보내 주십시오. 제 눈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안 된다.”

“어찌…….”

“너라면 보나 마나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다 싶으면, 가명이를 포박해 잡아 오려 할 것 아니냐? 가명이가 뭘 하고 있더라도.”

“…….”

“가명이가 그렇게 움직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게 해가 될 일도 아니겠지.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두거라.”

말을 마친 장일소가 느리게 술을 들이켰다.

적호의 얼굴이 멍했다.

진정으로 장일소에게 충성을 바치는 적호조차도 때로는 이런 장일소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물러가겠습니다.”

적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 장일소를 두고 천천히 욕실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흘끗 본 장일소가 고개를 돌려 시비에게 웃어 주더니 물었다.

“혹시 다른 술이 준비된 게 있더냐?”

“지, 지금 당장 내오겠습니다, 련주님!”

“저런, 저런. 뛰지 말거라. 욕실이 미끄럽잖니. 그러다 다친단다.”

달려 나가는 어린 시비를 보며 작게 웃은 장일소가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응시했다.

수증기 서리며 물이 맺혀 있었다.

이를 빤히 보던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가명아…….”

호가명이 모반을 꾀한다? 이건 애초에 의심은 고사하고 고려조차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설사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상관없다.

죽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호가명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단 건 확실해 보인다.

그것도 장일소에게 보고하지 않고, 심지어는 장일소가 먼저 내린 명령까지 무시하면서.

호가명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 대체 무엇일까?

“직위도 아니고, 목숨까지 걸어서야 되겠니?”

장일소는 무심코 손가락 끝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입술을 가로로 느리게 훑은 그가 중얼거렸다.

“……거기에 무언가 있구나? 그렇지?”

그리고 그건 아마 장일소에게 더없이 위험하고도 매혹적일 것이다.

호가명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없애고 싶어 하니까.

장일소의 뇌리에 하나의 단어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건 결코 그곳에 있을 수가 없다.

생각에 잠겨 있던 장일소가 피식 웃었다.

이미 벌어질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있어선 안 될 것이 거기 있음이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흐음.”

그의 두 눈이 일렁였다.

“확인 정도는 해 봐야겠군.”

입꼬리가 요사스레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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