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3화. 대체 놈은 뭐지? (3)
저벅. 저벅. 저벅.
전신을 흑의로 감싼 사내가 새하얀 대리석 길을 범처럼 걸었다.
표정은 싸늘했고, 발걸음엔 노기가 뒤섞여 있었다.
“머, 멈추십시오!”
“더는 지나가실 수 없습니다!”
그가 막 긴 계단 앞에 도달한 순간, 위사들이 들고 있던 창을 교차하며 앞을 막아섰다.
누군가가 이 광경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분명 이상함을 느낄 터였다.
지금 이 위사들이 지키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사패련의 련주 패군 장일소의 처소다.
집을 지키는 개에 불과할지라도, 그 지키는 집이 어디인가에 따라 그 격이 달라지곤 한다.
장일소의 처소를 지키는 위사라면, 사패련에 소속된 누구라 해도 감히 함부로 굴 수 없다.
하지만 흑의인을 상대하는 이들의 얼굴에는 명백한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감히 막을 수 없는 이를 막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비켜라.”
“려, 련주께서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명을…….”
흑의인은 그저 말없이 위사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위사가 움찔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비켜라.”
잠깐의 침묵 후, 위사들의 창이 천천히 거두어졌다.
련주의 명은 지엄하다.
하지만 지금 다가온 이는 그 지엄한 명을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게 했다.
그럴 만한 힘이 있는 이였다.
창이 치워지기 무섭게 사내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새하얀 대리석 계단을 빠르게 오른 그는 전각의 정문을 곧장 주저 없이 열어젖혔다.
끼이이익!
문이 거칠게 열리고, 사내는 전각 안을 짧게 훑었다.
그러더니 안쪽을 향해 거침없이 발을 내디뎠다.
“이, 이곳에는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당장 나가십시오!”
시비들이 기겁하며 달려와 그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흑의인은 귀찮다는 듯이 시비들을 밀치고 성큼성큼 더 깊은 안쪽으로 향했다.
“련주께서는 어디 계시냐?”
“이, 이러시면…….”
“어디 계시냐 물었다!”
흑의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시비들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일제히 한쪽에 흘끗 가 닿았다.
흑의인은 알겠다는 듯 그들이 바라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안 됩니다!”
몇 되지 않는 시비들이 필사적으로 그의 앞을…….
아니, 정확하게는 그가 향하고 있는 문 앞을 몸으로 틀어막았다.
“이곳만은 안 됩니다! 련주께서 진노하실 겁니다!”
“비켜라.”
“절대 안 됩니다!”
“그래?”
우득.
그 순간 흑의인이 주먹을 살짝 움켜쥐었다.
당장이라도 시비들을 때려죽인 뒤 안으로 밀고 들어갈 기세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시비들의 뒤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들 이렇게 호들갑이니?”
“려, 련주님!”
시비들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꽉 닫힌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사내가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패군 장일소.
그가 열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처럼 여유롭고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지만 그 외의 모습은 사패련도들이 익히 봐 왔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늘 깔끔하게 빗어 넘기고 틀어 올렸던 머리는 풀어 헤쳐진 채 흘러내려 있었고, 상반신은 의복 없이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크고 작은 흉터로 뒤덮여 얼핏 보면 몸 전체에 문신을 새긴 것처럼 보이는 맨살이 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장일소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뜨거운 땀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달아오른 몸의 열기를 버티지 못한 모양으로 흘러내린 땀은 증기가 되어 몸을 타고 올랐다.
“모, 몸을 닦을 천을 가져와라! 어서!”
“예!”
당황한 시비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일이 거의 없으니 더 당혹할 만했다.
하지만 흑의인은 그런 장일소를 보고도 당황한 기색 없이 절제된 동작으로 무릎을 꿇었다.
“방주를 뵙습니다.”
장일소는 무심한 손짓으로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때, 달려갔던 시비들이 다급하게 돌아와 가지고 온 새하얀 천을 양손으로 받쳐 들어 내밀었다.
“려, 련주님. 여, 여기…….”
새파랗게 질린 시비의 얼굴을 흘끗 내려다본 장일소가 눈을 휘며 웃었다.
“왜 떠느냐?”
“저, 저희는…….”
“떨 것 없다. 너희 잘못이 아니잖니.”
장일소의 시선이 부복한 사내에게로 향했다.
“잘못이 있다면, 너희의 말을 무시하고 이곳에 몸을 들인 이에게 있겠지. 그렇지 않니?”
노골적이고 명백한 질책에도 사내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자, 이제 말해 보렴.”
장일소가 지그시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흑의인은 고개를 들어 장일소를 응시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무척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장일소는 수련하는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이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사람이 익혀서는 안 될, 천인공노할 사술을 익히고 있기 때문에?
아니면 그의 무학에 숨겨야만 할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두 아니다.
수련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몰아붙이고, 내력을 소모한다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장일소쯤 되는 무인은 그 정도가 더없이 격할 수밖에 없다.
그건 다시 말해, 수련하는 동안은 평소보다 공격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약해진 동안 누군가가 접근한다는 것을, 장일소가 용인할 리 없었다.
그러니 흑의인이 이 자리에서 제대로 된 대답을 내어놓지 못한다면 장일소는 반드시 이 대가를 물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흑의인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장일소를 주시하다 침착하게 입을 뗐다.
“방주. 아니, 련주.”
“…….”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보고?”
장일소가 눈을 반개하며 되뇌었다.
“흐음. 보고라…….”
화장기가 없어 살짝 푸른빛을 띤 입술이 섬뜩하게 말려 올라갔다.
“중요한 보고겠지? 내 상한 기분을 되돌려 줄 수 있을 만큼?”
장일소의 두 눈이 일렁였다.
위험한 신호였다.
하지만 살심으로 뒤덮였던 그 두 눈은, 흑의인이 말이 이어지자 빠르게 냉정함을 되찾았다.
“해남으로 간 군사의 동태가 이상합니다.”
“…….”
“제 판단으로는 시급을 다투는 일이었습니다.”
“흐음.”
잠시 침묵하던 장일소가 손에 쥔 천을 시비에게 건넸다.
그러더니 고민스럽다는 듯 흑의인을 바라보다 짧게 혀를 찼다.
그는 몸을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따라와.”
“예.”
저벅. 저벅. 저벅.
장일소가 휘적휘적 걸어 전각의 한쪽으로 향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시비들이 재빠르게 그의 걸음에 맞추어 문을 열어젖혔다.
뜨거운 증기로 가득 찬, 크고 화려한 욕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일소는 욕실 한가운데 자리한 탕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상체까지 물에 담근 그는 탕의 벽에 등을 기대고는 느른하게 고개를 젖혔다.
딱히 대단한 동작이 아님에도 더없이 오만해 보였다.
풀어 헤친 길고 검은 머리칼이 수면 위로 이리저리 흐드러졌다.
장일소가 입을 열었다.
“적호.”
“예, 련주.”
“하던 말을 계속 해야지. 그래, 가명이가 이상하다고 했던가?”
“정확하게는…….”
적호라 불린 이가 마른침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이상하다기보다, 수상합니다.”
“……수상하다?”
“예, 련주.”
뜨거운 온수에선 연신 김이 올라와 장일소의 얼굴을 부옇게 가렸다.
하지만 적호는 지금 장일소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지 않더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너희가 가명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건 알고 있단다. 하지만 이건 조금 너절하잖니. 누군가를 짓밟을 때도 최소한의 격조는 필요한 법인데.”
“모함이 아닙니다, 련주.”
“음?”
장일소는 조금 더 구체적인 답을 내놓으라는 듯 적호를 빤히 보았다.
“해남에 도착한 이후, 하루에 한 번 본단으로 오던 보고가 끊겼습니다.”
그 말에 장일소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지금 적호가 말하는 보고는 호가명이 본단으로 보내는 정기 보고를 의미한다.
장일소야 호가명을 신뢰하니 굳이 보고 같은 걸 받을 필요 없다고 여겼지만, 호가명은 그럼에도 융통성이 없어 보일 만큼 원칙을 철저히 지켜 왔다.
설사 제가 올린 보고를 장일소가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끊겼다……. 끊겼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단 의미인가?”
적호가 제 품 안에서 또 하나의 보고서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게 오늘 도착한 보고입니다.”
적호가 보고서를 펼쳐 들어 장일소에게 보여 주었다.
장일소가 이를 잠시 보았다.
그의 눈꼬리가 살짝 꿈틀댔다.
“해남과 전투가…… 생각보다 길어진다?”
“그렇습니다.”
그 밑으로는 몇 가지 사유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장일소의 눈에 그 사유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중요한 건, 호가명의 능력과 그가 끌고 간 병력을 감안했을 때 해남과의 전투가 길어질 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누군가가 개입하지 않는 이상, 해남은 절대 호가명을 당해 낼 수 없다.
그러니 이 보고는 거짓이거나, 무언가가 누락된 보고라는 의미다.
“흐음.”
장일소의 눈이 조금 더 가늘어졌다.
“보고서는 누가 뜯어 보았지?”
“저입니다.”
장일소가 재밌다는 듯 적호를 바라보았다.
만인방의 출정 병력이 보내는 보고서는 방 그 자체에 보내는 것이라, 일정한 지위가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보고를 보낸 게 호가명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원칙이 그러하다고는 하나, 누가 감히 호가명이 보낸 보고서를 함부로 열어 볼 수 있겠는가?
장일소는 긴급으로 온 보고가 아니면 굳이 살피려 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이들은 감히 호가명의 보고서를 열어 볼 수 없으니, 저 보고는 원래라면 빛을 볼 일이 없었다.
폐관에 들었던 적호가 예정보다 일찍 수련을 마치고 본단에 오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찰랑.
장일소의 손가락이 수면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니까…… 저 아래에서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련주께 보고를 드리기에는 확실치 않은 사안이라, 개인적으로 몇 가지 더 추가로 조사해 보았습니다.”
말을 마친 적호가 말없이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장일소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계속하라는 뜻이었다.
“조사해 보기로는, 남쪽에 있는 중소 문파들에게 군사의 이름으로 동원령이 떨어진 모양입니다.”
“……동원령?”
“예. 그리고…… 이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적호의 얼굴에 살짝 긴장한 기색이 스쳤다.
“하오문이 움직인 정황이 있습니다.”
앞선 보고와는 무게감이 다른 소식이었다.
장일소가 느리게 중얼거렸다.
“중소 문파 같은 너절한 것들이야 그렇다 치고……. 하오문이라…….”
이 모든 정보를 종합하면 결론은 명확하다.
“가명이가…….”
찰방.
무언가를 헤아리는 듯 그는 손가락 끝으로 연신 수면을 두드렸다.
“가명이가 나를 속이고 있다…….”
장일소의 기다란 눈매가 초승달과 같은 호선을 그려 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 그리고 부드럽게 휘어진 눈.
공존하기 어려운 두 가지가 함께하며 순간적으로 섬뜩한 기운을 풍겼다.
“이 말인가?”
느릿하고 부드러운 말투.
하지만 그 안에 실린 압도적인 무게가 욕실 안의 공기를 으스러뜨리기라도 할 듯 짓누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