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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02화 (1,303/1,567)

1302화. 대체 놈은 뭐지? (2)

파아아앗!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호가명의 눈이 무심했다.

조금 전부터 날아드는 전서구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가깝군.’

천우맹, 해남과 충돌하는 이들의 수가 줄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적과 마주하고 상황을 보고하는 전서구를 보내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

소식을 전할 전서구가 미처 날아오르기도 전에 그들이 그 지역을 돌파하고 있다는 의미다.

저들은 지척에 있다.

‘생각보단 멀리 가지 못했군.’

호가명의 입가가 미미하게 뒤틀렸다.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어리석다고 해야 할까?

해남을 벗어나 본 적도 없는 애송이들을 데리고 이만한 속도로 포위망을 돌파하는 건 확실히 대단하다.

‘그게 단순히 강하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걸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지.’

무력이 강한 것과 통솔하는 건 전혀 다른 영역이다.

특히 호가명의 입장에선 이 부분에 대한 평가가 더 와닿을 수밖에 없다.

호가명이야말로 무력이 아닌 통솔력과 지략으로 지금의 위치에 올랐으니까.

손을 맞춰 본 적도 없는 수백의 인원을 이끄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화산은 본인들도 그런 경험이 일천할 것이 분명함에도 무리 없이 해 내고 있다.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호가명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이제는 화산이, 저 청명이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 있었다.

굳이 상대를 지레짐작하고 재단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발 빠르게 맞춰 나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결과로, 지금 그들은 마침내 저 화산을 사정권에 두고 있으니까.

“서둘러라!”

“예!”

추격에 박차를 가할 때였다.

호가명이,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이 쓰러진 사파인들의 시신을 무심하게 뛰어넘었다.

“끔찍하군.”

“이제 와서?”

“시신을 말하는 게 아니다.”

괴량이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보이지 않나? 일격에 정확하게 급소를 베여 죽은 게.”

“……난잡해 보이는데?”

“그렇겠지. 일 검으로 죽여 놓고 굳이 칼질을 몇 번 더 해서 힘줄까지 끊어 버렸으니까.”

생각지 못한 대답에 호가명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화산검협인가? 그답지 않은 일이군. 쓸데없이 잔인한 이는 아닐 텐데.”

“혼자였다면 급소를 베고 그냥 지나갔겠지. 이건 뒤따르는 이들을 위한 거다. 앞에서 확실하게 처리했다고 믿은 놈이 혹여나 몸을 일으켜 검을 휘두른다면 손도 써보지 못하고 뒈질 테니까.”

“…….”

“대체 어디서 이런 걸 겪어 본 걸까? 배운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지. 검을 쓰는 것만 보자면 수십 년은 전장에서 굴러먹은 놈 같군. 아니, 그 이상이다. 평생을 전장에서 산 낭인들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는데.”

괴량이 흥미롭다는 듯 말하며 이를 드러냈다.

“지옥이 있어서 평생 싸우기만 한 놈이 있다면, 이런 검을 쓰겠지. 대단해. 정파에서 이런 검귀가 나오다니.”

“쓸데없는 말은 적당히 해라.”

“쿡쿡쿡.”

나직이 웃은 괴량이 살짝 눈에 이채를 띠며 말했다.

“하지만…….”

괴량의 눈은 사파인들 중간중간 뒤섞여 있는 해남 제자들의 시신을 놓치지 않았다.

바다의 빛깔을 담은 그들의 무복은 피에 젖어 있어도 확연히 눈에 띄었다.

“피해도 확실하군.”

“물론.”

“그래 봐야 하찮은 놈들이라 별 의미야 없겠지만.”

콰득!

괴량은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해남파 제자의 시신을 짓밟았다.

시신의 머리가 부서지고 터지며, 진득하게 굳어 가던 피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으…….”

뒤따르던 이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괴량은 재밌다는 듯 쿡쿡 웃으며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왜? 이제 와 안타깝기라도 한가?”

“…….”

“문파를 배신한 몸이지만, 아직 정은 남아 있다는 건가? 웃기는군. 저들의 입장에서 정말로 죽이고 싶은 이는 우리가 아니라 바로 너일 텐데 말이야.”

유공은 입술을 꽉 짓깨문 채 침묵했다.

차마 항변 한번 할 수 없는 건, 이자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곧 네 사형제들을 만나게 해 줄 테니까. 감격의 해후가 되겠군.”

유공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여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말이 단순한 협박으로 들리지 않았다.

이대로 간다면, 그는 정말로 곧 사형제들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었다.

그럼 그들은 유공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

무공을 폐하지 않고 하산해 제 삶을 꾸려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음에도, 그 무공으로 자신의 뒤를 쫓는 이를.

해남을 몰살시키러 온 사패련에 붙어 사냥개가 되어 버린 자신을.

자신이 없다. 죽으면 죽었지, 해남과 마주할 자신이 없다.

어떤 비난이나 굴욕도 감수할 수 있지만, 자신을 바라볼 해남 제자들의 눈빛만큼은 차마 감당할 수가 없다.

“아니.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 순간 들려온 괴량의 말에 유공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혹여 벌써 이들이 해남을 따라잡은 건가?

아니. 아니다.

우려했던 대로 해남의 제자들을 맞닥뜨린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끔찍했다.

“어…….”

유공의 입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살아 있군.”

피에 젖은 초원, 시체더미 속에서 한 사람이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죽은 피가 검게 말라붙은 의복은 원래 어떤 색이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공은 알 수 있었다. 저 의복의 형태와 뒷모습이, 너무도 익숙했으니까.

그가 잘 알던 이의 모습이 저 처참한 뒷모습에 겹쳐졌다.

“아아…….”

적에게 일격을 당해 정신을 잃었다가 운 좋게 죽지 않아서 뒤늦게 깨어난 모양이었다.

동료들이야 적과 싸우며 나아가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절명에 가까운 상처를 입은 이를 살필 수 없었을 테니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을 테고.

사내는 뒤쪽에서 달려오는 이들의 기척을 느꼈는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동공이 텅 빈 듯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닌 것처럼, 탁한 눈동자가 멍하니 그들을 응시했다.

“종 사제에에에!”

유공의 입에서 비명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가슴에 불길이 치솟는 것 같다.

살아 있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봤던 시신이 아니다.

금방이라도 피를 토하고 쓰러져 숨을 거둘 것 같은 몰골이기는 하지만, 그의 사제 종효는 분명 살아 있다.

“괘, 괜찮…….”

“운이 없는 놈이군.”

스르르릉.

하지만 그 순간, 괴량이 검을 뽑아 드는 소리가 유공의 귓가에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자, 잠깐!”

쇄애애액.

검을 뽑아 든 괴량은 그대로 쇄도해 종효의 목을 쳐 날렸다.

서걱!

잘려 나간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어…….”

유공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다래졌다.

그의 손은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채 허공만을 부질없이 휘저었다.

그 순간 종효의 눈과 유공의 눈이 허공에서 서로 마주쳤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종효의 눈과,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실린 유공의 눈이.

적과 맞서 싸우다가 죽어 간 영웅의 눈과, 목숨이 아쉬워 원수의 개가 된 비겁자의 눈이 그렇게 마주쳤다.

탁하지만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빛이, 종효의 눈동자에서 급격히 꺼져 버리는 광경을 그는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으…….”

유공의 손이 덜덜 떨렸다.

봤을까? 그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 날 알아보았을까?

그랬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종효는 무엇을 느꼈을까?

반가움? 아니면 역겨움? 희망? 아니면 분노?

알 수 없다.

말해 줄 수 있는 이는 이미 죽었으니까.

잘린 머리가 이미 더러운 진창을 구르고 있으니까.

“우욱!”

순간 구역질이 치밀었다.

“우웨에에에엑!”

유공은 배를 움켜잡고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가 토해 낼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올라오는 것은 그저 쓴물뿐.

하지만 구역질은 멈추질 않았다.

배 속에 든 것이 아닌, 그 안에 달라붙은 역겨운 무언가를 어떻게든 밀어 내겠다는 듯이.

“우, 우욱…….”

그 순간 뒤에서 달려온 이가 몸을 구부린 유공을 걷어찼다.

콰앙!

튕겨 나간 유공이 땅에 나뒹굴었다.

적의 피, 사형제들의 피로 흠뻑 젖은 땅 위로 정신없이 굴렀다.

“계속 달려.”

“…….”

“아니면? 여기서 죽여 줄까?”

유공은 덜덜 떨리는 다리를 움켜잡고 애써 몸을 일으켰다.

죽을 수 없다. 죽어서는 안 된다.

여기까지 와서 죽어 버린다면 유공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적의 발을 핥다가 목숨까지 잃은 천하의 등신 새끼가 될 뿐이다.

다 잃었다면, 어느 것 하나 남길 수 없다면 적어도 그 구차한 목숨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휘청이며 일어선 유공은 다시 달려 나갔다.

눈물 따위는 흐르지 않았다.

고인 것이라고는 그저 더 강해진 독기뿐.

괴량이 마음에 든다는 듯 피식 웃었다.

‘사람을 정말 지독하게 만드는 건 악의가 아니라 죄악감이지.’

변절자들이 더 잔인하고 거칠어지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찢긴 입술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달리는 유공에게 호가명이 나직이 말을 건넸다.

“이해한 모양이로군.”

“…….”

“이제 와 네가 정상적으로 살아갈 방법은 하나뿐이다.”

유공이 고개를 돌려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호가명이 서늘하게 말했다.

“네가 변절했다는 사실을 알 이들이 모두 죽는 것.”

유공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두 눈에 순간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양심이라는 건 적당히 데워진 물 같은 것에 불과하지. 처음 손을 담글 때는 뜨거워 당장이라도 손을 빼고 싶지만, 그 고통을 조금만 참아 내면 곧 아무렇지도 않아진다. 손이 아니라 그 몸 전체를 담근다 해도 말이야.”

유공이 대꾸하지 않자 호가명은 그를 슬쩍 일별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유공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달렸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협의니, 정의니 입바른 말을 해 대는 것은 쉽다.

하지만 제 목숨과 가족의 목숨을 죄 내어 놓고 그 협의를 관철할 이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그는 잘못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틀린 게 아니다.

아니, 설사 틀렸다고 해도 상관없다.

누구든 옳은 선택만 하고 살 순 없다.

그저 이번 한 번 더 틀린 것뿐이다.

그러니 그저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면 된다.

그럼 살 수 있다. 그럼 살릴 수 있다.

‘얼마든지 욕하고 원망해라!’

유공의 두 눈에 새파란 독기가 차올랐다.

여기까지 와 버린 이상 돌아갈 길 따위는 없다.

처음 그가 무엇을 생각했든 중요하지 않다.

남은 건 이 빠져나갈 수 없는 급류 속에서 살아남는 것뿐.

그래. 오직 그것뿐이다.

그것만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아무리 다짐하고 마음을 다잡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멍하니 흐려져 있던 종효의 눈, 그 빛이 꺼져 가던 눈이…….

눈을 감아도, 귀를 막아도, 아무리 비명을 질러 대도, 뇌리에 새겨져 지워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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