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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01화 (1,302/1,567)

1301화. 대체 놈은 뭐지? (1)

적막했다.

아니, 사실 적막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부상을 입고 중독된 이들이 신음하고 비명 지르는 소리가 연신 퍼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적막했다.

부상자를 치료하는 이도, 돕는 이도, 그리고 다시 이동하기 위해 준비하는 이들조차 딱히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실감해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적과 싸웠다.

필사적으로 앞을 막아서는 적들을 어떻게든 뚫어 내고, 맥이 뛰고 있는 목에 검을 박아 넣으며 싸우고 또 싸웠다.

더없이 힘겹고 두려웠지만, 그땐 적어도 적들 역시 그들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희망을 볼 수 있었다.

그 필사적인 전투가 지금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조금 전, 그들의 앞을 막아선 난적이 처음으로 순순히 길을 터 주었다.

언제든지 다시 노릴 수 있다는 것처럼.

굳이 필사적으로 앞을 가로막지 않아도 빠져나갈 길 따윈 없으니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말하는 듯이.

그게 이곳의 모두에게 현실을 깨닫게 했다.

곽환소는 중독되어 몸을 덜덜 떠는 사형제의 아랫배에 기운을 밀어 넣었다.

필사적으로 부상자를 도우면서도, 그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분주했다.

‘살아날 수 있을까?’

정말 이 길 끝에, 광명이 존재할까?

어쩌면……. 어쩌면 이미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는 늪에 발을 들인 건 아닐까?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더욱 깊이 빠져드는 늪에…….

곽환소는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거냐?’

어차피 살아 돌아갈 가능성 따위는 거의 없음을 알고 왔다.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해남의 이름을 쓰는 이들이 무기력하게 적에게 당하지만은 않았노라고 세상에 알리기 위해.

뻔히 알고 있던 사실을 재차 확인했단 이유로 새삼 풀이 죽을 필요는 없다.

“사형.”

어느새 다가온 이자양이 말을 걸어왔다. 곽환소가 물었다.

“……상황은 어떠냐?”

“당가 분들이 계셔서 중독은 어떻게든 처치할 수 있습니다. 저희만 있었다면 손쓸 도리가 없었겠지만요.”

“……다행이구나.”

곽환소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당가가 없었다면…….’

해남에서 사패련에 항전하고자 했던 게 얼마나 무모하고 안일한 생각이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만약 그들이 해남도에서 결사항전을 했다면 지형의 이점을 이용한다 해도 결국엔 일방적으로 휩쓸리기만 했을 것이다.

당장 적의 독을 해독할 방법조차 없는데, 뭘 어쩌겠는가?

내력이 강한 이는 독을 몰아낼 수 있다.

강호에서는 상식과도 같은 일이다.

하지만 그건 몸이 완전한 상태에서 온전히 독에만 집중하여 운공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질 때의 이야기다.

그게 가능한 이가 해남에 몇이나 되겠는가?

독에 대해 논할 때마다, 실력을 키우면 중독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절댔던 과거의 제 혀를 뽑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뭘 안다고 그리 쉽게 지껄였단 말인가?

“하지만…… 독은 해독할 수 있지만, 상처는…….”

“그렇겠지…….”

호흡으로 중독된 게 아니라, 독을 바른 무기에 찔린 거니까.

설령 독이 발리지 않았다고 해도 치명적이다.

그만한 상처를 단기간에 회복하는 건 불가능하다.

“죽은 이는?”

“……넷 정도입니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무심하게 답했던 곽환소가 순간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다행이라고?’

넷이나 죽었다.

적어도 십 년 이상 얼굴을 맞댄 이들이 넷이나 죽었다.

그런데도 태연하게 다행이라고 말했다.

지독한 혐오감이 밀려들었다.

그 넷이 누구인지 정확히 확인하지도 않은 채, 사람의 죽음을 단순히 숫자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말이다.

“움직입시다.”

그때 들려온 말에, 곽환소가 핏발 선 눈으로 획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말을 곱게 들을 여유가 없었다.

또 어차피 전장은 이런 것이라는 입바른 소리나…….

하지만 순간 곽환소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남궁도위. 그가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더 시간을 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더 많은 이들을 잃게 될 겁니다.”

곽환소도 들은 적이 있다.

남궁세가가 매화도에서 절반이 넘는 전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지옥과도 같은 매화도에서 화산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곳에서 남궁도위는 가족을 잃었고, 심지어는 아버지조차 잃었다.

지금 처한 현실보다도 훨씬 더 지독한 상황을 이미 겪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달아나기는커녕 제 발로 이 지옥에 다시 걸어 들어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었는데, 여기까지 겪고 나니 곽환소도 알 수 있었다.

남궁도위가 지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남궁 소가주님.”

“예.”

“……당신은 괜찮으십니까?”

다소 뜬금없게 들릴 만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남궁도위는 곽환소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충분히 안다는 듯 담담한 시선을 보내더니 답했다.

“괜찮을 리가 없죠.”

“…….”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남궁도위의 눈빛은 차분했다.

“남궁과 해남으로 끝이 아닙니다. 사패련을 어쩌지 못한다면, 결국엔 천하의 모두가 이 같은 일을 겪게 될 겁니다.”

“하지만…….”

“눈을 돌리고 달아난다 해서 해결되는 문제라면 당연히 그리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죠. 외면하지 않고 맞서는 겁니다.”

곽환소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의 눈빛을 본 남궁도위는 살짝 겸연쩍은 듯 말했다.

“물론, 뭐…… 잘난 듯이 말하지만, 저도 스스로 안 것은 아닙니다. 그저 보고 배운 것이지요.”

남궁도위가 청명과 백천 쪽을 바라보았다.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대화하는 모양인지 분위기가 사뭇 심각해 보였다.

잠시 그쪽을 보던 남궁도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어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가장 나은 방향인지.”

“…….”

“하지만 적어도 그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저 따를 수밖에요. 언젠가는 저도 저들이 보고 있는 것을 함께 볼 날이 오리라 믿고.”

잠시 말을 멈춘 그는 길게 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저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서 있다는 말이었다.

“……이해가 안 가네요.”

“당연히 그럴 겁니다. 말을 하고 있는 저도 이해가 잘 안 가니까요.”

남궁도위가 작게 웃으며 곽환소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한 가지 아는 것은, 적어도 누군가를 이끄는 자리에 선 이는 그런 표정을 지어선 안 된다는 겁니다.”

“…….”

“힘이 들어도, 마음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도,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만큼은 늘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들도 덩달아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요.”

곽환소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는 말이다.

이곳에 많은 이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을 테니.

“가시죠.”

“예.”

곽환소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장 제자들을 독려하는 금양백에게 합류해 돕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남궁도위는 문득 안쓰러운 마음에 고개를 저으며 백천과 청명에게로 향했다.

어려울 것이다.

잘난 듯이 말했지만, 남궁도위 역시 매화도에서 가솔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을 때는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 한탄하지 않았던가.

어제까지 웃으며 대화하던 이가 눈앞에서 비명에 죽어 가는 광경을 직면하는 건 적당히 버틸 만한 충격이 아니다.

시간이 간다고 씻은 듯 가시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무뎌져도 가슴에 흉으로 남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전쟁을 지속하다가는, 언젠가는 그 상처와 흉터로 뒤덮여 마음이라는 게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장문대리.”

백천이 남궁도위를 돌아보았다.

“거동이 어려운 이들이 꽤 많이 늘었습니다.”

그 말에, 백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도위가 물었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많은 게 담긴 물음이었다.

다른 이들 앞에선 차마 꺼낼 수 없지만, 백천과 남궁도위는 한 문파를 이끄는 자리에 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야만 한다.

“모두 이끌고 갑니다.”

“속도가 늦어질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모두 이끌고 갑니다.”

“……알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야 많다.

이 정도의 부상자들을 모두 이끌고 나아간다면, 추격해 오는 만인방 본대의 추격을 따돌리는 건 더욱 요원해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정말로 모두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궁도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모든 선택권은 백천에게 있다.

그리고 그 이전에, 백천이 이 모든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남궁도위는 그저, 한 가지 묻고 싶었다.

“장문대리.”

“예, 소가주님.”

“당신에게 있어서 해남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 질문에 백천이 남궁도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말없이 남궁도위를 응시하던 백천이 천천히 그 입을 열었다.

“다르지 않습니다.”

“…….”

“남궁과.”

잠깐 침묵하던 남궁도위가 피식 웃어 버렸다.

우문현답이었다.

지금까지는 백천에 대해, 모든 면에서 훌륭하나 도가의 문주답지 않게 도인다운 면은 부족하다 여겼다.

그런데 이것도 남궁도위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남궁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 생각해 보면 화산은 굳이 매화도까지 올 이유가 없는 문파였다.

하지만 남궁도위는 그들을 한 줄기 빛으로 여겨 그 앞에서 간절하게 무릎을 꿇었고, 화산은 그 남궁도위의 부탁에 주저 없이 목숨을 걸었다.

그런데 무슨 대답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들은 원래 이런 이들인데.

그때 남궁도위가 보았던 빛은 너무도 눈이 부셨다.

스스로 그리되고 싶다 바라게 되었을 만큼.

그러나 막상 그 빛 속에 들어와 보니 알겠다.

이들은 초와도 같았다.

자신을 스스로 태우며 빛을 뿜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눈이 부시다.

“계획은 무엇입니까?”

“처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백천이 단호하게 말했다.

“적의 움직임을 보아, 앞쪽에 다시 방어선이 구축되고 있다고 봐야겠죠.”

“녹림왕도 그리 말하더군요.”

“뚫고 갑니다.”

“…….”

“우회할 시간이 없습니다. 호가명이 이끄는 적의 본대가 이젠 지척까지 도달했을 겁니다. 게다가 우리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을 테니 달아날 방법 같은 건 없습니다.”

“장문대리. 장문대리의 의견에 맞서고자 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지금까지와 다를 게 없잖습니까?”

“달라져.”

그 대답을 한 건 백천이 아닌 청명이었다.

남궁도위가 의아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은 가타부타 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다시 확고하게 말했다.

“달라진다.”

잠시 그를 빤히 보던 남궁도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이 그리 말한다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남궁도위는 저 사람을, 화산검협 청명을 굳게 믿었다.

남궁도위가 제 가슴팍을 가볍게 두드려 보였다.

“그렇다면, 저도 목숨을 걸죠. 반드시 뚫어 내겠습니다.”

남궁도위의 환한 미소를 본 청명이 피식 웃었다.

“애송이가.”

아주 간만에, 작은 웃음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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