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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300화 (1,301/1,567)

1300화. 이 땅에 쉴 곳이 있을까? (5)



'애송이 놈들이.'



중앙에 선 혈의인, 흑심판관(黑心判官) 상관응(上官應)의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싸움은 기세가 반이다. 그리고 한번 꺾인 기세는 웬만해서는 되살릴 수 없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그 흔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완벽하게 꺾어 놓았던 놈들의 기세가 순식간에 되살아나고 있었다.



고작 몇 번의 공격과 몇 마디 말로 말이다.



해남 따위야 기세가 살든 말든 언제든 짓밟아 버릴 수 있지만……



'껄끄럽군.'



그의 시선이 해남의 앞을 지키듯 막고 선 이들에게로 향했다.



남궁세가의 남궁도위, 사천당가의 당패, 그리고 녹림왕 임소병.



누구 하나 만만히 볼 수 없다. 저 뒤쪽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소림의 혜연까지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남궁의 검과 사천당가의 암기라……'



대체로 한 문파의 사람들은 아무리 그 결이 다르다고 해도, 전체적으로 본다면 결국 비슷한 성향을 띠기 마련이다. 같은 무학을 익히고, 같은 삶을 사니까. 그렇기에 상대하는 방법도 결국 대동소이할 수밖에 없다.



화산의 제자들은 각기 다르지만, 그들의 발을 묶는 방법은 비슷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의 이들은 아니다. 성격부터 무학까지 비슷한 점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다. 상식대로라면 지금처럼 한 일행으로 엮여 움직이는 게 불가능한 자들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런 이들이 한곳에 모여 버리니 상대하는 입장에선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다. 화산이라는 두꺼운 갑옷을 벗겨 낸다고 해도, 이들을 마저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해남이라는 연약한 살을 물어뜯을 수가 없다.



남궁도위가 깊게 숨을 내쉰다.



"후우."



당패와 임소병이 좌우를 지켜 주자 남궁도위도 부담이 줄었는지 한결 표정이 가벼워졌다. 혼자라면 어렵겠지만, 좌우를 당패와 임소병이 지켜 준다면 그도 제 실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을 터.



심호흡해 마음을 다스린 그가 검을 들어 혈의인들을 겨눴다.



이들은 승냥이 떼와도 같다. 한번 피 냄새를 맡은 이상 쉽사리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남은 길은, 어느 한쪽이 전멸할 때까지 싸우는 것뿐.



우우우웅!



그가 내력을 밀어 넣자, 검이 막대한 검기를 뿜어냈다. 그 검을 막 떨치려는 순간이었다.



"멈춰라."



남궁도위의 움직임을 보자마자 달려들려던 혈의인들이 상관의 명에 일제히 멈춰 섰다.



"음?"



그 순간, 남궁도위는 저도 모르게 맥빠진 듯 헛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명을 내린 이를 바라보았지만, 복면으로 얼굴의 대부분을 덮고 있어서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굳이 무리할 이유는 없지. 물러서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혈의인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달려들 때보다도 더욱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뭐......'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남궁도위는 썰물처럼 물러나는 혈의인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기세를 살려 냈다고는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상황은 여전히 저들이 훨씬 유리했다. 그런데 왜 굳이 기껏 잡은 승기를 내려놓고 몸을 뺀단 말인가?



하지만 이는 상관에게 있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목표는 애초에 화산이 아니다. 잠시 허를 노려 발을 묶어 두었다고는 하지만, 다른 이들도 아니고 그 화산오검이다. 지금의 전력만으로 어찌해 볼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다. 지금이야 발이 묶여


있다지만, 곧 날뛰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목적은 처음부터 해남파였다.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이들에게 부상을 입히고, 중독시켜 발을 더디게 만드는 것. 뒤따라오는 본대가 수월하게 이들을 덮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리 흘러가 버리면 첫 목적을 달성하는 건 이미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이제 임무 수행을 포기하거나, 희생을 각오하고 어떻게든 명을 이행하거나 양자택일해야 했다.



'희생이라.'



굳이 그럴 이유가 있을까?



상관응이 복면 아래로 피식 웃었다.



“물러난다.”



혈의인들이 일제히 상관응의 뒤로 물러나 도열했다.



적에게 둘러싸여 있던 화산의 제자들도 당황했는지 물러난 이들을 멀뚱히 보았다.



모두가 얼이 빠졌다. 숱하게 전장을 횡행하면서도 겪어 보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흐음."



그런 모두의 심정을 대변해 주겠다는 듯 임소병이 입을 열었다.



“이제 와 엉덩이를 빼시겠다? 하지만 우리가 굳이 곱게 보내 드릴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그의 가시 돋은 말에 상관응이 조소하며 물었다.



"그래서? 막을 텐가?"



"흠."



명백한 도발이었다. 임소병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응시하자 상관응은 다시 여유롭게 물었다.



"너희에게 그럴 여유가 있을까?"



상관응이 쓰러져 있는 부상자들을 눈짓으로 슬쩍 가리켰다. 세검에 찔린 부위를 시작으로, 독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 처치가 필요했다.



임소병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더구나 시간을 끌면 끌수록 적의 본대는 가까워질 것이다.



임소병이 언짢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뭐…… 확실히,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 적을 뒤쫓을 만한 여력까진 없지."



"그럼 됐군."



"하지만."



임소병이 살짝 이를 갈며 싸늘하게 말했다.



"보나 마나 등 뒤에 붙어서 사람을 귀찮게 해 댈 놈들을 그대로 보내 주는 것도 영 성미에는 맞지 않는데?"



“하루는 내어 주지."



"......"



“좋은 조건 같은데?"



임소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상황이 저놈의 의도대로 이끌려 가는 것 같아 위장이 뒤틀린다. 하지만 지금은 저 말을 거부할 여력이 없었다. 부상자들이 신음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임소병이 침묵하자 상관응이 그럼 됐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계획했던 타격의 반의반도 가하지 못했지만, 굳이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리할 필요는 없다.



“받아들인 걸로 알고 물러나지.”



"의외로군."



임소병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상관응에 대한 악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설마 하오문에 수하들을 위해 목을 내어 놓을 정도로 정 넘치는 놈이 있었을 줄이야."



그 말을 들은 상관응이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설마, 내가?"



순간 임소병의 눈이 가늘어졌다.



'재미있군.'



사패련은 완벽한 상명하복의 체제. 련주 장소의 명을 거부하는 일은 존재할 수 없다. 이건 사패련뿐만 아니라 모든 사파에게 절대적인 법칙이다.



통제가 어려운 이들인 만큼 단순하고 강력한 법칙으로 묶어 두어야 한다. 사파에게는 상명하복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저자는 굳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건 다시 말해, 이 명을 내린 이가 장일소가 아니라는 것.



'……하오문을 움직인 건 장일소가 아니라 호가명, 그럼 어쩌면 장일소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건가?'



하지만 어째서? 그 호가명이?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임소병은 일단 떠오른 의문을 잠시 미뤄 두었다. 지금이야 깊게 생각해도 의미가 없지만, 어쩌면 언젠가 이게 실마리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



"좋은 정보 감사하군."



“정보 따위는 준 적 없어."



“아아. 그렇지. 그렇지. 내가 착각했군.”



임소병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상관응은 그런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은 물러나지. 하지만...... 의미가 있을까 모르겠군. 우리는 다시 너희를 노릴 거다. 아니. 우리뿐만이 아니지. 더 많은 이들이 너희를 노릴 거다. 더 철저하고 잔혹하게.”



“상관없다. 잠시 쉴 수 있으면 그만이니까."



“쉰다…… 라."



상관응이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이 땅에 쉴 곳이 있을까?"



"......"



“지옥에 쉴 곳 따위가 있을 리 없지. 그렇지 않은가?"



상관응이 슬쩍 눈짓하자 뒤를 지키고 있던 이들이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다시 보지."



"얼마든지."



상관응은 임소병을 가만히 응시하다 수풀 속으로 뒷걸음질 쳐 사라졌다.



수풀로 들어선 상관응에게로 수하들이 다가섰다.



“대주."



"움직여!"



상관응은 무시하고 전력으로 그 자리를 이탈했다. 다가왔던 수하들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숲을 헤치며 신속하게 나아가는 상관응의 모습이 흡사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지 않은가? 그들은 쫓는 이들이지, 쫓기는 이들이 아니니까.



어쨌든 따라붙어야 하니 의문을 억누른 채 모두가 상관응의 뒤를 따라 달렸다. 한참을 이동한 끝에야 상관응의 발이 겨우 멈췄다.



"..….상황은?"



“피해는 거의 없습니다. 몇 놈이 당하긴 했지만, 예상 범위 안쪽입니다."



“예상 범위라…...”



그 예상도, 해남 놈들을 반수 정도는 중독시킨다는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를 전제로 두었던 거였다.



“그런데, 대주, 너무 쉽게 물러나신 것 아닙니까?"



“남의 싸움에 목숨을 걸어 줄 이유는 없다."



"그래 봐야 애송이들에 불과합니다. 잠시 기세를 몰려 봐야…...”



그 순간 상관응이 말을 하던 이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싸늘한 눈빛에 말하던 이가 파드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주제넘었습니다."



"...... 알면 됐다."



상관응이 불쾌한 기색으로 몸을 돌렸다.



"추혼향은?"



“…… 당연히 묻혔습니다."



“하루 뒤, 추적을 재개한다. 그때까지 휴식하도록."



“예.”



수하들에게서 멀어진 상관응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피해?'



물론 감수할 수 있다.



추격한다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맹수를 쫓는 사냥꾼은 언제나 맹수의 발톱에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 독기 오른 적을 추적하는 추혼대의 특성상, 희생은 항상 발생해 왔다. 하지만……



'그 희생이 무엇이냐에 따라 이야기가 다르다.'



상관응이 제 목을 주물렀다. 만일 그 이상 전투가 벌어졌다면?



'내 목이 떨어졌겠지.'



함께 추혼대에서 임무를 시작했던 모두가 지금은 죽고 없다. 이제껏 살아남은 건 오로지 상관응뿐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실력 때문만은 아니다. 죽을 자리를 어떻게든 피해 내는 생존본능 때문이다.



조금 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를 조여 오던 미약한 살기를 말이다. 은밀하지만, 더없이 흉험했다.



'화산검협.'



조금만 더 틈을 보였다면, 그를 둘러싸고 있던 수하들이 조금이라도 더 적어졌다면, 그 검이 상관응의 목에 틀어박혔을 것이다. 모든 이들이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고 있던 그 전장에서, 화산검협만은 수풀에 몸을 숨긴 독사처럼 그를 노리고 있었다.



‘하루라……’



상관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루까지는 필요 없었을진대.'



두 시진만 주었어도 임소병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하루를 제시했던 건, 그 자리에서 그가 받았던 심리적 압박이 대단했단 증거였다.



그게 아니면...… 그 짐승과 다시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거나.



상관응은 지나온 수풀 쪽을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누군가를 추격하기가 이토록 꺼려지는 건 처음이로군.'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봐야 달라질 건 없다. 이미 이곳으로 하오문의 또 다른 추격대들이 집결하고 있으니까.



'화산검협이 아니라 백 년 전의 매화검존이 돌아온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결국 저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묘비 하나 없는 무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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