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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99화 (1,300/1,567)

1299화. 이 땅에 쉴 곳이 있을까? (4)

"어……”

해남의 제자들은 앞으로 나선 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단악검(斷岳劍) 남궁도위.

한때는 이곳의 그 누구보다 드높은 명성을 떨쳤던 자. 훗날 정파를 이끌어 갈 신성으로 꼽히던 자. 그가 지금 그들을 지키고자 앞으로 나섰다.

“남궁.......”

남궁도위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좋지 않군.'

체력이 부족하다. 그만큼 단련했는데도 말이다.

하기야, 그가 화산과 함께 보낸 시간이라고 해 봐야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비약적인 성장을 보일 수 있을 만큼 무학이라는 길이 쉬울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궁도위는 앞으로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미 나는 겪어 봤으니까.'

감당할 수 없는 적과 싸우는 것을.

절망적이기까지 한 상황에서 저항하고 버티는 것을.

그렇기에 그는 나설 수 있다. 상대할 수 있다. 그리고 지켜 낼 수 있었다. 과거의 남궁세가처럼 어찌할 바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이들을 말이다.

만약 이번에도 지켜 내지 못하면, 그는 과거의 매화도에서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단 말이 된다. 그건 남궁도위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꾸우욱.

남궁도위는 애병의 손잡이를 손가락 마디가 희게 질리도록 움켜잡았다.

"쳐라!"

하지만 상대는 그런 남궁도위가 숨을 고를 틈을 주지 않을 생각인지, 잠깐 스쳤던 당황한 기색을 지우며 이내 빠르게 남궁도위를 향해 쇄도했다.

적의 수는 셋. 조걸이나 다른 화산의 제자들을 상대하던 수와 다르지 않다. 남궁도위의 눈빛이 어둑해졌다.

'높이 평가해 주는 건 고맙지만……'

우우우우우웅!

그의 검이 웅혼한 검명을 터트렸다.

남궁세가의 검은 대대로 명검. 특히나 남궁세가의 직계가 쓰는 것은 그 드높은 명성에 걸맞은 보검들이다. 하지만 남궁세가가 사치를 부리기 때문은 아니다.

버텨 낼 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검 따위는 남궁세가의 검학이 부여하는 내력을 버티지 못하고 단숨에 으스러진다. 잘 정련된 보검이 아니고서야 감당해낼 수 없는 것이다.

파아아앗!

세검을 치켜든 혈의인들이 먹이를 쫓아 강하하는 매처럼 남궁도위를 향해 날아들었다. 세 줄기의 붉은 혈선이 금방이라도 남궁도위를 꿰뚫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남궁도위의 눈이 정광을 토해 냈다.

'상대를!'

쿠우우웅!

그가 강력한 진각을 내리밟았다.

'잘못 골랐어!'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남궁도위는 단숨에 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백색으로 빛나던 검에서 어마어마한 검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마치 새하얀 무명천을 허공에 펼쳐 낸 듯했다.

어처구니없이 넓은 범위를 점한 검기는 달려들던 혈의인들의 전방을 온통 뒤덮었다.

"뭣......?"

혈의인들이 순간 눈을 부릅떴다. 무언가 대처를 하기도 전에 검기는 순식간에 그들을 뒤덮고 휩쓸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비명조차 없었다. 핏덩어리가 된 혈의인들은 쏜 화살처럼 튕겨 나가 나뒹굴었다. 실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순간 전투를 치르던 모두의 시선이 남궁도위에게 꽂힐 만큼.

남궁도위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검을 잡은 손은 급격한 내력의 소모를 이기지 못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바라봐 오는 이들의 눈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직 오연하게 선 그의 표정만을 볼 뿐.

“앞은 내가 막겠소!"

그는 의식적으로 어깨를 쫙 폈다. 대단한 기세에 혈의인들은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그때, 중앙에 선 혈의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남궁세가인가?'

상성이 좋지 않다.

이들이 사용하는 병기는 세검. 이들은 상대의 빈틈을 전문적으로 노릴 수 있도록 수련했다. 그러니 이들에게 있어, 실전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들은 잡아먹기 쉬운 먹잇감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대단한 검술을 갖춘 이들이라도 전장에서는 틈이 드러나기 마련이고, 그 틈에 날카로운 세검을 찔러 넣는 것만으로도 수월하게 적을 쓰러뜨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저 검술은 아니다.

저건 검술이라기보다는 화포와도 같다. 검을 잡은 육체에는 빈틈이 있을지 모르지만, 날아드는 검기에 무슨 틈이 있겠는가? 거리가 벌어지고 검기의 공방이 시작되어 버리는 순간, 남는 것은 얇디얇아 제대로 힘을 내기 힘든 세검뿐이다.

극상성. 그 말은 아마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다른 이들이라면 모르지만, 지금 혐의인들에게는 저 남궁도위를 상대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기껏해야 저 쏟아붓는 내력이 바닥날 때까지 희생을 감수하고 차륜전을 펼치는 정도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중앙의 혐의인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놈을 무시하고……”

그 손가락이 가리킨 건 남궁도위의 뒤에 있는 해남의 제자들이었다.

“해남 놈들에게 바짝 붙어라. 저놈도 아군을 무시하고 저런 검기를 날려 댈 수는 없겠지. 그럼 평범한 검수일 뿐이다."

흔한 대답도 없었다. 그저 명이 떨어진 순간, 혈의인들의 발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광경만으로도 이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훈련받은 이들인지 알 수 있었다.

쇄애애애액!

혈의인들이 일제히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 방향은 이전과 미묘하게 달라졌다. 남궁도위의 전면이 아닌, 좌우 측면.

남궁도위를 완전히 무시할 경우 측면에서 날아드는 검기에 휩쓸리는 이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겠지만, 이들은 그 희생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아니, 그 사실 자체를 무시했다.

명이 내려졌다면 그저 따른다.

전장에서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또 어느 것보다 지키기 어려운 그 절대 원칙을 이들은 철저하게 지켜 내고 있었다.

"큭!"

상대의 전략을 알아챈 남궁도 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그가 아무리 검기를 뿌려 댄다고 해도, 적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지나쳐 가는 놈들을 모두 막아 내기란 불가능하다.

남궁도위가 다급하게 검을 떨치려는 순간, 그의 귀에 익숙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휘이이이익!

퍼어어어어엉!

우측으로 날아든 주먹만 한 단환이 터지며 분홍빛 독분이 피어올랐다. 달려들던 혈의인들이 바로 앞에서 퍼지는 독분을 보며 주춤 속도를 줄였다.

쇄애애애애액!

연이어 그 독분 속에서 무수한 비침이 쏟아졌다.

카강! 카가가강!

혈의인들이 정신없이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비침을 쳐 낸다. 설사 이 비침이 깨끗하다 해도, 저 독분을 뚫고 나온 순간 독을 한껏 머금었을 터.

전장에서 독에 당하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는 이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작은 세침이라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당가가......"

그 피어오른 독분 사이로 당패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스스로 만든 독분 따위엔 중독될 일 전혀 없다는 듯이.

"남궁세가보다 취급이 나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희 같은 사파 놈들에게 무시당할 정도는 아니지."

까가가각!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비도들이 서로 마찰하며 날카로운 금속음을 토해 냈다.

그 순간, 반대쪽으로 쇄도하던 혈의인들에게는 반월형의 경기가 마치 비행하는 나비처럼 어지럽게 비산하며 쏟아졌다.

"큭!"

카가가강!

딱히 대단한 힘이 실리진 않았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히 움직였다. 수십 마리의 나비 떼가 숲속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이토록 변칙적인 공격을 무시하고 돌진한다는 건 자살행위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결국 쇄도하던 이들도 그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벅저벅.

부채를 살랑살랑 부치며 걸어 나온 임소병이 쯧쯧 혀를 찼다.

"너희, 하오문이로군.”

"......"

"보자보자. 세검에 복면에 혈의라…… 사용하는 검술은 아랑추혼검 (餓狼追魂劍) 같고. 하오문의 추혼대인가, 그럼?"

혈의인들이 말없이 임소병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을 받으며 임소병이 피식 웃었다.

"여하튼 사파라는 것들은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다니까. 제 정체를 숨기려고 주둥이 한 번을 안 여는 것들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같은 옷에, 같은 무기를 들고, 같은 무공만 쓰는 거지? 혹시

못 알아봐 주면 섭섭하기라도 한가?”

신랄한 임소병의 말에 건너편의 당패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그쪽도 사파 아니십니까."

“어허. 손 씻은 지가 언젠데! 자꾸 과거 들먹이지 마십시오."

임소병이 너스레를 떨고는 부채를 휘적휘적 저어 보였다.

하지만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몸짓과는 달리, 그의 시선은 오직 적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살점 하나까지 모조리 분석하고 이해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녹림왕이 해남을 지킬 줄은 몰랐소.”

“잇몸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 이놈들이라도 있어야 내 몸에 칼이 하나라도 덜 박힐 테니까.”

임소병이 슬쩍 다른 쪽을 돌아보려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뭐, 꼭....... 누가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오, 오해하지 마시고."

“…… 아무도 오해 안 했소."

"쯧."

임소병이 들고 있던 부채를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하오문의 추혼대. 사파라면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추격조요. 하오문은 특성상 추격조가 많은 편이지. 그중 하나로 생각하면 될 거요."

“오, 그럼 상대하는 방법은요?"

"난들 알겠소?"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했다.

“추격조가 하나가 아니라 많다니까. 그리고 난 문사지, 정보원은 아니잖소. 그냥 그런 놈들이 있다는 것만 알 뿐이지."

“……문사가 아니라 산적이시겠죠."

"그게 그거지."

“.…… 말을 말아야지."

"그리고 이럴 때 보면 그 잘난 정파 분들보다 사파가 나아 보이지 않소?"

"예?"

당패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임소병이 슬쩍 뒤를 돌아봤다.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이가 지켜 주니 어쩌니 하고 앞으로 나서는데, 그걸 뒤에서 구경만 하며 덜덜 떨어 대고 있잖소."

임소병의 얼굴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어렸다.

"만만한 놈들이 사형제를 상처 입혔을 때는 물어뜯어 죽이기라도 할 듯이 굴더니, 좀 위험하다 싶은 놈들을 만나니 얼마나 얌전해지시는지. 그 잘났다는 정파 분들도 대단할 거 없군. 사파는 계기가 좀 달라서 그렇지, 오기는 있거든.”

그 말을 들은 해남 제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제야 자신들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깨달으며 치욕감이 밀려든 것이다.

그 치욕감을 노기로 바꾸는 건 그저 한 문장으로 충분했다.

"뭐, 걱정할 것 없소. 내가 지켜 드릴 테니까. 거기서 얌전히 구경이나 하시오."

임소병의 그 말에, 해남의 제자들이 일제히 살기를 피우기 시작했다.

"누가 덜덜 떨었다는 겁니까!"

"잠깐 당황했을 뿐이오!"

“그렇소! 해남을 뭐로 보는 거요!"

"아, 그러신가?"

임소병이 낄낄대며 말했다.

"그럼 주둥아리로만 지껄여 대지 마시고, 어디 한번 그 검으로 증명해 보시든가."

"이......!"

독기 실린 눈빛으로 임소병을 노려보던 해남의 제자들이 앞으로 달려 나왔다.

남궁도위와 당패, 그리고 임소병을 필두로 한 해남의 제자들이 혈의인들을 향해 가공할 살기를 피워 올렸다.

기껏 무너뜨려 놓았던 기세가 되살아나자, 혈의인들의 안색이 순간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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