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8화. 이 땅에 쉴 곳이 있을까? (3)
쏴아아아아!
숲이 온통 거세게 흔들렸다.
이리저리 뻗은 가지들이 서로 부딪히며 마치 파도치는 듯한 소리를 자아냈다. 그 안에서 우수수 쏟아진 핏빛 무복을 입은 무리는 가공할 속도로 쇄도하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백천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다르다!'
그의 감각이 손끝이, 본능이 외치고 있다. 이들은 이제껏 앞을 막아섰던 놈들과는 수준이 다르다고 말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하나뿐이었다.
'사패련!'
백천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크게 고함쳤다.
"전방을 사수해!"
누구에게 내리는 명인지 불분명했으나, 듣자마자 확실하고 분명하게 반응하는 이들이 있었다.
조걸과 윤종, 유이설과 당소소가 백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빛살처럼 일행의 선두로 치고 나갔다.
"와 봐. 이 새끼들아!"
조걸이 기세에서 눌리지 않겠다는 듯 거칠게 소리쳤다. 하지만 얼굴을 거의 다 가린 복면 위로 드러난 혐의인들의 두 눈은 섬뜩하도록 냉정하고 침착했다.
파아아아앗!
혈의인의 세검(細劍)이 독사처럼 조걸을 향해 날아들었다.
쾌검을 장기로 삼는 조걸조차도 순간 숨을 멈출 만큼 놀라운 속도의 검격이었다.
카앙!
매화검을 치켜든 조걸이 날아든 세검을 단번에 쳐 냈다.
혈의인의 두 눈이 일순 섬뜩하게 빛났다. 그는 이내 달려드는 속도를 살짝 늦추었다.
조걸은 작게 당황했다.
'뭐지?'
의문이 머릿속에서 채 완성되기도 답이 주어졌다. 기세를 늦췄던 혈의인이 뒤쪽에서 합류한 혈의인들과 보조를 맞춰 다시 조걸에게 달려든 것이다.
세 명, 단 한 번의 검격만으로도 상대의 기량을 파악하고, 사냥을 위해 필요한 수를 맞춘 것이다.
스아아앗!
손가락만큼 가는 세검들이 연이어 조걸의 몸뚱이를 노려 왔다.
세검은 가는 만큼 빠르고 막아 내기 쉽지 않다. 검신을 쳐 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정교한 운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특성상 실을 수 있는 힘의 크기에 한계가 있다. 그러니 그리 위협적인 병기라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세검의 수가 셋에 달하는 순간,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큭!”
조걸이 연이어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세검들을 쳐 냈다.
본디 그의 장기는 공세다. 누구보다 쾌속하고 신랄하게 적을 몰아치는 연격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그 장기를 전혀 발휘할 수가 없었다.
캉! 카앙! 카강!
정교하게 맞물리는 톱니바퀴처럼 세 개의 검들이 연이어 조걸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나의 검을 쳐 내고 반격하려 할 때마다, 그의 급소를 향해 또 다른 검이 날아들었다.
쳐 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피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격의 실마리를 잡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어설프게 공세로 전환하는 순간, 저 검이 그의 몸을 꿰뚫을 것이다. 검신 전체를 시커멓게 물들일 만큼 지독한 독이 발린 검이!
'이, 이놈들이!'
조걸은 지금껏 다수와 싸우는 것을 겁내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다수와 싸워 왔으니까. 대련이라면 몰라도, 실전에서라면 그는 언제나 많은 수를 상대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니 그의 검도 당연히 거기에 맞춰 발전해 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들은..….
'빌어먹을! 능숙하다!'
단순히 머릿수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이들은 그저 머릿수만 늘어났을 뿐이다.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일이 있어도, 어려움이 두 배로 늘어날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아니다. 이들의 검세는 서로를 교묘하게 보완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비유지만, 여럿이 동시에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팔이 세 개 달린 이가 손마다 검 하나씩 들고 연격을 가해 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조걸은 절실히 이해했다. 그저 다수와 싸우는 것과 정교한 합격술을 익힌 이들과 싸우는 것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파앗!
조걸의 고개가 순간 격하게 옆으로 꺾였다.
뺨 옆으로 날카로운 세검이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하지만 뻗어 온 세검은 조걸의 얼굴을 채 다 지나치기도 전에 재빠른 속도로 다시 회수되었다.
'이 새끼!'
조걸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전력으로 내지른 것이 아니다. 전력으로 내지른 거라면 저리 쉽게 회수할 수 있을 리 없다. 이 말인즉, 여력을 남기고 검을 내질렀다는 것이다.
조걸은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여력이 있었다면 뻗어 낸 검을 횡으로 휘둘러 조걸의얼굴에 상처를 입히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그냥 검을 회수했다. 이건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그를 무너뜨리겠다는 수작이다.
아니나 다를까, 검을 회수한 혈의인의 눈빛은 오히려 처음보다 더 차갑고 냉정했다.
조걸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사냥당한다는 공포.
사냥꾼이 수없이 덫을 놓은 외길로 몰이를 당하고 있단 공포가 처음으로 조걸의 머릿속을 덮쳤다.
'내가……'
그가 얼굴을 참혹히 일그러뜨렸다.
“내가 토끼 새끼 정도로 보이냐, 이 개자식들!"
파아아아앗!
조걸의 검이 순간적으로 분열하며 붉은 매화 잎을 피워 올렸다. 아니, 피워 올리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타아아아아앙!
순간적으로 조걸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의 검이 화려하게 분열하려는 순간, 전방에 있던 혈의인 하나가 단번에 돌진하며 그의 검을 강하게 내려친 것이다.
'뭣?'
손목으로 둔중한 충격이 전해졌다. 그 바람에 피어 오르려던 변초가 뚝뚝 끊기고 말았다.
조걸과 혈의인의 눈이 허공에서 서로 마주쳤다.
쇄애애애액!
동시에 두 검이 조건을 노리며 쇄도했다. 조걸이 기겁하며 검을 회수하고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 맞닿은 혈의인의 검에서 가공할 흡입력이 터져 나오며 조걸의 검을 빨아들였다.
'어?'
쇄애애애액!
양쪽으로 찔러 오는 검이 독사의 송곳니처럼 조걸의 몸에 틀어박히려는 찰나였다.
카아아아아앙!
뒤쪽에서 뻗어 온 섬전 같은 검격에 날아들던 검이 충돌하며 튕겨 나갔다. 동시에 누군가가 조걸의 어깨를 세게 콱 움켜잡았다.
"흥분하지 마라.”
“사, 사숙!"
조걸을 위기에서 구해 낸 백천이 적을 노려보며 나직이 말했다. 얼굴이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이놈들…… 전문가다."
백천의 눈빛은 흡사 적을 분석하는 듯했다.
조걸이 당황한 것도 당연했다. 지금껏 화산이 상대해 왔던 이들과는 성향이 다르다. 힘을 앞세워 찍어 누르려는 이들이 아니다.
'그리고 조금 전 그 검격......'
백천의 얼굴이 심각해진 건, 조걸이 전개하려던 검을 봉쇄했던 그 일격 때문이었다.
화산의 검은 현혹하고 뒤흔든다. 한데 그 검격은 화산의 검이 뻗어 나가는 지점을 정확하게 노렸다. 아무리 거대한 매화나무라 해도 가지가 없다면 꽃을 피울 수 없는 법. 그 검격은 조걸이 피워내려던 꽃을 가지부터 잘라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순간적인 기지?
'아니야.'
미리 분석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검격이었다. 이들은 화산을 잘 알고 있다. 화산의 검수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를 연구한 이들이라는 의미다.
아니나 다를까, 조절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발목을 잡히고 있었다.
"큭! 이 자식들!"
당소소가 뒤로 비척비척 물러났다.
평소라면 제게 달라붙은 셋쯤은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 역시 이토록 합공을 익힌 이들을 상대하는 건 처음이다.
게다가 이곳까지 오면서 지칠 대로 지쳤다.
윤종과 유이설은 그 성향상 앞선 둘보다는 잘 버티고 있지만, 그게 전부였다. 적을 압도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백천의 날카로운 시선이 먼 곳으로 향했다. 화산의 제자들에게 달라붙은 인원을 제외한 혈의인들이 검을 내린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중앙, 딱 봐도 남달라 보이는 이가 무심하게 전황을 주시하다 천천히 팔을 들었다.
“가라.”
그가 손짓한 순간, 대기하던 이들이 화산의 보호를 받고 있던 해남의 제자들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 속도가 어마어마해서 마치 붉은 혈선이 허공에 생기는 듯했다.
파파팟.
흔한 기합 하나 없는 조용한 쇄도.
그 끝에 놓인 해남의 제자들은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저들이 얼마나 강한지 아직 검을 섞어 보지 않은 그들은 모른다. 얼마나 대단한지 순간적으로 가늠할 만큼 경험이 대단치도, 눈썰미가 좋지도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다.
피식자는 포식자를 알아챈다.
커다란 사슴이 작디작은 뱀을 보고 달아나는 이유는 그 크기와 날카로운 독니의 위험성을 익히 알기 때문이 아니다. 본능적인 감각이 자신을 위협할 존재를 포착하기 때문이다.
지금 해남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껏 위협받을 일 없이 살았기에 드러날 일도 없었던 본능이 당장 물러나라고 비명을 지르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해남의 제자들이 본능의 목소리에 따르는 것보다 혈의인들이 달려드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타앗!
기합성 하나 없이 쇄도한 혐의인 하나가 검은 세검을 섬찟할 만큼 날카롭게 내질렀다.
"크윽!"
궁지에 몰렸다고는 하나, 해남의 제자들 역시 당당한 구파일방의 정예다. 화산을 상대하며 한차례 보여 준 검격에 당황할 만큼 약하진 않았다.
벼락처럼 휘둘러진 해남의 검이 날아드는 세검을 단번에 후려쳤다. 얇은 검을 일격에 두 동강 내어 버릴 기세였다. 날카롭지만 무겁진 않은 세검을 상대하기에 나무랄 데 없이 효과적인 대처였다.
하지만.
콰앙!
그 가녀린 세검과 거친 해남의 검이 충돌하는 순간, 터져 나온 것은 예상과는 달리 거대한 폭음이었다.
곽환소가 눈을 부릅떴다.
사형제들의 검이 오히려 세검에 튕겨 나간 것이다. 믿을 수 없게도.
'뭐……?'
해남의 제자들이 전력을 다해 휘두른 검보다 저 가느다란 검에 실린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인가?
아니, 그런 게 아니다!
곽환소의 두 눈이 혈의인들의 손목을 다급히 살폈다. 확실히 파르르 떨렸다. 게다가 혈의인들의 안색도 찰나지만 파리하게 변했다.
‘저, 저놈들!’
저놈들은 예상한 것이다.
해남이 자신들을 어떻게 상대해 올지. 그렇기에 순간적으로 무리한 내력을 검에 밀어 넣어 일격을 버텨 낸 것이다.
상식을 벗어난 파격적인 운용. 하지만 그 운용의 대가가 무엇인지는 그 즉시 밝혀졌다.
파아아앗!
푸욱 푸욱 푸욱!
"아아아아아아아아악!"
혈의인들의 검이 찰나 당황한 해남 제자들을 번개같이 꿰뚫었다. 상대를 밀어 낸 후의 대처만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전혀 예상 밖의 상황에 놓이자 우왕좌왕한 것이다.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였다.
"아, 안 돼!"
곽환소가 기겁하며 손을 내뻗었다. 일 열이 저렇게 삽시간에 무너져 버린다면 손써 볼 겨를도 없이 모두 무너지……
콰아아아아아앙!
그때 굉음과 함께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무시무시한 백광이 터졌다. 달려들던 혈의인들은 포탄에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속절없이 튕겨 나간다.
"엇?"
“뒤로!"
한 사내가 얼굴을 굳힌 채 그들의 앞에 사뿐히 내려섰다. 살짝 오만해 보일 정도로 준수한 얼굴의, 한 절정 검수가.
“앞쪽은 내가 맡겠소.”
남궁도위가 백광으로 물든 제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전신에서 제왕과도 같은 기세가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