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5화.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5)
“저, 저는 여기 팔이 좀……”
“이 정도면 괜찮아요. 저기 보조하는 양반한테 가서 소독만 받으세요.”
"......소소야. 그래도 내가 오라비인데……”
“뭐요?”
“.……아니다.”
당패를 대동한 당소소가 해남 문도들의 상처를 빠르게 돌보기 시작했다. 의술에는 나름 자신있는 당패지만, 당소소가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차마 제가 주도하겠다고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런 건 언제 다 익힌거냐? 엄청 능숙한데."
“오라버니도 이 망할 문파에 일 년만 있어 보세요. 베인 상처 같은 건 당과 먹으면서도 봉합할 수 있으니까."
"아......"
내상이야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외상에 관해서는 당소소가 훨씬 더 능숙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여, 여기 좀 빨리……”
"좀 긁힌 것 가지고 엄살 부리지 말고 기다려요. 더 큰 상처 입은 사람들 안보여요?"
“죄, 죄송합니다."
"다음!"
“예, 소저! 제가……”
당소소에게로 몰려든 문도들을 보며 금양백이 안색을 굳혔다.
'..….의원이라.'
구파일방 중 하나인 해남파에 의약당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그 의약당 인원들은 이번 파문 때 대부분 해남을 빠져나갔다. 주요 전투원도 아닌 그들이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설령 그들이 있었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되었겠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크게 부상 입은 사람을 치료해 본 경험이 없으니까. 기껏해야 내상 입은 이들을 요양시키는 방법이나 아는 정도다. 함께 왔다 해도 아마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저분께서는?”
“당가 출신입니다."
백천이 금양백의 질문에 담담히 대답했다.
“사천당가 당군악 가주의 여식이지요. 인연이 있어서 화산에 입문했습니다. 지금은 화산 의약당의 주력입니다."
“……의약당의...…”
"예."
“저희 문파가 이놈 저놈 다치는 일이 워낙에 많다 보니 능숙합니다.”
“…….”
“그러니 부상 쪽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 과한 부상은 조금 곤란하겠지만, 이곳에서도 가능한 치료는 다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금양백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앞다투어 치료받는 이들을 보니 이제야 전장에서 의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이 됐다. 언젠가 사패련과 목숨을 건 전쟁을 치러야 할 거라고 각오했으면서도 이런 부분에 대해선 어처구니없을 만큼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금양백은 그런 자신이 갑갑하게까지 느껴졌다.
"화산은...… 이런 걸 언제부터 다 준비한 겁니까?"
“딱히 준비한 건 아닙니다. 자연스레 그리되었을 뿐이지요."
“...... 겸양이 과하시군요."
금양백의 말에 백천은 그저 쓰게 웃었다.
겸양으로 들릴 수 있겠으나, 백천은 정말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화산이 먼 미래에 있을 전쟁을 대비해 의약당에 힘을 싣기야 했겠는가?
우연히 연이 닿아 소소가 합류했고, 수많은 전투를 겪고 진검을 쓰는 대련 중 다친 이들을 수없이 치료하다 보니, 그 실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뿐이다.
소소의 능력도 대단하지만, 원래라면 화산의 막내라 이토록 힘이 실리기야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당소소가 힘을 받아 마음껏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하면…….
백천이 힐끔 청명을 바라보았다.
'저놈이 소소에게는 져 줬기 때문이겠지.'
아니, 돌이켜 보면 의원 귀한 줄 알라고 목소리를 높인 것도 청명이 놈뿐이었다.
화산이 대비했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해야겠지만……
“하지만 계속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습니다. 지금도 적은 거리를 좁히는 중일 테니까요.”
"......그렇겠지요."
금양백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치료를 해 줄 수 있는 이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상처를 돌보지 못한 상태로 강행군을 한다면, 적에게 쫓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더욱 악화일로일 테니까.
"조금 전에 놈이 한 말은 너무 마음 두지 마십시오."
“..….장문대리.”
“말을 그렇게 할 뿐, 속으로는 잔정이 많은 놈입니다."
금양백이 고개를 내저었다.
“장문대리. 저도 사람이고, 무인입니다."
“…….”
“선두에서 포위망을 뚫어 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를 리 있겠습니까? 원래는 제가 했어야 할 일입니다. 그 일을 도맡아 주고 계신 분께 무슨 말을 듣는다 한들, 어찌 티끌만큼이라도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 말씀이라도 그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정말 그리 생각합니다. 저희 해남에도……”
금양백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백천은 그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해남에도 청명 같은 이가 하나만이라도 있었다면 상황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 말을 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한 문파의 장문인이 입 밖으로 낼 만한 말은 아니었다. 자칫하다간 다른 제자들, 나아가 장로들을 무시하는 말이 될 테니까.
백천은 길게 숨을 내쉬고는 당소소를 향해 물었다.
"소소야. 멀었느냐?"
할 말은 많았지만, 지금은 느긋하게 대화를 나눌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 순간에도 적은 거리를 좁혀 오고 있을 터.
"다 됐어요! 사숙!”
곧장 대답한 당소소가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그러더니 눈에 걸리는 게 있는 모양으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거기!"
"예?"
“배에 상처 났잖아요! 빨리 이리 와요!"
“아, 아니요.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걸 왜 당신이 판단해? 판단은 의원이 하는 거지! 하여튼 칼 든 것들은 제 몸뚱이가 무쇠로 만들어진 줄 안다니까!"
"......예?"
"이리 안 와요?"
면박을 들은 이가 풀이 죽어선 당소소 쪽을 향해 달렸다. 그의 옷을 거칠게 걷어 올린 당소소는 재빠르게 상처를 살폈다. 고약을 바르고 벌어진 상처를 대충 꿰매는 손길엔 거침이 없었다.
"으......"
"엄살 부리지 마요. 더 아픈 사람 천지니까."
"......예."
붕대까지 감아 준 당소소가 주변을 돌아보며 모두에게 말했다.
“도주하는 와중에 할 수 있는 치료는 한계가 있어요. 그때는 정말 응급처치만 할 거예요."
"예."
"하지만 그래도 틈이 나면 바로 저한테 오세요. 사정 때문에 미뤄 가며 몸이 상하는 걸 방치하면 나중에 정말 짐이 되니까.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좋아."
당소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백천을 돌아보았다.
“진짜 다 됐어요. 사숙.”
“그래.”
백천이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여전히 급박하지만, 당소소는 어디서건 당소소라는 생각이 드니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모두, 바로 출발합시다."
"예."
“명심하십시오. 지금까지 상대한 적들은 제대로 된 사패련의 전력이 아닙니다. 아마 곧 진짜 사패련이 우리를 상대하게 될 겁니다."
그 말에 잠깐 느슨해졌던 긴장의 끈이 다시 팽팽해졌다. 모두 등골이 스산해지는 걸 느끼며 얼굴을 굳혔다.
알고 있었음에도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백천은 굳이 끌어내어 모두의 앞에 내밀고 있었다.
"하지만 지시만 제대로 따라 주신다면, 우리는 반드시 여러분을 강북까지 이끌 겁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장문대리.”
금양백이 제자들보다 먼저 대답했다. 그가 선수를 치니 다른 제자들도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하게 떨어졌던 신뢰가 당소소 덕에 많이 회복된 모양새였다.
“혜연 스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백천의 물음에 혜연이 빙그레 웃었다.
“다섯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스님..….”
“다만...... 청명 시주는 부상을 입더라도 제게 주지는 마십시오. 저분을 업고 가느니 그냥 죽겠습니다. 정 안 되면 입이라도 틀어막고 주시지요."
"뭐, 인마?"
“……아미타불.”
혜연의 너스레에 백천이 작게 웃었다.
사람의 진짜 힘이라는 건 이럴 때 나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소소나 혜연이나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출발하겠습니다. 진형을 잘 갖춰 주십시오."
"예!"
부상자를 수습한 이들이 곧장 다시 질주를 시작했다.
파아아앗!
'확실히……'
곽환소가 내심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나마 운기를 한 것과 안 한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다리에 힘이 실리는 게 느껴진다. 덕분에 확실히 속도를 내어 나아갈 수 있었다.
문제는, 앞으로는 이렇게 운기를 할 시간조차 부족해질 거라는 점이겠지.
그때, 귓가에 조걸이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가 스쳤다.
“사형."
"응?"
“포위망이 좀 헐거워진 것 같지 않습니까? 저 앞쪽으로는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요? 제 감각이 닿지 않는 걸 수도 있지만……”
“착각은 아닐 거다."
윤종이 담담히 대답했다.
"아무리 사패련의 수가 많고 강남을 지배하고 있다지만, 그들이 강남 전체를 병력으로 채울 수 있을 만큼 수가 많은 건 아니잖느냐.”
"그렇지요."
"결국에는 적당한 포위망을 몇 겹으로 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첫 번째 포위망을 돌파했으니, 아마 한동안은 적이 없는 구간을 지나게 되겠지."
"그럼 생각보다 할 만한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몇 번만 뚫으면 된다는 소린데......"
내심 그 말에 동조하려던 곽환소의 귀에 윤종의 목소리가 둔중하게 파고들었다.
"그렇진 않을 거다."
"어째서요?"
“사패련 역시 첫 번째 방어선으로 우리를 저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첫 번째 방어선의 역할은 그저 우리를 잠시라도 지체시키는 것이겠지. 다음 방어선에 제대로 된 덫을 놓을 시간을 벌기 위해 말이다."
“.……사패련이 동원된 방어선 말입니까?"
“그래.”
“뭐…… 어차피 그것도 짐작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처럼만 하면 뚫을 수 있겠죠."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조걸을 향해 한번 웃어 준 윤종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양포를 어깨에 둘러업고 묵묵히 달리는 혜연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처럼......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 전, 윤종은 균열의 가능성을 확실하게 목격했다. 이번에야 당소소와 혜연이 나섰으니 어찌어찌 좋게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부상자가 더 늘어난다면?
부상자가 늘어나서 결국에는 진격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리하여 더 많은 이들이 발목을 잡히고 부상을 입는 악순환에 접어들게 된다면.
그때는 어찌할 것인가?
부상자를 안고 죽을 것인가? 아니면 피를 나눈 형제 같던 사형제들을 내버리고 길을 재촉할 것인가?
화산은 그 답을 찾았다.
오랫동안 많은 일을 겪고, 서로 싸우고 논쟁하며, 자신들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받아들였다. 다른 이들은 무의미하기 짝이 없다고 손가락질하는 일들을 반복하며 말이다.
하지만 해남에는 그런 과정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이제부터 직면해야 할 것이다. 입으로만 논하던 그 거창한 선의(善意)와 도리를 목숨 걸고 관찰한다는 게 과연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어쩌면...… 강남 종단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행위 끝에 그들이 맞이해야 할 것은 가슴속에 꾹꾹 눌러 숨겨 두었던 추악한 자신과의 대면일지도 모른다.
'원시천존.'
윤종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언젠가는 화산도 마주해야 할 그 지옥이 이들에게 너무 깊은 상처가 되지 않기를 그저 바라고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