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4화.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4)
짧게 소주천을 마친 곽환소가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몸 상태를 점검한 곽환소의 얼굴엔 우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렇게나…….’
평소의 그라면 소주천만으로도 육체에 쌓인 피로를 대부분 풀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내력이야 어느 정도 회복했지만, 몸은 여전히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보다 더 안 좋은 건, 머리 안에 안개라도 낀 것 같은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곽환소는 더 욕심부리지 않기로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들이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적은 계속해서 추격해 오고 있다. 이러다 뒤를 밟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정말 끝장이다.
‘하지만…… 정말 달아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행보가 잘못된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적진을 꿰뚫으며 지나가고 있다. 저 화산파의 도움이 없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불안함은 더 커졌다.
‘이만한 속도로도 적을 따돌리지 못하는데…….’
정말 무사히 장강에 도달할 수 있을까? 지금과 같은 속도를 강남을 돌파하는 내내 유지할 수 있을까?
곽환소는 머리를 파고드는 불안한 상념을 이내 떨쳐 버렸다. 그의 정신력 덕분이 아니라, 곁에서 운기하던 이자양이 때마침 자리를 털고 일어난 덕이었다.
“괜찮으냐?”
“……몸이 말이 아니군요.”
“그래. 나도 그렇다.”
이자양은 깊은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운기 중인 다른 제자들이 많았다. 이자양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사형.”
“아무 생각 하지 마라.”
곽환소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저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만 생각하자.”
“……예, 사형.”
운기를 마친 해남의 제자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얼굴에도 마찬가지로 떨치지 못한 짙은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
“괜찮나, 사제?”
“……예, 사형. 저는 괜찮습니다.”
“지옥이 따로 없군…….”
먼저 몸을 일으킨 이들은 아직 운기를 마치지 않은 이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 시간 동안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처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건 금양백도, 곽환소도 막을 수 없었다. 그들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가건 말이다.
“……어디까지 온 거지?”
“이제 겨우 광동입니다. 담강을 간신히 지났습니다.”
“이제 겨우?”
질문을 던졌던 이가 아연실색하며 넋을 놓았다.
물론 짧은 거리는 아니다.
그들이 상륙한 해안에서 담강까지의 거리는 해남을 횡단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범한 이들이라면 꼬박 닷새 이상을 가야 하는 거리다.
그만한 거리를 불과 반나절도 되지 않아 주파했으니, 이는 분명 기록적인 성과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겨우…….”
해남의 제자들도 알고 있다.
강남은 넓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지나온 거리는 앞으로 그들이 돌파해야 할 거리의 십분지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십분지 일.
겨우 그 정도 거리를 돌파했을 뿐인데 체력은 벌써 바닥까지 떨어졌고, 여섯이나 되는 사형제를 잃었다. 해남에서 잃은 이들까지 포함하면 이곳까지 오는 데 열에 달하는 희생자가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계산해도 장강에 도달할 때까지 백이 넘는 희생자가 생길 것이다.
아니. 그 계산도 사실 맞지 않다.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적들은 더 강해지고, 더욱 집요해질 것이며, 지독해질 것이다. 그걸 감안한다면…….
생각할 힘이 생긴다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지친 다리를 어떻게든 움직이는 데만 최선을 다하던 이들이 숨 쉴 여력이 생기자 상황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 얼마나 무모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제 발로 들어온 사지가 얼마나 지독한 곳인지 말이다.
모두 망연한 가운데, 누군가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직…… 제대로 된 적의 주력은 오지도 않은 거죠?”
이는, 이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최악의 발언이 틀림없었다.
“뒤쪽에서 쫓아오는…… 만인방이 있는데, 앞쪽도 비슷한 급이 와 버리면 그냥 포위당해 죽는 것 아닙니까?”
“이제 와서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모르고 온 것도 아니면서!”
“아, 아니, 알긴 알았는데…….”
막연히 생각만 하던 것과 직접 겪는 것은 너무 달랐다. 그러나 그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자신이 안일했음을 자인하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까.
몰랐다. 사람이 저렇게 쉽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의 죽음이 저리 하찮게 취급될 수 있다는 것도.
적과 싸우다 비장하게 죽는 모습을 어릴 적부터 상상해 보곤 했지만, 이렇게 하늘이 노래지고 입에 단내가 나도록 도망치고 또 도망치다 옆구리에 칼을 맞아 사망하는 걸 누가 상상해 봤겠는가? 심지어 그 죽음 이후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남겨지고 버려지는 모습을 말이다.
“이럴 거면 해남에…….”
“그만.”
곽환소가 시의적절하게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적의 마수에서 빠져나가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지금은 말할 힘도 아껴라.”
“사형……. 하지만…….”
“사형 말씀 못 들었느냐?”
이자양이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제자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곽환소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할 말도 아니지.’
조금 전까지 그도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아니, 사실 지금이라고 해서 별다를 것도 없다.
그때, 마지막까지 운기를 하고 있던 이가 몸을 일으켰다.
“양포야, 괜찮으냐?”
“……예, 사형.”
양포는 피에 젖은 제 허벅지를 문질렀다. 관통당했던 허벅지가 아직 채 아물지 않았다.
“상처가 심해 보이는데…….”
“걸을 수 있겠느냐?”
주변의 다른 제자들이 걱정 어린 얼굴로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한눈에 보아도 양포가 입은 상처가 심상치 않았다.
“괘,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아니, 상처가 보통이 아닌…….”
“빌어먹을! 갈 수 있다지 않습니까!”
별안간 양포가 벌컥 고함을 치자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괜찮다는데 왜 그러는 겁니까!”
“아니, 나는 그저…….”
“뛸 수 있다고요! 내가 괜찮다지 않습니까!”
말을 하던 이들이 입을 닫았다. 알아 버린 것이다. 지금 양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달릴 수 없다면, 부상이 깊어서 일행의 속도에 따라갈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 누군가 업고 대신 달려 주기라도 할 건가?
다른 이들 역시 지칠 대로 지쳐 있다. 제 몸 하나 이끌고 가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부상자를 돌볼 여력이 있을 리 없다.
질서정연하고 체계적인 후퇴를 하는 거라면 부상자를 동반할 수 있다. 하지만 적에게 쫓겨 달아날 땐 으레 가장 먼저 버려지는 것이 부상자다. 아무리 의리가 넘친다 해도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이가 몇이나 있겠는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이 정신 나간 놈아!”
저 핏발이 선 눈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 양포는 버려질까 두려운 것이다. 평생을 함께해 온 사형제들이 그를 짐으로 여기고 내버려 둔 채 가 버릴까 봐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설마 우리가…….”
그의 의심과 두려움을 두고 화를 내려던 이들은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절대 버리지 않는다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고.
평소였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호언장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들도 이제는 안다. ‘평소’라는 말은 지금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그들이 지켜 오던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는 먼지 한 톨만 한 가치도 없다.
그렇기에 두려워졌다. 입 밖으로 낸 말을 스스로 어기는 상황을 직면하게 될까 봐.
“설마 뭐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양포가 발작적으로 침을 튀겨 가며 소리쳤다. 그때,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비켜 주세요.”
어느새 다가온 당소소가 품 안에서 몇 가지 도구들을 꺼내 들고 서 있었다.
“안 비켜요?”
“의, 의원이십니까?”
“네. 당가 출신이니까요.”
“아…….”
양포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 우르르 좌우로 비켜났다. 그러자 당소소가 빠른 걸음으로 양포에게 다가가 상처 부위를 살폈다.
“흠. 더 벌어졌네.”
사실 상처를 입은 후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느 정도는 회복세에 접어들었을 만한 관통상이었다. 하지만 상처를 입고도 계속해서 달리느라 상처가 처음보다도 더 벌어져 있었다. 아직 곪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당장 치료가 필요했다.
“깨끗한 물 가지신 분.”
“여, 여기 있습니다.”
누군가가 내민 물통을 받아 들고, 당소소는 양포를 빤히 보았다.
“참아요.”
“예……? 그게 무……. 아아아아악!”
그 순간 양포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양포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잡아 벌리고는 그 안으로 물을 부어 넣은 것이다. 그러더니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이걸로는 안 되겠는데.”
저 망할 사파 놈들은 제 병기 하나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 정파는 애병을 목숨으로 여기고 관리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라기 때문에 전투 중이라도 병기는 깨끗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상처가 쉽사리 덧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파 놈들의 무기는 녹슬어 있거나, 오물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상처가 곧잘 곪곤 한다. 제대로 씻어 내지 않는다면 피가 썩으며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사형! 청명 사형!”
당소소의 외침에 멀리 있던 청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 왜?”
“술 있어요?”
“쯧.”
청명이 제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술병을 당소소에게 집어 던졌다. 잡아채듯 술병을 탁 받은 그녀는 곧장 마개를 따 냄새를 맡았다.
“으, 독해.”
눈살이 확 찌푸려질 정도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여튼 저 양반 그렇게 말려도 독주밖에 안 먹는다니까.”
하지만 그게 이럴 때는 퍽 도움이 된다. 당소소는 양포를 보며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참아요.”
“네?! 뭐, 뭘 또…….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이번엔 양포도 아예 눈을 까뒤집고 뒤로 넘어갔다.
멀쩡한 입으로 마셔도 목이 타는 듯한 느낌을 주는 독주다. 그게 꿰뚫린 상처에 들어왔으니 제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들 만큼 통증이 극심할 것이었다.
“됐어.”
술병을 내려놓은 당소소가 상처 부위에 고약을 바르고 바늘과 실로 빠르게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끄……. 끄으으윽…….”
문외한이 보아도 신속하고 정확하기 그지없는 손길이다. 쩍 벌어져 있던 상처가 순식간에 닫히며 자취를 감췄다.
“잘 참았어요.”
면포를 꺼내 꿰맨 부위를 감으며 당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것이다. 청명이 지니고 다니는 술은 그냥 붓는 것만으로 소독이 될 만큼 지독하니까.
“다만…… 한동안은 다리를 쓰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모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다리를 쓰지 않을 수 있는가? 이건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다는 소식보다도 더 절망적이었다.
“누가 업어야 해요.”
해남의 제자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부상당한 동료를 업고 가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히 굴뚝같다. 하지만 그 선택이 자칫했다가는 양포마저 죽일 수 있으니 망설여지는 것이다.
“그럼 제가…….”
상황을 지켜보던 곽환소가 한발 나서려는데, 당소소가 고개를 획 돌려 한 사람을 불렀다.
“혜연 스님.”
“예, 시주.”
“한 시진 정도 업어 주셔야 해요. 하실 수 있죠?”
“아미타불. 물론입니다.”
“최대한 흔들리지 않게 해 주세요. 상처가 벌어지면 골치 아프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혜연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해남의 제자들은 당황하여 그를 멍하니 보았다.
‘저 사람은…… 어떻게 이걸 당연하게 여길 수 있지?’
어떻게 해남과는 관계도 없는 사람이…….
“그리고 또.”
그때, 당소소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들의 시선을 낚아챘다.
“경상이든 뭐든 상관없어요. 조금이라도 상처가 생기신 분들은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오세요. 나중에 상처가 덧나면 그때는 정말 최악이니까.”
“…….”
“뭐 해요, 빨리!”
“그, 그럼, 저 여기 팔에…….”
“저도 다리를 다쳤습니다.”
상처를 입은 이들이 하나둘 당소소의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