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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93화 (1,294/1,567)

1293화.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3)

“예, 장문인.”

백천이 즉시 포권 하며 금양백을 맞았다. 하지만 금양백은 곧바로 입을 열지 않고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백천을 응시했다.

그 시선에 백천은 금양백이 하고자 하는 말을 대충 짐작했다.

‘여섯이었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쯤 되었을 것이다. 이곳까지 오면서 희생당한 해남 제자들의 수가.

백천에게 있어서도 더없이 아픈 수였다. 하지만 백천이 아무리 그 아픔에 공감한다고 한들, 금양백이 느끼고 있을 절망감에는 비할 수 없을 터.

파르르 떨리는 금양백의 눈가가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지금 그가 어떤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백천은 쓴소리 정도는 얼마든지 감내하리라 결심했다.

그때, 금양백이 양손을 앞으로 내밀며 정중히 포권 했다.

“못난…… 모습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백천의 얼굴에 얼핏 당혹감이 스쳤다.

“해남의 장문인으로서 제자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하여 장문대리께 부담을 지워 드린 점, 용서해 주십시오.”

백천은 멍하니 금양백을 바라보았다. 백천뿐만 아니라, 다른 화산의 제자들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금양백의 실책으로 다른 이들에게 부담이 지워진 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한 문파의 수장이 이토록 담백하게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놀라울 수밖에.

“그런 말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문인.”

백천이 얼른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장문인께서 빠르게 수습해 주시지 않았다면 피해는 더 커졌을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탓하지 마십시오.”

그 말에, 금양백은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백천은 차마 그 이상 위로를 건네지도 못했다. 지금 금양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는 것조차 주제넘은 짓이다.

하지만 그 순간, 격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째서 장문인께서 사과하십니까!”

해남의 장로 중 하나가 격앙된 목소리로 노성을 내지른 것이다.

“잘잘못을 따진다면 저들을 탓해야지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였단 말입니까! 이리 무리하여 적진을 돌파하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생기지 않았을 희생입니다!”

“곽월.”

“제 말이 틀렸습니까, 장문인?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짓거리입니까! 애초에 말이 되는 짓을 해야지요!”

“그만하거라.”

“애초에 저런 어린놈들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습니다. 천우맹이니, 뭐니 해…….”

“그 입 다물지 못하겠느냐!”

금양백이 노기 서린 눈으로 곽월을 노려보았다. 곽월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곽월을 찍어누른 금양백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백천을 향해 다시 포권 했다.

“……죄송합니다. 평생을 함께해 온 사형제를 잃은 터라…… 마음이 격앙되어 그렇습니다.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장문인.”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장문대리.”

“예, 장문인.”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온전히 우리의 탓이오. 장문대리께는 책임이 없소이다.”

“…….”

“애초에 살기 위해 온 땅이 아니오. 해남에 남아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험한 꼴을 겪었겠지요. 그런데 어찌 장문대리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금양백이 운공하고 있는 제자들을 흘끗 돌아보았다. 운공 중임에도 모두 하나같이 잔뜩 지쳐 보였다. 피와 땀에 절어 형편없는 낯들을 보고 있자니 금양백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한숨 묻은 질문이 흘러나왔다.

“……정말…… 이런 식으로 저들의 포위를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오?”

“장문인, 그건…….”

“알고 있소이다.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 정도는. 쉽지 않은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무리할 수밖에 없겠지요.”

백천은 말없이 금양백을 응시했다. 지금 금양백은 떼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침착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장문대리.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라면…… 최소한 이렇게 죽지는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남의 제자들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바다를 건넜소이다. 설사 죽는다 해도 해남의 이름만은 남기기 위해서. 그러니…….”

금양백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을 이었다.

“이렇게 토끼몰이 당하듯이 죽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아닙니까? 차라리 명예롭…….”

“명예?”

그 순간 청명의 서늘한 목소리가 금양백의 말을 단번에 끊어 버렸다.

“청명아.”

백천이 만류하려 했지만, 청명은 멈추지 않았다.

“누구의 명예?”

“그야…….”

“해남의 명예?”

청명의 입가에 명백한 조소가 어렸다.

“명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청명아!”

“장문인.”

청명이 서늘하게 금양백을 노려보며 말했다.

“크게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훌륭한 죽음 같은 건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겁니다.”

“…….”

“길이 남을 만큼 대단한 일을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죽는 그 순간 후회 한 점 없는 인간 같은 게 있을 것 같아요? 죽는 놈들이 마지막 순간에 하는 생각은 오직 하납니다.”

청명이 씹어뱉듯 말했다.

“‘살고 싶다’뿐이에요.”

금양백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해남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당당하게 죽고 싶다면 장문인께서는 그리하세요. 본인이 원한다는데 누가 말리겠어요. 대신.”

살기 어린 청명의 눈빛이 금양백을 꿰뚫었다.

“그 알량한 권위로 제자들에게 명예로운 죽음이니 뭐니 하는 개 같은 소리 강요하지 마세요. 우린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거니까.”

금양백이 고개를 툭 떨구었다.

청명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도 딱히 동정을 표하지 않았다. 그저 죽일 듯이 한번 노려보고는 몸을 돌려 버렸을 뿐이다. 성큼성큼 멀어지는 청명을 보며 백천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금양백에게서 거리를 벌린 청명은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저런 현실 파악 못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열불이 치솟았다. 평화로운 세상을 살아온 이들이 전쟁의 본질을 제대로 알 수는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갑갑함에 청명이 제 목을 움켜잡으려는데, 순간 얼굴 옆으로 무언가가 불쑥 들이밀어졌다.

“뭐, 뭣…….”

“마셔.”

청명은 순간 말을 잃고 눈을 끔뻑였다.

물통을 불쑥 내민 유이설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로 청명을 빤히 보고 있었다.

“사고, 호위하라고…….”

“마셔.”

“아니, 나는 괜찮…….”

“마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유이설에게 말이 통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다. 이 대치에서 이길 방법 같은 건 없다. 청명은 말없이 유이설이 내민 물통을 받아 들었다.

청명이 물을 마시기 시작하자, 유이설은 그제야 뻗었던 손을 거두고 그런 그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후.”

단숨에 물을 비워 낸 청명이 물통을 유이설에게 다시 내밀었다.

“됐지?”

“응.”

유이설은 담담한 얼굴로 물통을 받아 제 허리춤에 다시 매달았다.

“그러니까 이제 호위하러…….”

“네 책임 아냐.”

뜬금없는 말이 물통만큼이나 불쑥 나왔다. 청명은 말없이 유이설을 빤히 바라보다 피식 웃고 말았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갑자기 뜬금없이. 하여튼 사고는…….”

“네가 모든 사람을 다 구할 수는 없어.”

“안다니까?”

청명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는가? 누군가 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어처구니없을 뿐이었다.

하지만 유이설은 말없이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청명을 빤히 바라보았다. 청명은 잠시 그 모습을 보다 한숨처럼 말했다.

“……진짜 알아.”

그러자 유이설은 이렇다 할 대꾸 없이 획 몸을 돌렸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청명은 살짝 멍해져선 그런 그녀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감상에 잠길 틈 따윈 없었다. 얼굴 쪽으로 무언가가 다시 날아들었다.

“뭐야, 또.”

날아드는 것을 낚아채고 보니 티 한 점 없는 새하얀 면포였다.

청명의 눈빛이 살짝 어둑해졌다. 손이 닿은 곳부터 면포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얼굴 좀 닦아라. 사람 몰골이 아니다.”

“됐어. 어차피 또 더러워질 건데.”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좀 해라.”

“……아니, 필요 없…….”

“닦아.”

영 포기할 기미가 안 보이니 청명은 구시렁대면서도 제 얼굴을 면포로 문질렀다. 새하얀 면포가 금세 검붉게 물들었다.

묵묵히 지켜보던 백천이 입을 열었다.

“어떠냐?”

“뭐가?”

“장문인의 말이 꼭 틀린 건 아니잖아.”

“…….”

“명예로운 죽음이니 뭐니, 그런 건 난 잘 모르겠지만…… 저들이 너무 힘겨워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지금은 차라리 그게 나아.”

“……뭔 소리냐?”

“화가 나고, 속이 터지고, 다 죽여 버리고 싶고.”

청명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울분에 차 있을 때는 차라리 나은 거지. 옆에서 벌어지는 참상과 죽음에 화를 낼 수 있다는 건, 아직 버틸 만하다는 거야. 진짜는 그다음에 온다.”

분노는 동력이 된다. 하지만 그 분노가 공포심으로 바뀌었을 때, 사람은 저항할 의지를 잃는다.

“다음에 죽는 건 나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 상황은 더 귀찮아진다. 그렇게 되기 전에 최대한 움직여야 해. 그때부터는 체력이 문제가 아니게 될 테니까.”

청명은 피로 얼룩진 면포를 대충 내던졌다.

쫓기는 것, 포위당하는 것.

거기서 오는 진짜 공포를 이들은 아직 알지 못한다. 쉬는 것이 더는 쉬는 것이 아니게 되고, 지쳐 쓰러져 쪽잠을 자는 와중에도 목에 칼이 내리꽂히는 악몽에 절규하며 깨어나는 상황까지 가 버리면, 더 이상 체력을 보충할 방법이 없다.

그 지경에 이르기 전까지 어떻게든 한 발이라도 더 나아가야 한다. 그게 안 된다면 모두 몰살이다.

백천이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응?”

“상황이 악화하면 해남이든 뭐든 버리고 도주할 거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숨김없는 진심이었어.”

“……뭔 뻔한 소리를 하고 있어? 당연한 거지. 해남이 뭐라고.”

백천은 차분히 청명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판단은 내가 할 거다.”

“뭔 소리를…….”

“그때 가서 다른 소리 지껄이지 마. 두들겨 패서라도 끌고 갈 테니까.”

청명은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백천을 보았다.

“사숙은 내가 해남 때문에 목숨이라도 걸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는 세상 모든 것을 잘 알지.”

“응?”

“우리는 짐작도 해 보지 못한 걸 당연하다는 듯이 알고 있고, 아무도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을 당연하다는 듯이 해내.”

“……갑자기 뭔…….”

“그런데 네가 유일하게 전혀 모르는 게 있다. 그게 뭔지 알아?”

“……뭔데?”

“너 자신이다.”

백천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 너를 막는 건 너를 잘 아는 놈의 역할이겠지. 명심해라.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명에 따라야 해. 내가 내린 명을 어기고 네 독단으로 움직이는 순간, 나는 장문대리의 자격으로 너를 파문할 거다.”

청명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백천이 담담히 덧붙였다.

“농담 아니야. 협박도 아니고.”

“…….”

“기억해 둬라.”

그 말을 끝으로, 백천은 몸을 돌려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빤히 보던 청명이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이제는 머리가 너무들 굵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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