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2화.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2)
푸드드득!
수십이 넘는 전서구들이 쉬지 않고 날아든다. 호가명을 호위하던 이들이 날아드는 전서구를 하나하나 빠르게 낚아채, 그 발에 묶여 있는 서찰들을 풀어냈다.
“취호문 돌파당했습니다!”
“공령방도 뚫렸습니다!”
“방어선이 힘을 못 쓰고 있습니다, 군사!”
“흐음.”
포위망을 뚫어 내는 속도가 파죽지세라는 말로도 모자라다.
“아무래도 상황이 영 안 좋아 보이는데.”
괴량이 히죽 웃으며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예상했던 속도보다 배는 더 빠른 거 아닌가? 군사의 예측이 틀릴 때도 있군.”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
하나 호가명은 표정에 미동조차 없이 대꾸했다.
“내 예측이 통할 만한 상대가 아니니까.”
“흠.”
괴량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원래 책사라는 것들은 제 예측이 어긋났을 때를 끔찍하게 싫어한다. 하지만 지금 호가명은 딱히 껄끄러운 기색조차 보이질 않고 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인물이다.
호가명은 태연히 말했다.
“그리고 나쁜 소식도 아니지.”
“음? 어째서?”
“화산검협 혼자서 뚫고 가는 거라면 모를까, 혼자가 아닌데 이 속도는 말이 안 된다. 지금까지 화산검협을 지켜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지금 이자는 확실히 무리하고 있다.”
“앞뒤가 맞질 않는군. 화산검협의 능력을 재단하면 안 된다고 한 건 군사가 아니었나?”
“물론이다. 화산검협의 능력은 재단할 수 없지. 하지만 저곳에 있는 건 화산검협뿐만이 아니지 않나.”
“……흐음.”
“화산검협의 능력이야 논외로 치더라도, 해남의 전력은 뻔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이 속도를 따라갈 수 있을 리가 없어.”
호가명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해남의 전력을 폄훼하는 건 아니다. 구파일방이란 이름은 투전판에서 딸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아무리 구파일방 중에서는 말석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어쨌든 한 지역의 패자를 자처하기엔 부족함이 없을 전력이다. 구파일방에 들었다는 건 그런 뜻이니까.
하지만 그 전력의 강대함도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해야 한다.
만일 해남이 본진을 지키며 쳐들어오는 적에게 항거하는 상황이라면, 부족한 실전 경험을 고려한다 해도 실력의 칠 할은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만한 속도라면, 경공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급격하게 소진될 터. 그 와중에 날아드는 칼날에 대항까지 한다는 건 웬만한 능력으로는 시도조차 어려운 일이다.
‘포위를 뚫는다? 안일한 자들이 보기에는 그렇겠지.’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자면, 저들은 지금 뒤를 쫓고 있는 호가명 무리에게서 달아나는 중이다. 본래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전투는 달아나는 이들의 뒤를 쫓는 추격전이다. 이는 상식 중의 상식.
아무리 단련된 강군이라 해도 적에게 추격당하는 상황에서는 제 실력의 반도 발휘할 수 없다. 저 화산검협이 그 사실을 모를 리는 없으니, 이건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움직임이라 봐야 한다.
호가명을 고민하게 하는 건 바로 이 지점이었다.
“무슨 생각이지? 화산검협?”
거칠 것 없는 기세로 나아가고는 있지만, 이 포위망은 일부에 불과하다. 저들이 뚫어 내야 할 영역은 광동이 아니라, 드넓은 강남이 아니던가?
시작부터 이리 전력을 소모하는 것이 옳은 판단일 리 없다. 속도를 올릴수록, 싸움이 격해질수록, 저들의 위치는 더욱더 확연하게 드러날 터. 위치를 스스로 노출하며 몇 걸음 더 빨리 가는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고민에 잠긴 호가명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만일 다른 이들이 이런 수단을 썼다면 호가명은 그저 적당히 비웃어 준 뒤에 체력을 뺏고 느긋하게 잡아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곳에는 다름 아닌 청명과 임소병이 있다.
청명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이고, 임소병은 아무리 얕잡아 판단해도 그에 비해 모자랄 것이 없는 책사다. 그런 두 사람이 포함된 무리에서 이런 빤한 하수(下手)를 둘 리가 없지 않은가?
“이형문도 돌파당했습니다!”
“이형문…….”
그 순간 호가명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다시 말해 봐라.”
“이, 이형문이…….”
“그 전부터!”
“예?”
“최근에 돌파당한 문파들을 순서대로!”
부관이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취, 취호문, 공령방, 이형문 순입니다.”
그 순간 호가명의 뇌리에 중원 남부의 지도가 그려졌다. 이내 그 위로 그가 배치한 문파들의 위치가 겹쳐졌다.
“동쪽?”
호가명의 낯이 굳었다.
확실하다. 저들의 경로는 장강이 있는 북쪽이 아닌, 북동쪽이다.
‘왜지?’
저들에게 있어 강남은 한시라도 빠르게 탈출해야 할 적지(敵地)다. 그런데 왜 북쪽이 아니라 북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걸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포위망은 더 견고해질 것이고, 더 많은 이들이 저들을 노릴 것이다. 곧 광동의 중소 방파뿐만 아니라, 하오문을 비롯한 사패련도 저들을 노리기 시작할 게 아닌가?
‘비상식적이군.’
호가명은 눈을 반개한 채 생각을 이어 갔다.
적의 포위가 견고해져서 우회하는 것이야 이상할 게 없지만, 사실 지금 저들은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포위망이라도 돌파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먼 곳으로 방향을 잡을 이유가 있겠는가?
‘북동쪽에 뭐가 있지?’
그대로 직선으로 나아간다면…….
‘안회?’
남궁세가가 있는 절강으로 향한다?
아니, 그건 무모하기 짝이 없다. 절강에 도착한다면 남궁세가를 따르는 문파들의 도움을 받을 수야 있겠지만, 그럴 바에는 천우맹의 본단이 있는 쪽으로 향하는 게…….
그 순간 호가명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설마…….”
괴량이 흥미를 보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왜 그러지?”
“아니.”
호가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속도를 높여야겠다.”
“굳이?”
괴량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의문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아무짝에 도움도 안 되는 쓰레기들을 밀어 넣어 사냥감을 지치게 만들고 있는데? 느긋하게 추적하는 것만으로도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괴량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저들로는 절대 화산검협을 막지 못한다. 하지만 막지 못한다는 게 무의미한 건 결코 아니다.
내력을 고갈시키지 못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소모시킬 수는 있고, 검을 무디게 만들 수는 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그저 화산검협을 비롯한 천우맹도들이 비어 버린 그 물그릇을 다시 채우지 못하게 슬슬 압박하며 몰아가는 것뿐.
그것만으로도 필승(必勝)을 거둘 수 있는데 굳이 왜 저들이 충분히 힘이 빠지기 전에 공격해야 한단 말인가?
“버러지들을 사지로 내몬 것에 이제 와 동정심이 생기기라도 한 건 아닐 테고, 천하의 독심나찰이.”
“상황이 바뀌었다. 아니……. 바뀔 수도 있다.”
“……설명은?”
“해 봤자 이해 못 할 거다.”
괴량이 짜증 어린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호가명은 부연하지 않았다. 사실 이건 설명하지 않는 게 아니라 설명하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 역시 제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황당한 건 마찬가지이므로.
“우선은 속도를 높인다.”
“마음대로 하시지요, 군사 나으리.”
괴량은 못마땅한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호가명은 그런 그를 깨끗하게 무시하며 재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만인방도들이 박차를 가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화산검협.’
호가명은 입술을 짓깨물었다. 머릿속이 제멋대로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 * *
“청명아!”
“…….”
“청명아!”
연거푸 부른 후에야 청명이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순간 움찔할 법도 하건만, 백천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외쳤다.
“이쯤에서 한번 쉬어 가야 한다!”
“안 돼.”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야! 낙오하는 이들이 생기고 있다! 이대로는 목적지까지 절반도 도착 못 해!”
청명이 말없이 백천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백천 역시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묵묵히 청명의 눈빛을 마주한 채 버텼다.
그 짧은 대치 끝에 먼저 물러난 건 청명이었다.
“알았다.”
청명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백천이 손을 들어 올렸다.
“모두 멈추십시오. 정비합니다!”
그러자 전력을 다해 달리던 해남의 제자들이 흡사 실 끊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 엎어졌다.
“쿠, 쿨럭!”
“허억! 허억! 허억! 허억!”
“빌……어먹을…….”
평소였다면 다른 이들이 지켜보는 와중에 체면 없이 땅에 드러눕는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명문 해남이라는 이름이 주는 자부심은 결코 작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런 것에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다. 백천의 말대로, 조금만 더 무리했다면 이 중 몇이나 더 낙오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장로들과 금양백은 체면이 있어서인지, 아직 체력이 남아 있어서인지 선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바닥에 주저앉은 이들을 탓하지는 않았다.
“일어나서 좌정해.”
그때, 감정 없는 청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헉거리며 늘어져 있을 시간에 운기해라. 최대한 빠르게 체력을 보충하고 다시 달려야 해. 여력이 남은 이들은 운기하는 이들의 호위를 서. 언제 누가 다시 노려 올지 모르니까.”
해남의 제자들이 이를 악물고 청명을 노려보았다.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들도 안다. 하지만 그럴 힘이 있었다면 애초에 이리 꼴사납게 주저앉아 헐떡거리고 있겠는가.
원망과 힐난 섞인 시선을 받으면서도 청명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어리광 부리지 마.”
“…….”
“너희가 얼마나 힘들든, 얼마나 고통스럽든 적은 고려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좋아하지. 힘드니까 뒈져도 상관없다고 생각되면 그대로 드러누워 있고.”
역정을 내는 목소리도 아니고, 자존심을 긁으며 빈정대는 말투도 아니다. 그저 담담하게 읊는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가슴을 콱 찌르는 듯했다.
“……모두 운기를 해라.”
“예, 장문인.”
물러날 명분을 잡지 못한 이들에게 금양백이 퇴로를 열어 주었다. 금양백의 지시를 받은 이들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좌정했다. 그리고 빠르게 운기에 들어갔다.
“호위해 줘.”
“알았다.”
백천이 빠르게 천우맹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천우맹도들은 중앙에 모여 운기에 들어간 해남의 문도들을 둘러싸고 경계를 시작했다.
청명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 모습을, 백천만이 유심히 보고 있었다. 저 행동은 청명이 초조할 때 무심코 나오는 것이다.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다.
이는 생각 이상으로 해남이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단 뜻일 터.
하지만 이 이상은 방법이 없다.
화산이야 청명의 움직임에 맞추는 훈련을 몇 년 동안 해 왔다지만, 이들은 그런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아무리 백천이라 해도, 청명과 만나자마자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려 했다면 이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들보다 더욱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청명아. 일단은…….”
백천이 뭔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장문대리.”
금양백이 어느새 두 사람에게로 다가와 굳은 낯으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