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1화.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1)
금양백이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또 하나의 제자가 적의 검에 무참히 꿰뚫리고 있었다.
당장 박차고 일어나려 했지만, 그 순간 금양백의 손끝에 둔중한 무게가 실렸다. 아래를 본 금양백이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으…….”
죽은 진관의 몸에 남은 온기가 아직 채 식지도 않았다. 아니, 이제 숨이 끊긴 지 겨우 몇 호흡이 지났을 뿐이다.
“으…… 으아아아아!”
하지만 금양백은 결국 절명한 진관의 몸뚱이를 내팽개치고, 제자들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죽은 이도 중요하지만, 살아 있는 이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더러운 사파 놈들!”
금양백의 거친 검기가 적 둘을 일거에 휩쓸었다.
“크아아악!”
몸이 찢긴 적도가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명문정파인 해남파의 장문인이 뿌리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살기 넘치는 검격이다. 하지만 이곳의 누구도 금양백을 탓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둘이나 되는 이의 목숨을 끊어 냈음에도 금양백의 가슴에 차오르고 있는 것은 흥분도, 껄끄러움도 아닌, 말로 채 다 표현하기 힘들 만큼 커다란 비애였다.
‘이런 것인가?’
죽음은 각오했다.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죽음마저 각오하고 발을 들인 강남이다. 그러니 이제 와 슬픔을 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앞으로는 더 많은 죽음을 겪어야 할 테니까.
그럼에도 밀려드는 비애를 어쩌지 못하는 이유는, 그 죽음을 애도할 여유조차 주지 않는 전장의 비정함 때문이었다.
한없이 가볍고도 하찮다.
본디 죽음이란 언제나 무거운 일이어야 한다. 서글프고 가슴 저미는 일이어야 한다. 하지만 같은 죽음일진대, 이곳에서의 죽음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무게를 지니지 못한다. 전장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그랬다. 그 사실이 금양백을 참을 수 없게 했다.
“악호(岳浩), 괜찮으냐?”
어깨를 꿰뚫린 악호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양백은 그런 제자의 입술이 새파랗게 변해 가는 모습을 포착했다. 금양백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빌어먹을, 독이다! 적의 공격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상처를 입어서는 안 돼!”
고함을 내지르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실로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아닌가.
적의 공격을 허용하면 안 된다니, 세상에 칼에 맞고 싶어서 맞는 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짝에도 의미 없는 지시였다. 하지만 지금 금양백이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아무리 그와 장로들이 애를 써도, 독기를 품고 제자들에게 날아드는 적의 칼날을 모조리 막아 내는 건 불가능하니까.
“죽여라!”
“후미! 후미를 노려!!”
승냥이는 상처 입은 짐승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사파인들은 후미가 흔들리고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더욱 가열하게 후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 막아라!”
“공격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그 공세에 맞서는 해남 장로들의 기세는 이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독이 발렸다고 해서 도가 더 날카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휘두르는 이의 내력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평소처럼만 상대한다면 부상을 당하는 게 더 어려울 정도로 조악한 공격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도의 날에 번들거리는 검은 액체가 독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손도 생각처럼 뻗어지질 않았다.
“크아아아아악!”
“조 장로!”
가슴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무너지는 장로의 모습에, 금양백이 처절한 비명을 터트렸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지금 공격하는 이들의 실력은 기껏해야 이류에서 삼류다. 그리고 조금 전 피를 뿌린 이는 다름 아닌 구파일방 중 하나인 해남의 장로다.
평소 같았다면 몇이 아니라 열이 넘게 달려들어도 결코 이쪽이 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금양백이 외친 경고와, 제멋대로 뒤얽혀 돌아가는 전장의 상황, 그리고 사방에서 밀려오는 악의가 실력과 무관한 결과를 빚어 낸 것이다.
‘내가 무슨 짓을…….’
차라리 몰랐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금양백은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알아챘으나, 이미 수습하기는 늦어 버린 뒤였다.
“아아아아아아악!”
또 한 번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해남의 문도들은 연이어 적의 공격에 베이고 꿰뚫렸다. 속수무책이었다. 온몸을 덮쳐오는 혼란과 좌절에 금양백이 거의 넋을 놓아 버린 바로 그때였다.
“하아아아아아압!”
머리 위에서 거친 포효가 울려 퍼진다 싶더니, 이내 그의 시야를 뒤덮으며 붉은 꽃잎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크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기세를 올리며 달려들던 적도들이 그 꽃잎 폭풍에 휩쓸리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몸에 수십 개씩 구멍이 뚫린 이들은 고통에 겨워 경련을 일으키다 이내 털썩털썩 엎어졌다.
금양백은 제 앞에 내려서는 이의 등을 멍하니 응시했다.
“자, 장문대…….”
“장문인!”
백천이 굳은 얼굴로 금양백을 돌아보며 외쳤다. 선두에 있던 그가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가셔야 합니다!”
“장문대리?”
“선두와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낙오된다면 여기 있는 모두가 죽습니다!”
그 격앙된 목소리가 금양백에게 현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이미 그가 있는 최후미와 본대 사이의 거리가 벌어진 뒤다. 이대로 조금만 벌어진다면 저 사이를 사파가 채우게 될 것이고, 그럼 그들이 맞이할 미래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 안 돼.’
아무리 제대로 된 전장을 겪어 보는 게 처음이라 해도, 그는 해남의 장문인이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를 정도로 우둔하지 않았다.
“모두 달려라! 앞선 이들에게 따라붙어야 한다!”
금양백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여 명령했다. 저지른 실수를 후회하는 것도, 죽어 간 이들을 애도하는 것도 우선은 살고 나서의 일이다.
힘겹게 싸우던 해남의 제자들이 답했다.
“예! 장문인!”
“장로들은 전력을 다해 제자들을 보호해라!”
“예!”
그때, 몇몇 제자들이 땅에 널브러진 채 식어 가는 문도들의 시신을 둘러업으려 하는 광경이 보였다. 금양백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깨물었다. 그러다 이내 냉정하게 외쳤다.
“그만둬라!”
“자, 장문인.”
그는 자신을 돌아보는 제자들을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았다.
제자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누가 이 먼 강남 땅에 가족과도 같았던 이의 시신을 버려두고 싶겠는가? 게다가 남겨진 시신이 악에 받친 사파 놈들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시신을 가장 수습하고 싶은 사람은 오히려 금양백이다. 고향인 해남 땅까지 데려갈 수는 없어도, 적어도 양지바른 곳에라도 묻어 주고 싶다.
하지만 과욕이다. 결코 부려서는 안 될 욕심이었다.
“죽은 이에게 신경 쓰지 마라! 산 사람부터 살아야 한다!”
“장문인! 어찌 그런 말씀을……!”
“닥치지 못할까!”
금양백이 노호성을 내지르자 제자들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여전히 승복하는 눈빛은 아니었지만, 항명할 엄두까진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말은 나중에 한다! 가라! 어서!”
“……예.”
미련이 남는지 몇 번이고 돌아보면서도, 그들은 결국 시신들을 둔 채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남겨진 시신들 사이에는 금양백의 품에서 죽어 간 진관도 있었다.
“제기랄!”
제자들 중 누군가가 거칠게 욕설을 했다. 그 분노가 이 상황을 향한 것인지, 금양백을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뒤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제자들을 몰아내듯 앞서 보낸 금양백은 그저 주먹을 움켜쥔 채 차게 식어 가는 문도들의 시신을 보았다.
‘용서해라.’
그 인사를 끝으로, 그 역시 눈물을 거칠게 훔치며 달렸다.
여기서 어떤 행위를 한들, 그것은 그저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숨이 끊긴 이들에게는 어떠한 위로도 의미가 없을 테니까.
가슴이 터질 듯 밀려드는 울화를 풀어 낼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오오오오오오오오!”
속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기합과 함께 금양백의 몸이 한 줄기 빛살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그는 앞을 막아서려 달려드는 사파인의 몸뚱이에 그대로 검을 쑤셔 박았다.
콰앙!
꿰뚫린 사파인의 몸은 포탄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산산조각이 나 비산했다. 뜨뜻하고 비릿한 피를 뒤집어쓰며 금양백은 상처 입은 범처럼 포효했다.
그 때문이다. 그의 실수 때문이다.
그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조금만 더 침착했더라면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이들이다. 어째서 그들이 이곳에서 이리 처참한 꼴로 눈감아야 했단 말인가?
‘이런 게 아니었다!’
가슴속에선 피눈물이 쏟아졌다.
그가 생각한 이들의 죽음은 이보다 더 비장해야 했고, 더 거룩해야 했다. 달아나던 노루가 이리에게 발목이 물려 끝내 숨이 끊어지는 것 같은 이런 비참한 말로는 아니어야 했다.
한데 그가 그리 만들었다.
그의 무능이 저들에게 무가치한 죽음을 선사했다. 해남의 장문인이 무능하기 때문에!
어찌 이토록 무겁고 버거우며 힘겨울 수 있단 말인가? 어깨 위에 누군가의 죽음을 짊어진다는 게 이토록이나 고통스러운 일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모조리!”
금양백은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독도(毒刀)를 휘둘러 오는 사파 놈들을 향해 거친 파도와 같은 검기를 쏟아 냈다.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이 개만도 못한 놈들!”
저들이 그의 제자를 앗아 갔다. 평생을 함께해 온 그의 사형제를 비명에 죽게 했다.
“죽어라아아아아아!”
“장문인.”
“이 씹어 죽일…….”
“장문인!”
그때 내력이 실린 거친 고함이 금양백의 귀를 파고들었다.
태풍에 일어난 해일처럼 검기를 쏟던 금양백이 금방이라도 피를 쏟을 듯 충혈된 눈으로 백천을 획 돌아보았다.
저자가 뭘 아는가?
화산의 장문대리가, 자식과 같은 제자, 형제와 같은 사형제를 잃은 마음을 짐작이나 하겠는가? 젊디젊은 그가,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많이 남은 그가 이제 잃을 것밖에 남지 않은 이의 심정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저 방자한 주둥아리를 놀려 대어 위로라도 할 셈이라면……!
“같은 실수를 또 범하실 생각이십니까?”
그 순간, 백천의 싸늘한 목소리가 차가운 비수처럼 금양백의 분노를 잘라 내 버렸다.
“장문인께서 이성을 잃으시면 더 많은 이들이 죽습니다!”
서서히 이성이 돌아왔다. 그러자 금양백의 얼굴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 긴박한 전장에 어울리지 않게 멍하니 백천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실소를 흘렸다.
백천의 말이 맞다. 너무도 맞는 말이다. 그렇기에 실감해야 했다.
‘나는 분노할 자유조차 없구나.’
아니, 금양백에게 분노할 자유가 없는 게 아니다. ‘장문’이라는 호칭을 쓰는 이에게 분노할 자유가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 입을 뗐지만, 백천이 말을 꺼낸 게 먼저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상황을 늦게 파악해 지원이 늦었습니다.”
“……장문대리.”
“하지만 장문인! 지금 장문인께서 무엇을 하셔야 하는지 잊지 말아 주십시오.”
금양백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각오를 단단히 굳히십시오.”
그리고 덧붙였다.
“이제……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새삼스럽게도 깨닫고 말았다.
그들은 이미 지옥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