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0화. 지겹도록 볼 광경이니까. (4)
갑작스레 닥친 일에는 누구나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무리 침착한 사람이라도 당황한 상태로는 완벽한 판단을 하기 힘들다.
“뚜, 뚫립니다!”
“못 막습니다, 방주!”
“빌어먹을!”
청명을 맞닥뜨린 이들이 그러했다. 올 거란 걸 알고 있었음에도 앞에서 마주친 순간엔 머릿속이 희게 질리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노력과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쥐가 아무리 침착하게 노력한다 해도 범의 숨통을 끊을 순 없지 않겠는가.
“으아아아아아악!”
그리고 청명은 상대가 쥐에 불과하다 해서 자비를 베푸는 심성 착한 범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적은 무엇이든 일단 물고 보는 악호(惡虎)에 가깝다.
그 악호의 기세에 눌린 적들은 대부분 당황하여 우왕좌왕하고 이성을 잃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영원한 것은 없다.
일방적인 학살이 길게 이어지자, 포위망을 형성한 이들 중에서도 다른 판단을 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후욱! 후욱! 후욱!”
해남파의 이대제자인 양포(楊布)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주, 죽을 것 같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눈앞이 몇 번이나 아뜩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지금 전력으로 달리고 있다지만, 그는 명문 해남의 이대제자다. 이 정도 달린 것으로 이토록 힘든 것은 말이 안 되었다. 심지어 중독된 것도 아니고, 검을 숱하게 휘둘러 체력을 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양포의 체력은 급속도로 고갈되고 있었다.
‘원래 이런 건가?’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의 체력을 갉아먹는 듯했다.
죽어 가는 이들이 내지르는 끔찍한 단말마, 몸뚱이가 처참히 잘려 쓰러진 이의 부릅뜬 눈, 도저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지독한 피비린내,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원독에 찬 저주들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잠시만 정신을 빼앗기면 그 역시 저기 쓰러져 있는 이들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는 압박감과 공포!
이 모든 걸 견디며 달리자니, 체력이 단순히 육신의 상태에 달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양포의 힘은 급속도로 바닥을 드러내었다.
‘나, 나만 이런 것인가?’
양포가 시선을 옆으로 돌린다.
그러자 옆에서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달리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나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가 버릴 듯 위태했다. 저들 역시 그와 처지가 다르지 않은 듯했다.
양포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깨물었다.
우는소리를 할 수는 없다. 이곳은 전장이니까. 그가 낙오한다면 그 혼자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다른 이들도 죽을 둥 살 둥 버티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어떻게든…….’
그는 얼굴로 줄줄 쏟아져 내리는 땀을 거칠게 훔쳤다. 문득 시선을 내리니 땅에 쓰러진 적의 시신이 보였다.
‘큭!’
피투성이로 절명한 모습에, 양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 시신을 뛰어넘었다. 본디 죽은 이의 시신을 타 넘는다는 건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예의를 차릴 여유 따윈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입을 벌린 채 쓰러져 있던 시신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제 위를 타 넘는 양포의 하체를 향해 섬전처럼 검을 찔러 넣었다.
콰득!
“아악!”
달리던 양포의 몸이 그대로 나뒹굴었다.
“양포야!”
“이 개자식이!”
양포의 뒤를 따라 달리던 해남의 제자들이 분노하며, 검을 찌른 이의 몸에 득달같이 애병을 콱 박아 넣었다.
“끄륵…….”
삽시간에 고슴도치가 된 이는 그 자리에서 절명해 버렸다. 애병을 뽑은 이들이 우르르 양포를 향해 달려갔다.
“양포야!”
“괜찮으냐?”
“괘, 괜찮습…….”
“상처가 깊습니다!”
완전히 관통당한 허벅지에선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사형제가 큰 부상을 입자 다른 이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우왕좌왕했다.
그때 당소소가 쏜살같이 달려와 주변에 선 이들을 밀쳐 냈다.
타다다닥!
그녀는 양포의 허벅지에 빠르게 점혈을 해 출혈을 막았다.
“의, 의원이십니까……!”
모두가 내심 안도한 순간, 그녀는 벼락처럼 양포의 멱살을 움켜잡고 그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모두가 크게 당황했다.
“아니, 의원님! 뭐 하시는…….”
“붕대라도 감아야죠!”
하지만 당소소는 주변의 반응이나 원성일랑 깨끗하게 무시하고 양포를 앞으로 거세게 떠밀었다.
“달려요.”
양포는 당황하여 그런 그녀를 돌아봤다. 하지만 당소소의 얼굴은 싸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달리든가, 아니면 죽든가.”
“의원님! 하체에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달…….”
그 순간 당소소의 얼굴이 섬뜩하게 일그러졌다.
“그럼 당신들이 여기 남아 지키면서 같이 죽을 거야?”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모두가 새삼 깨달은 것이다. 이곳이 어디인지, 그들이 어떤 상황에 내몰려 있는지.
돌아보니 원래 뒤를 따라오던 이들은 이미 그들을 지나쳐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달려! 죽고 싶지 않으면!”
차게 일갈한 당소소가 그들을 남겨둔 채 앞으로 짓쳐 달려 나갔다.
“제길!”
몇몇이 이를 악물며 달려들어 양포의 팔을 제 어깨에 둘렀다.
“모두 달려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예!”
“양포야! 힘든 건 알고 있지만, 지금은 힘을 내야 한다.”
“아, 알겠습니다, 사형!”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사파라고 해서 머리가 빈 허수아비나 헝겊 인형은 아니다. 아니, 사실 그들은 제 목숨을 지키고 적을 노리는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정파보다 더욱 영리하다.
물러서서 달아난다면 호가명의 손에 죽는다. 그들이 달아나는 모습을 본 이가 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는다면, 그 일은 반드시 호가명의 귀에 들어갈 테니까.
그렇다고 용맹하게 막아서면 청명의 검에 죽는다.
둘 중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던 그들이 택한 길은 아주 간단했다. 상대할 수 없는 이가 아니라 상대할 수 있는 이들만을 적극적으로 노리는 것.
표적이 된 것은 당연히 해남이었다.
“카하아아아앗!”
카가아앙!
“큭!”
이자양의 얼굴이 처참히 일그러졌다.
‘이 새끼들이!’
검을 맞대는 일이 늘었다. 이 개 같은 놈들은 선두에 있는 청명을 무시하고 해남을 향해서만 공격을 해 온다.
쉬운 일일 것이다. 무복만으로도 신분을 구분해 낼 수 있을 테니까.
‘우리를 뭐로 보고……!’
이자양은 분한 마음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바다 빛깔의 연푸른 무복. 이는 해남의 바다를 표현한 옷이다. 이 무복은 해남의 상징이자 그의 오랜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그 무복이 이 전장에서는 ‘약점’의 상징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 사실이 미치도록 분했다.
“이 개 같은 놈이!”
흥분한 이자양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갑자기 그를 향해 세 개의 검이 날아들었다. 흥분한 기색을 보이며 흐트러지자 적들이 귀신같이 그 틈을 노려 온 것이다.
위기를 직감한 이자양이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쇄액! 쇄애애액!
하지만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십여 개의 검기가 이자양을 향해 쇄도하던 사파인들을 꼬치 꿰듯 꿰뚫어 버렸다.
이자양이 놀라 고개를 돌리자, 이쪽을 슬쩍 일별한 조걸이 즉각 고개를 돌려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저…….”
“자양! 괜찮으냐?”
“괘, 괜찮습니다. 사형!”
곽환소에게 급히 대답한 이자양은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살 수 있었을까?’
아니, 아마 죽었을 것이다. 그의 실력으로는 날아드는 세 개의 검을 동시에 막을 능력이 없었다. 죽지 않았더라도 몸 어느 한 부분을 내주는 결말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채 짐 덩어리로 전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섬뜩한 공격을 검 한 번 슬쩍 날린 것만으로 모조리 무효화시켰다. 아니, 심지어는 공격한 이들의 숨통까지 끊어 놓았다.
이런 건,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조걸이라고 했나?’
까마득한 격차를 느꼈다. 그런데 심지어 그 격차를 보여 준 이가 화산검협 청명도, 화산정검 백천도 아니고, 심지어는 남궁세가의 남궁도위도 아니다. 화산의 삼대제자 조걸이다.
이자양은 해남의 일대제자다.
물론 이번 해남 일대제자들의 나이가 과히 어린 축에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걸과 그의 나이 차이가 적어도 열다섯 살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어린 화산의 삼대제자가 이자양은 감히 따라갈 수도 없는 무위를 보여 주고 있다. 그게 방금 지옥문에 발을 걸쳤다가 돌아왔다는 사실보다 더욱 이자양을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그래도 이자양은 해남에선 나름 실력이 높은…….
‘잠깐?’
그는 해남에서 실력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순간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
심지어 그가 있는 곳에는 선두의 청명을 비롯하여 화산의 제자들이 좌우로 포진해 있다. 적의 방어선을 꿰뚫는 선봉. 어느 곳보다 위험해야 할 자리. 하지만 지금 이곳은 역설적으로 이 무리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보다 실력이 부족한 이들이 모여 있는 뒤쪽은? 선두를 노릴 엄두를 못 내는 사파 놈들이 악착같이 달려들고 있을 뒤쪽은 어찌 되고 있단 말인가?
이자양이 순간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아아아아아악!”
그 순간, 눈보다 귀로 상황이 먼저 쏟아졌다. 익숙한 목소리가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 소리였다.
“진관(眞觀)!”
이자양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대제자 진관이 옆구리부터 가슴까지 이어지는 긴 검상을 입고 쓰러지는 광경이 보였다.
친형제보다 더욱 깊은 관계인 사형제가 쓰러지고 있음에도 그를 향해 손을 뻗는 이는 없었다.
달려드는 이들을 막아 내느라 주변의 모두가 전력을 쏟고 있어서 누군가가 쓰러져도 고개조차 돌릴 수 없는 것이다.
“노오오오오오옴!”
그 순간 해남 장문인 금양백이 노호성을 내지르며 진관을 벤 사파인에게 비호처럼 달려들었다. 금양백의 일격에 목이 날아간 사파인은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쓰러졌다.
“관아!”
금양백이 진관의 몸을 움켜잡았다.
“관아! 괜찮으냐?”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
제자의 푸른색 무복은 이미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온통 붉게 물든 후였다. 사람이 이렇게 급하게 피를 쏟아 내고 있는데, 괜찮을 리 있겠는가?
하지만 염려하는 사람이 또 무슨 말을 달리 할 수 있겠는가.
“쿠, 쿨럭!”
거센 기침과 함께 진관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꾸역꾸역 밀려 나왔다. 옆구리를 베이며 내장이 완전히 상해 버린 모양이었다.
“의, 의술! 누가 의술을 아는 사람 없느냐!”
“저, 저기 화산 분이……!”
“당장 모시고 와라! 당장!”
“자, 장문…….”
그때 아래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금양백이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그래! 관아, 조금만 버티거라! 곧 의원이…….”
“추, 춥…….”
“관아! 관아!”
진관의 목이 옆으로 툭 떨어졌다.
그런 진관을 반쯤 안아 든 금양백의 손이 덜덜 떨렸다. 기분 탓인지, 정말 그런 것인지 끌어안은 진관의 몸이 싸늘히 식어 가는 게 느껴졌다.
“진관!”
“으아아아아아! 이 개자식들아!”
사패련의 침공 이후, 사람이 죽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제자가, 사형제가 죽어 가는 광경을 똑똑히 봐 버린 충격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금양백의 두 눈에 핏발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가 노호성을 내지르려는 그 찰나.
“아아아아악!”
또 연이어 비명이 울려 퍼졌다. 금양백의 고개가 급하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