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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89화 (1,290/1,567)

1289화. 지겹도록 볼 광경이니까. (3)

전쟁에는 익숙하다. 당연히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에도 익숙하다.

자신에 대한 그 믿음이 이상한 건 아니었다. 딱히 틀리지도 않았다.

평화의 시대였다. 마교와의 전쟁 이후로 백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강호는 그저 평화로웠다.

오직 강남만이, 그중에서도 만인방이 종횡했던 강남의 남단만이 전화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니 현 강호에서 이들만큼 많은 전쟁을 겪어 보고, 많은 피를 본 이들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이 가졌던 확신은 근거가 분명히 존재하는 셈이었다.

다만, 이들이 놓친 것은 하나뿐이다.

그들이 겪은 전쟁과 청명이 겪은 전쟁은 그 결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없으니, 화산검협의 존재를 이해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흐…….”

처절한 비명과 연신 들려왔다.

누군가는 악에 받쳐 고함을 질러 대었다. 정확히 뭐라고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지만, 그 의미만큼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피하라.

당장 이 자리에서 달아나야 한다고, 그에게 달려들고 있는 저 짐승에게 등을 보이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달려야 한다고.

하지만 사형문(蛇形門)의 문도인 조남천(趙南天)은 그 자리에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다. 움직이지 못한 것이다.

머리는 다리에게 당장 뒤로 돌아 달리라고 필사적으로 명을 내리고 있지만, 그의 발은 아교라도 발라 붙인 듯 땅에서 조금도 떨어지질 않았다.

코앞에서 뱀을 본 쥐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리곤 한다. 눈앞에서 지금껏 만난 적 없던 포식자를 대면한 조남천의 육신은 그의 명을 듣기를 거부하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차이가 있다면 뱀은 굳어 버린 쥐를 느긋하게 삼키지만, 지금 저 마귀는 게걸스럽게 그를 노려 오고 있다는 것. 그 차이였다.

파아아아아앗!

서걱!

피로 물든 검이 단숨에 조남천의 목을 쳐 날렸다. 그 몸이 쓰러지기까지 기다려 줄 여유조차 없는지, 연이어 그 가슴을 내리밟은 청명은 피를 뿜어내는 조남천의 목 위를 타 넘고 앞으로 돌진했다.

먹이를 노리는 범처럼. 아니, 수풀 사이로 빠르게 쇄도하는 뱀처럼.

그는 수많은 사파인들의 피를 모조리 뒤집어쓰며 혈인에 가까워 보였다. 뜨거운 피에 젖어 온통 붉은 가운데 오로지 검은 두 눈동자만 서늘한 한기를 흘리고 있었다. 보는 이마저 심장이 절로 멎을 듯 차가운 눈빛이었다.

“마, 막아!”

“달아나라!”

“아……. 안 돼!”

정돈되지 않은, 제멋대로 뒤섞인 반응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혼돈 그 자체였다.

이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천라지망(天羅之罔). 말은 거창하지만, 결국 넓은 구역에 촘촘하게 배치한 포위망을 의미한다.

다수의 인원이 달아나는 소수를 몰아서 잡거나, 악을 쓰며 저항하는 이를 완전하게 척살하는 데 사용하는 기본적인 전법이다.

강남의 사파인들은 지금껏 천라지망을 펼쳐 본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들이 겪은 것은 거의 대동소이했다.

어떻게든 몸을 숨기고 달아나려 하거나 진을 치며 최후까지 저항하는 이의 발악을 느긋하게 지켜보는 것. 그리고 감히 만인방에 대항하기를 택한 어리석은 이를 비웃어 주는 것. 그거면 되었다.

이번에도 별다를 것 없을 것이라 마음 편히 여겼던 이들은 돌연 근본적인 의문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왜!”

누군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저, 저 새끼가 왜 여기에 있어! 왜에에에에!”

콰앙!

그 순간 누군가의 상반신이 통째로 찢겨 뒤로 튕겨 나갔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고 육편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그걸 뒤집어쓰며 공포에 질린 이들은 죽어 간 이가 외쳤던 의문을 똑같이 품었다.

화산검협. 만인방의 적사대를 몰살시키고, 화산을 노렸던 만인방의 무력대를 고혼으로 만든 이. 그에 그치지 않고 장강에서 만인방의 방주 장일소와 정면으로 맞붙어 비등한 승부를 벌였다고 전해지는 이.

천하가 인정하는 만인방의 숙적이자, 저 장일소의 대척에 서 있는 명문 화산의 신진 고수.

어떤 것은 입장과 관점에 따라 정의가 바뀌기도 한다. 청명, 그의 이름은 정파에서는 호협(豪俠)의 상징이다. 하지만 사파의 입장에서는 듣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공포다.

그런데 그자가, 저 장강에서 장일소와 대치하고 있어야 할 자가 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나 검을 휘두르고 있는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이들이 저 화산검협을 상대해야 한단 말인가?

“도, 도망쳐!”

“으아아아아아아아!”

전의(戰意) 같은 것을 논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여우굴인 줄 알고 에워쌌는데, 그 안에서 갑자기 집채만 한 범이 튀어나왔다고 생각해 보라. 아무리 노련한 사냥꾼이라 할지라도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데 이들은 노련한 사냥꾼도 아니고, 청명은 감히 범 따위를 가져다 댈 수도 없을 만큼 포악한 짐승이다. 그런 와중에 누가 감히 그 앞을 막아서려 하겠는가?

“으아아아아아아아!”

붕괴는 필연적이었다.

제대로 된 사냥꾼이 되지 못한 얼치기들은 달려드는 짐승을 피해 등을 보이고 달아났다.

일견 현명한 판단이지만, 그들이 모르는 게 있었다. 사냥꾼이 짐승에게 등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용감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은 등을 보인 이를 버려두기도 하지만, 짐승은 등을 보인 적을 반드시 물어 죽인다. 언젠가 다시 나를 노릴지 모르는 적을 살려 두지 않는 것, 그게 야생을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청명은 전장이라는 지옥에서 자신을 스스로 완성했다. 그의 사고방식 역시 야생의 짐승과 그리 다를 것 없었다.

입으로는 도경을 외고, 머리로는 협(俠)과 자비를 논할지 모르나, 그의 검만은 세상 그 어떤 짐승의 송곳니보다 날카롭게 등을 보인 이들을 물어뜯는다.

콰득!

견갑골을 사선으로 뚫고 들어간 검날이 심장에 틀어박혔다. 그 고통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비틀린 검은 내부를 단숨에 박살 내었다. 이어, 맹렬한 기세로 어깨까지 끊으며 위로 솟구쳤다.

“끄어…….”

쾅!

타 넘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쓰러지는 이를 그대로 어깨로 들이받아 날려 버린 청명은 맹수처럼 무시무시한 안광을 쏟으며 앞으로, 또 앞으로 돌진했다.

막아 낼 수 없다. 애초에 불가능하다.

한때 청명을 수식했던 천하제일 후기지수라는 호칭도 이제는 사어(死語)가 되어 버렸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모두 한데 똘똘 뭉쳐 대항한다 해도 청명이라는 검수를 막아 낼 수 있으리라 자신할 수 없었다. 천하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절대고수와 강남 남단의 중소 문파의 실력 사이에는 최소한 그 정도의 격차가 존재한다.

그런데 이 포위망은 애초에 청명 같은 이를 막기 위해서 펼치던 것도 아니다.

도망치려 하는 이의 흔적을 결코 놓치지 않기 위해 점점이 분산해 놓은 배치로는 절대 청명의 발을 묶어 놓을 수 없다.

그리고 청명은 그 점을 정확하게 노렸다.

머리로 이해했든, 아니면 본능으로 파악했든, 지금 청명의 공세는 이 어설픈 그물망을 단번에 찢어발기기에 충분했다.

검으로 갈라 낸 그물의 틈을 손톱과 이로 물어 단번에 벌려 버리는 것만 같다.

“히이이이익!”

청명이 지척으로 달려오자 이를 본 무사 하나가 제 머리를 감싸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 순간 할 수 있는 건 차라리 고통 없이 죽을 수 있게 되길 비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눈을 질끈 감은 지 조금 됐음에도 고통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슬며시 눈을 뜨자, 이미 그를 지나쳐 저 앞쪽으로 달려가 검기를 뿌리는 청명의 모습이 보였다.

“사, 살았…….”

무한한 안도가 가슴속에 번졌다. 하지만 그때였다.

스륵.

제비가 풀 위를 스치며 나는 듯한 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본능적인 섬뜩함에 돌아보자 어느새 지척까지 도달한 웬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새하얀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눈빛은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게 한없이 고요하다.

‘누구…….’

그 순간, 여인의 무복 가슴께에 새겨진 매화 문양과 그 손에 들린 검이 보였다. 검 끝에선 피가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사내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사락.

비단 자락이 허공에 펄럭이는 것 같은 미약한 파공음이 울렸다.

그의 동시에 사내의 목에 화끈한 통증이 번지기 시작했다.

“어…….”

무심해 보이는 여인은 그런 그를 일별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바람처럼 곁을 스쳐 앞으로 달려 나갔다.

몸뚱이가 천천히 허물어졌다. 그리고 이내 그곳으로 바다의 빛깔을 닮은 푸른 무복 차림의 무리가 거칠게 돌진해 왔다.

“달려라!”

그 푸른 무리 속에서 백천의 고함이 천둥처럼 터져 나왔다.

청명이 거침없이 꿰뚫어 버리면 오검이 그 상처를 벌리고, 그 틈을 향해 해남이 돌진한다.

‘보호’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과격하고 조악한 방식이지만, 그 방식이 더없이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마, 막아!”

송곳처럼 꿰뚫고 지나가 버린 청명이 준 공포에 넋을 놓았던 이들은 해남의 무리를 보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그들이 몸을 제대로 움직이기도 전에 송곳 같은 검기가 쏘아져 왔다.

쇄애애애애액!

콰득! 콰득! 콰득! 콰득!

일 검에 다섯이 목이 꿰뚫린 채 절명했다.

“으라아아!”

빛을 가르는 듯한 쾌검(分光快劍).

일체의 낭비 없이 상대의 급소를 향해서만 날려 대는, 사파보다 더욱 사파에 가까운 실전적인 검. 이제는 조걸의 성명절기와도 같은 쾌검이었다.

단숨에 다섯을 고혼으로 만든 조걸은 그 힘 그대로 앞으로 짓쳐 달려 나갔다.

파앗!

그 뒤를 따르는 윤종이 조걸의 비어 있는 옆구리를 순간적으로 채웠다. 혹여 숨이 끊어지지 않은 적이 옆을 노려 오더라도 언제든 대처할 수 있도록.

두 사람의 전신도 이미 피로 물든 지 오래였다.

“윤종. 걸이는 내버려 두고 뒤쪽을 도와라! 이제부터 놈들이 뒤를 노려 올 거다!”

“예, 사숙!”

“이설이는 위치를 뒤쪽으로 조정해라! 너무 빠르다!”

“네.”

유이설은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달려가던 속도를 살짝 늦추었다.

“그대로 달려!”

백천의 신속한 지시하에 흐트러진 진형을 수습한 그들은 속도를 더더욱 올렸다.

이 순간에도 곽환소는 필사적으로, 말 그대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청명에게 따라붙고 있었다. 백천은 이를 확인하고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모조리 돌파한다. 그대로 깨부숴 버려!”

“예!”

해남의 제자들은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도록 그저 달리고 또 달리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어느새 자신들 역시 백천의 저 목소리에 있는 힘껏 대답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청명이라는 첨단(尖端)과 백천이라는 중심으로 뭉쳐 든 이들은 중추에 틀어박히는 쐐기처럼 강남 땅을 그렇게 꿰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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