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8화. 지겹도록 볼 광경이니까. (2)
“빌어먹을. 소귀문(小鬼門)이 당했다!”
“소귀문이? 거기 인원만 백이 넘을 텐데, 일각을 못 버텼다고?”
“일각은 무슨 일각이야! 반 각도 못 버틴 거지!”
“제기랄! 그럼 지금 어디에 있다는 거야?”
“지척이다! 지척까지 왔어!”
야차방 방주 장천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심지어 이곳엔 아직 적이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대군이 휩쓸고 지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난리법석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포위망의 기본은 적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도록 완벽한 배치를 갖추는 것. 그걸 위해서는 각각 배치된 지역 간의 의사소통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의사소통을 위해 마련해 놓은 연락망에서 끊임없이 비보가 전해지고 있다. 이는, 앞서 구축된 포위망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돌파당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니 난리가 나지 않으면 더 이상하지 않은가?
“고, 곧 도착하는 모양입니다, 방주님!”
“벌써 여기까지? 앞에 있던 놈들은 다 어떻게 된 거냐?”
“그야 뻔하잖습니까…….”
“이, 이런…….”
장천기는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분명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상황이 평온했다. 면식이 있던 다른 사파의 수장들과 적당히 인사를 나눌 만큼의 여유도 있었다.
안일한 게 아니었냐고? 천만에.
물론 야차방은 광동에서는 나름 이름이 알려진 사파다. 그리고 저 만인방이 지배한 광동에서도 명맥을 보존해 왔다.
하지만 그게 야차방이 실력이 있는 문파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만인방이 슬슬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할 때 어설프게 대항하지 않고 재빨리 납작 엎드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설적으로, 그들은 하찮은 삼류 문파에 불과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실력이 있는 문파라면 만인방에 흡수당하거나 제거당했겠지만, 야차방은 만인방이 굳이 손을 쓸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그러니 대충 만인방이 시키는 일이나 하는, 말 잘 듣는 개 역할을 자처하기만 해도 현판 정도는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제대로 된 임무 같은 게 떨어지겠는가?
호가명 역시 이런 사실을 아주 잘 알았고, 그들을 동원해서 내리는 명령이라고 해 봐야 머릿수나 채우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이 할 일은 적당히 호가명이 지시한 장소로 가서 배에 힘이나 주고 있다가, 만인방이 이룩해 온 승리의 기쁨을 함께 만끽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다가 운 좋게 도망치는 적도 잔당의 숨통이라도 끊을 기회가 있다면 더 좋고.
지금껏 야차방에게 주어진 임무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별다를 게 없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장천기가 예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
“해남 놈들이 이렇게 강하단 말이냐? 아무리 상대가 구파일방이라 해도, 소귀문이면 우리와는 비교되지 않게 강한 곳인데!”
“그,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해남 놈들이랑 싸워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바른말로, 해남과만 싸워 보지 않은 게 아니다.
그들은 살면서 구파일방쯤 되는 명문 정파와 손을 섞어 본 적이 없다. 그랬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테니까.
“빌어먹을……. 이렇게까지 강하면 저놈들이 해남도 그 섬 구석에서 지금까지 버티고만 있었겠냐고! 미친 것도 아니고!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이야?”
“방주님.”
부방주가 흥분한 장천기를 만류하며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다니?”
“이대로 있어 봐야 개죽음밖에 더 당합니까? 소귀문도 당했다는데.”
“뭐……?”
“차라리 그냥…….”
장천기가 바짝 마른 입술을 연신 혀로 축였다. 뒷말을 대충 흐리기는 했지만, 부방주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망설이기는 했지만, 사실 그의 결정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 안 된다.”
“방주!”
“난 차라리 곱게 죽겠다.”
장천기가 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호가명의 지시를 어기고 전선에서 이탈했을 경우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물론 삶을 한시라도 더 이어 나가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문제다. 장천기 역시 단 하루라도 더 살 방법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 결과 맞이해야 할 ‘죽음’이 동일한 경우에나 고려할 일이다. 적의 칼에 맞아 죽는 죽음과 저 호가명의 보복을 동일시할 멍청이는 이미 모두 죽어 광동 땅에 없다. 살아 있는 이들은 모두 그 보복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깨달았다.
그런 광경을 지긋지긋할 정도로 봐 온 장천기에게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 없었다. 제 혀를 물 용기가 없는 이라면 이곳을 지킬 수밖에.
“호가명이 명을 잘못 내린 것일 수도 있잖습니까!”
“이 미친놈아!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명을 잘못 내려!”
“하지만 이건 그냥 죽으라는 말로밖엔…….”
“그 말이겠지.”
“예?”
“그 말이라고! 귀가 막혔느냐!”
장천기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호가명이 상황을 잘못 파악해 실수를 저지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설령 그런 일이 벌어졌다 해도 제멋대로 명을 무시한 이를 용서할 사람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죽고 싶지 않다고……. 나도 죽고 싶지 않아. 그런데 도망가면 더 비참하게 죽는다. 어쩌라는 거냐…….”
장천기는 주변에서 듣고 있는 사람들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이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삼 년 전에 강북으로 건너가 버릴 것을, 뭐 하자고 이곳에 남아서…….”
“바, 방주.”
원래 뒤에 이어질 말은 ‘듣는 귀가 있으니 목소리를 낮추십시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결국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 말을 채 뱉기도 전에 저 멀리에서 희미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순간 선두 쪽에 위치한 장천기를 비롯해, 몇몇 이들의 시선이 격하게 앞쪽으로 향했다.
모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잘못 들었는지 의심해 보려는 찰나, 다시 한번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 더 선명하게.
“오, 온다…….”
누군가가 신음하듯 말했다.
떨어져 버린 사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 몇몇 문주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겁먹지 마라! 놈들이 아무리 천하의 해남파라 해도 여기는 광동이다. 군사께서 준비를 해 놓지 않으셨을 리가 없다.”
“그래! 해남파 따위 만인방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물론 그 말을 모두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호가명이 정말로 저들을 잡을 준비를 해 둔 것이라면, 어째서 앞쪽에 있던 문파들이 이리도 빠르게 당했는지. 그리고 그 만인방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해남파가 어떻게 이 광동까지 나타났는지. 무엇보다, 문주들의 목소리가 왜 점점 위치를 들킬까 봐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잦아드는지 설명되질 않는다.
하지만 이곳에선 그런 의문 같은 건 아무 의미도 없다. 설령 입에 올린다 해도 대답해 줄 사람 따윈 없을 것이다.
모두 그저 치솟는 불안을 억누르며 떨리는 시선으로 전방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들이 맞닥뜨린 건 적의 살기 가득 찬 모습이 아니었다. 흔들리던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질려 혼비백산 도망쳐 오는 사파인들이었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악!”
“살려 줘어어어어어!”
“저, 저리 가! 저리 가라고오오오!”
난생처음 보는 광경을 마주하자 순간적으로 몸이 얼어붙었다.
그들은 사파. 심지어는 광동의 사파다. 아무리 그들이 일류라 불릴 만한 무인은 아닐지라도, 광동의 사파라면 누구나 이런저런 전장을 몇 번씩을 겪어 봤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질리도록 본다.
하지만 사람이 저렇게까지 공포에 질린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장천기는 핏발 선 채 충혈된 사람의 눈이 저렇게까지 덜덜 떨릴 수 있단 걸 처음 알았다.
핏기 하나 없이 질린 얼굴과 핏발 선 눈, 혼이 나가 버린 표정, 거기에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까지.
대체 무엇을 보아야 사람이 저렇게 되는 걸까? 평범한 이도 아닌, 무학을 익힌 이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사, 살려…….”
푸욱!
가장 뒤에서 달아나던 이의 목으로 삐죽한 것이 불쑥 튀어나왔다.
“끄륵……. 끄르륵…….”
삽시간에 목이 꿰뚫린 그는 제 목을 뚫고 나온 것을 움켜잡으려는 듯 덜덜 떨리는 손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그 부자연스럽고도 기괴한 동작을 수많은 이들이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콰득.
순간 그 목을 꿰뚫은, 검날이라 불러야 할 날붙이가 여지없이 비틀렸다.
그 광경을 본 이들은 저도 모르게 제 몸을 움츠렸다.
그건 쌓아 올린 무위로도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지녀야 할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끄르륵…….”
검이 비틀리며 생긴 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진다. 학질에라도 걸린 듯 경련하던 이의 눈에서 점점 빛이 사그라들었다.
결국 사내의 몸이 썩은 짚단처럼 앞으로 힘없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모두는 보았다.
쓰러진 사내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를.
짙디짙은 검은 무복을 입고, 그에 대비될 만큼 눈부시게 흰 검을 든 젊은 검수를.
장천기가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을 사로잡은 건 공포 이전에 경악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겁에 질린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다.
그의 시선은 젊은 검수의 가슴팍에 닿아 있었다. 피에 젖어 원래보다도 더 검게 물든 검수의 상의에는, 붉은 매화 문양이 선명하게 수놓였다.
매화 문양이 새겨진 검은 무복과 새하얀 검.
질끈 묶은 머리와 무섭도록 차가운 눈빛.
그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화, 화산……. 화산검…….”
파아아아아아앗!
장천기의 눈앞에 무언가 번뜩이는 빛이 작렬했다.
희끄무레한 무언가를 봤고, 장천기가 느낀 것은 제 옆으로 누군가의 옷자락이 스쳐 가는 감각이었다.
끔찍한 작열감이 이어졌다.
“끄윽…….”
흡사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그의 목을 뒤덮었다. 그 고통은 이내 어깨로까지 번지며 달아올랐다.
장천기는 이 뜨거움의 정체를 알았다. 굳이 두리번거리며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뜨거운 것은, 피다. 그의 목에서 쏟아지고 있는 붉은 피.
‘그럼 그렇지…….’
장천기의 세상이 일그러졌다. 고막을 찢을 듯 들려오던 비명도 금세 흐릿해졌다.
그는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기우뚱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걸 느끼며 생각했다.
‘그래, 해남 따위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
화산검협쯤 되니 이 방어선을 저리 농락하듯 돌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그렇…….’
마지막 순간에 장천기가 느낀 감정이 안도였는지 위안이었는지는 오직 그만이 알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