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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87화 (1,288/1,567)

1287화. 지겹도록 볼 광경이니까. (1)

파앗!

단련된 다리가 땅을 박찬다.

해남의 제자들은 전력을 다해 달렸다. 그들이 지금 목표로 삼고 있는 담강까지의 거리는 400여 리. 평범한 사람이라면 잠을 거르고 꼬박 걷는다 해도 사흘은 걸릴 거리지만, 명문의 제자인 그들이라면 불과 몇 시진 만에 주파할 수 있다.

이건 속도 이전에 체력의 문제였다.

구파일방인 해남의 제자쯤 되면 평범한 사람이 전력을 다해 달리는 속도를 하루종일 유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니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쉬지 않고 자지 않고도 사흘 내내 달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기에 무인들의 이동 속도는 평범한 사람은 물론이고 말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극단적인 이동 속도는 되레 해남 제자들의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딱히 실감하지 못했다. 그저 달리라는 대로 전력을 다해 달리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대화 한마디 없이 달리기만 하는 시간이 이어지자 모두가 실감하고 말았다.

지금 그들은 스스로 사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들이 목표로 삼은 담강 어귀부터는 사패련의 포위망이 형성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지금 그들은 다름 아닌 그 포위망을 향해 전력으로 돌진하고 있는 것이다.

“자양!”

“왜 그……. 쿨럭! 왜 그러십니까!”

이자양이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대답했다. 평소의 그였다면 이 정도 속도로 세 시진쯤 달렸다고 이렇게나 지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해남이 아닌 강남을 달리고 있다는 압박감이 그의 체력을 빠르게 앗아 간 모양이었다.

“지금 어디쯤 온 것 같으냐?”

“예?”

“지금!”

이자양이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그…… 이 속도로 달렸으니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됐을 겁니다.”

“그럼 이제 곧 적들과 맞닥뜨린다는 말 아니냐?”

이자양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럼 이제 슬슬 속도를 줄여야 하는 것 아니냐?”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만…….”

곽환소는 선두에서 달리는 천우맹도들을 보았다.

이자양은 현명한 사람이다. 그런 이자양과 곽환소의 생각이 다르지 않다면, 분명 그게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지?’

지금까지야 적이 없을 만한 곳을 지나쳤기 때문에 앞뒤 따지지 않고 달렸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상식적으로는 이제 슬슬 속도를 줄이고, 적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은밀하게 이동해야 한다.

이백이 넘는 인원이 이렇게 달리고 있으면 사패련이 아니라도 누구나 알아채지 않겠는가?

‘장문대리!’

곽환소의 시선이 백천의 등에 꽂혔다.

곽환소가 아무리 전쟁을 모른다고 해도 상식을 모르는 멍청이는 아니다. 이곳은 강남이다. 한번 적에게 발견되어 전투가 벌어지는 순간부터는, 쉴 새 없이 끊임없는 전투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교전이 벌어지는 시기를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늦춰야 하지 않겠는가? 발각된 이후에야 어쩔 수 없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왜 여전히 속도를 늦추지 않는가?

곽환소의 시선이 이번엔 금양백 쪽으로 향했다. 금양백은 그저 묵묵히 천우맹도들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장문인께서는 왜 말씀을 안 하시지?”

“하기 어려우신 것 아닐까요?”

“어째서?”

“아무래도 장문인이시니까……. 화산의 장문대리이자, 천우맹의 사자에게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게 부담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말에는 여러 복잡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물론 곽환소가 그 말의 의미를 모두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이해했다.

“다녀오마.”

“예!”

이자양의 대답이 단호한 것을 보아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곽환소는 다리에 공력을 불어넣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장문대리! 청명 도장!”

달리던 청명과 백천이 곽환소를 돌아보았다.

“이제 적들이 있을 곳에 거의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이라도 속도를 줄이고 이제 은밀하게…….”

“곽 소협. 그건…….”

백천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이리 와.”

“예?”

청명이 손을 쭉 뻗어 곽환소의 어깻죽지를 움켜잡고는 앞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곽환소는 얼떨결에 끌려가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백천이 말했다.

“이쪽을?”

“장문인보다는 이쪽이 나아. 장문인은 해남을 통솔해야지.”

“……알겠다.”

곽환소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였다. 백천은 더 설명해 주는 일도 없이 뒤로 슬쩍 빠져서 금양백 쪽으로 향했다.

곽환소가 주위를 둘러보려는 순간, 그의 귓가로 서늘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고개 돌리지 마.”

곽환소가 움찔하고는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청명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제, 제가 뭘 하면 됩니까?”

“똑똑히 봐 둬.”

“예?”

“아니. 정확하게는, 보고 이해해.”

“그게 뭔…….”

“설명하고 가르칠 시간이 없어.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 못 할 거고, 아무리 가르쳐도 모를 거다. 이건 그냥 피부로 느끼고 감각으로 깨닫는 수밖에 없어.”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대신 하나는 확실하게 기억해라.”

“예?”

“배우지 못하면 너희는 모두 죽는다.”

곽환소의 얼굴이 확연하게 굳어졌다.

“협박이 아니야. 지금 이대로라면 너희는 강남에서 단 한 명도 못 살아 나가. 그러니까 똑똑히 봐 둬. 우리가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네가 먼저 느끼고 어떻게든 그걸 저들에게도 전해.”

“도, 도장?”

고개를 돌리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곽환소는 결국 청명을 바라보고 말았다. 그 순간 그가 마주한 것은, 평소와는 다르게 싸늘하게 굳어 있는 청명의 얼굴이었다.

곽환소는 말없이 멍하니 청명을 바라보다가 아예 다른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청명은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적어도 그와 비슷한 이들에게서 답을 구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화산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혜연과 남궁도위, 당패, 심지어는 임소병과 설소백마저도 청명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들은 지금 분명 같은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 그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는 이는 오직 곽환소뿐이었다.

‘이게…….’

청명이 말대로라면, 이곳에서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을 보고 겪은 이후로는 그 역시 이 표정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곽환소의 생각보다 더 빠르고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도장! 전방!”

“안다.”

청명이 싸늘하게 답하며 뒤로 시선을 돌렸다. 뒤쪽으로 빠졌던 백천이 어느새 곁으로 돌아와 있었다. 청명의 눈짓을 받은 백천이 빠르게 소리쳤다.

“조걸! 윤종!”

“예!”

“좌측! 이설, 소소! 우측으로!”

“네.”

백천의 지시가 끝나기 무섭게 화산의 네 제자가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왜 뒤로?’

곽환소의 의문이 채 제대로 피어나기도 전에 백천의 지시가 이어졌다.

“녹림왕! 금 장문인께서 후미를 맡아 주실 겁니다. 그 앞에서 전체적인 전황을 봐 주십시오! 혜연 스님과 남궁 소가주님, 그리고 당 소가주님께서는 중앙에서 위험한 곳을 지원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예!”

“청명아!”

“말해.”

백천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가서 물어뜯어라!”

그 말을 들은 청명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차게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파앗.

“그럴 참이었어.”

그 순간 청명의 몸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뭘?’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곽환소의 눈에는 그저 섬전처럼 달려 나가는 청명의 등만이 보였다. 잠시 후, 그 시야 안에서 검기가 환상처럼 피어오르고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

촤아아아악!

청명이 휘두른 검에 목을 잃은 몸뚱이가 피를 뿜었다.

일 검에 둘의 목숨을 거둔 청명은 지체하지 않고 짓쳐 달려 나갔다.

곽환소는 정신이 반쯤 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는데, 이들은 어떻게 저기에 적이 은신해 있다는 것을 알았단 말인가.

‘아, 아니. 그보다, 이렇게 적과 맞닥뜨려도 정말 괜찮은…….’

“곽 소협!”

그때 우렁우렁한 백천의 고함 소리가 곽환소의 잡념을 단숨에 날려 버렸다.

“예! 예, 장문대리!”

“한눈팔지 마시고 저놈 뒤로 빨리 따라붙으세요!”

“뒤, 뒤로…….”

“절대 놓치지 마십시오. 지금부터 곽소협이 해야 할 건 그것뿐입니다. 다만 명심하십시오.”

백천이 곽환소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곽 소협이 놈을 놓치면 뒤따르는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

“죽어도 놓치지 마시고, 죽을 각오로 따라붙으십시오. 뒷일 같은 건 신경 쓰지 마시고.”

“아, 알겠습니다.”

“가세요!”

백천이 곽환소의 등을 강하게 떠밀었다.

그 바람에 앞으로 성큼 나아간 곽환소는 이내 이를 악물고 청명의 등을 향해 달렸다.

‘뭐라는 거야?’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지시다. 앞사람 등을 놓치지 않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저리 악을 써 대며 이야기한단 말인가?

이들의 무위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그는 해남의 대제자다. 설마 그 정도도 못 하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뭔데 자꾸 죽는다, 어쩐다 하는 거야?’

배우지 못하면 죽는다. 놓치면 죽는다. 어리숙한 애를 데려다가 구박하며 겁주는 것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말들이란 말인가?

속에서 조급증과 울화가 동시에 치밀었다. 곽환소가 갑갑함을 해소하려 숨을 토하려는 순간, 청명이 갑자기 속도를 훌쩍 높이더니 순식간에 그와 거리를 벌리며 멀어져 갔다.

“뭐, 뭣!”

화들짝 놀란 곽환소가 있는 힘을 다해 황급히 땅을 박찼다. 암향매화검에 베인 시신을 뛰어넘으며 달리자 앞서 나갔던 청명이 빠르게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으아아아아악!”

매복해 있던 인원들이 단숨에 베이며 비명을 토했다. 피가 사방에 흩뿌려진다. 붉게 젖은 채 쓰러져 가는 얼굴들이 곽환소의 눈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두 사람의 몸이 썩은 짚단처럼 허물어지고, 또 한 사람이 무릎을 꿇은 채 부들부들 경련한다. 하지만 청명은 경련하는 이를 내버려 둔 채,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갔다.

곽환소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직 살아 있다. 저 사람은 아직…….

“끄륵…….”

경련하던 그는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곽환소를 보더니 힘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곽환소의 내면에서 뭐라 형용하기 힘든 갈등이 피어났다.

죽여야 하나?

하지만 내버려 둬도 곧 죽고 말 것이다. 이미 저항할 능력도 없다. 그런 이를 벤다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그렇다면 그냥 지나쳐 가야 하나? 하지만 만약 다음 사람이 도착할 때까지 죽지 않는다면, 저자가 휘두른 검에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다.

대체 어떻게…….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곽환소는 쓰러지고 있는 이의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검을 쥔 손이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휘, 휘둘…….’

“으……. 으아아!”

그 순간, 쓰러져 가던 이의 눈에 독기가 피어올랐다. 벌떡 일어선 그가 곽환소를 향해 도를 휘둘렀다. 죽어 가고 있던 이가 휘두른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력한 힘이었다.

당황한 곽환소가 두 눈을 부릅떴다.

‘느, 늦었……!’

대처하기는 늦었다고 생각한 찰나, 눈을 질끈 감으려는 그의 얼굴 위로 뜨거운 무언가가 확 쏟아졌다.

“어…….”

곽환소의 몸이 덜덜 떨렸다.

도를 휘둘렀던 사파인의 이마로 길쭉한 무언가가 튀어나와 있었다. 검이었다.

곽환소는 무의식적으로 축축한 제 얼굴을 더듬었다.

미끈거리고 뜨끈한 감촉. 그가 뒤집어쓴 건 피였다.

저 검이 머리를 꿰뚫으며 튀어나온 피가 그의 온 얼굴에…….

퍼억!

곽환소의 얼굴에 청명의 주먹이 틀어박혔다.

“컥!”

곽환소는 형편없이 땅에 나뒹굴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들자 득달같이 달려온 청명이 그의 멱살을 잡아 강제로 일으켰다.

“일어나, 이 머저리 새끼야.”

“도, 도장…….”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청명은 곽환소를 제 얼굴 가까이로 확 끌어당겼다. 그 기세에 곽환소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전장에선 망설이는 놈이 제일 먼저 죽는다. 단 한 번의 망설임이 너뿐만 아니라 모두를 죽일 수도 있어.”

“…….”

“한 번만 더 검을 휘두르는 걸 망설이면, 그때는 내가 널 죽일 거다. 뒈지려면 혼자 뒈져! 알았어?”

“아, 알겠…….”

청명이 대답도 듣지 않고 곽환소를 내팽개쳤다. 이를 갈아붙인 청명은 한 번 더 형형한 시선을 쏘아 내고는 몸을 휙 돌렸다.

“익숙해져라.”

그 나지막한 목소리가 곽환소의 귀를 꿰뚫는 듯 파고들었다.

“이제부터는 지겹도록 볼 광경이니까.”

곽환소의 몸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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