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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86화 (1,287/1,567)

1286화. 누가 강남에 왔다고? (6)

“누가?”

광동의 중소 사파 중 하나인 야차방(夜叉房) 방주 장천기(長泉琦)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누가 강남에 왔다고?”

“해남이라지 않습니까?”

“해남? 해남이 강남 땅에 들어왔다고?”

“그렇답니다! 지금 난리도 아닙니다.”

“거…….”

장천기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해남 놈들이 갑자기 바닷바람 너무 맞아 미쳐 버린 것도 아닐 텐데, 제 발로 강남에 들어왔다는 소리야?”

“그게 어디 제 발로 들어온 거겠습니까? 만인방이 해남으로 쳐들어가니 제 본진을 버리고 강남으로 도망친 거랍니다.”

“말이 돼?”

병법에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사람에게는 응당 상식이란 게 있지 않은가?

도망을 친다는 건, 당연히 적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대체 어느 미친놈이 적의 본진으로 도망을 친단 말인가? 이 강남이 사패련의 천하라는 걸 해남 놈들이 모를 리도 없을 테고 말이다.

“어쨌든 지금 바로 움직여야 합니다. 호가명에게서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지시?”

“놈들이 이미 해안에 상륙하여 북상하고 있답니다.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진을 치라는 명이 주변 모든 문파에 하달되었습니다. 만인방의 이름으로 내려온 동원령입니다.”

“만인방? 사패련이 아니라?”

“……만인방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만.”

“왜지? 아니……. 뭐,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지.”

장천기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무래도 해남 놈들이 진짜 강남에 들어온 모양이군. 내 살다 살다…….”

“방주님.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그 독심나찰이 직접 내린 명입니다. 지키지 못했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독심나찰이라는 말을 들은 장천기가 움찔했다.

광동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는 누가 뭐래도 패군 장일소지만, 장천기처럼 작은 사파의 방주에게는 이야기가 다르다. 장일소는 그들 따위야 지나가는 파리만큼도 취급하지 않겠지만, 호가명은 그 파리를 일일이 지켜보는 이다.

그 호가명의 눈 밖에 났다가는 야차방 같은 작은 사파야 하루아침에 지워지고도 남는다.

“그, 그래! 이럴 때가 아니구나! 내 창을 가져오너라! 그리고 다른 놈들도 모두 불러라! 우리가 맡은 곳이 어디라고 했지?”

“그건 합류하면 알려 준답니다.”

“그래. 그러면 되겠구나! 뭐 하느냐! 서둘러라!”

“예, 예.”

다급하게 밖으로 나가는 총관을 보며 장천기는 문득 헛웃음을 흘렸다.

“해남 장문인이 노망이 든 것도 아닐 테고.”

물론 무인이라 해서 질환을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꽉 막힌 정파 놈들이라고 해도 노망난 늙은이의 말을 듣고 다 같이 제 발로 사지에 걸어 들어올 리는 없잖은가?

“멍청한 놈들.”

장천기는 딱하다는 듯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악에 받쳤다지만, 그래도 기왕 뒈질 거면 제 살던 곳에서 뒈지는 게 나았을 텐데.”

저들은 이 강남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게 분명하다. 삼 년 전의 강남과 지금의 강남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이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강남은 이제 사람이 숨 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사패련의 눈이고, 사패련의 손이다. 적어도 이제 이 강남 땅에서만큼은 사패련을 거치지 않고는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것이다.

“스스로 사막까지 기어 올라온 물고기는 말라 죽는 수밖에 없지. 특히나 그 뒤로 다가오는 사냥꾼이 독심나찰이어서야…….”

짙은 비웃음을 흘린 장천기가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 * *

“그래서?”

뭍에 닿은 배에서 하선한 호가명이 눈썹을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그의 시선은 해안에 처참하게 널브러진 하오문도들의 시신에 고정되어 있었다. 검게 물든 얼굴들로 보아, 독에 당해 절명한 모양이었다.

“생각 없이 빈 배를 수색하다가 모조리 중독되었다는 건가?”

“…….”

“덕분에 놈들의 종적은 완전히 놓쳐 버렸고?”

중독의 여파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희게 질려 있던 엽위의 얼굴이 일순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놈들이 그런 수를 쓸 줄은…….”

“몰랐다?”

호가명이 아무 말 없이 엽위를 빤히 응시했다. 엽위는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드릴 말씀이 없소. 벌이라면 달게 받겠소.”

그런 그를 말없이 빤히 보던 호가명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다. 엽위는 슬쩍 시선을 들어 호가명의 표정을 살폈다. 놀랍게도 호가명의 얼굴엔 그 어떤 감정의 흔적도 묻어 있질 않았다.

“잘못이 있다면 역량이 부족한 이들에게 제 분수에 맞지 않는 명을 내린 내게 있겠지. 고려했어야 했는데.”

뿌득.

무심한 그 목소리에, 엽위는 이를 갈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저지른 일이 있으니 감수해야 할 비난이다. 상대를 죽이라는 것도 아니었고, 꼬리에 달라붙으라는 간단한 명령이었다. 그걸 이행하지 못한 이가 입이 열 개라 해도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울화가 치미는 이유는, 이 일로 인해 피해를 입은 게 온전히 엽위와 하오문이기 때문이다. 그는 심혈을 기울여 키워 낸 수하들을 모조리 잃었지만, 호가명과 만인방은 딱히 손해 본 게 없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서 비꼬는 듯한 질책까지 들으려니 속이 들끓는 것도 당연했다.

“놈들 중 독공의 고수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소. 입수만 했다면…….”

“정보?”

호가명이 표정 없이 엽위를 빤히 보았다.

“할 말과 하지 못 할 말을 가려 하는 게 좋겠군. 애초에 그 정보를 확보하는 것이 하오문의 일이 아니던가?”

“그건…….”

“됐네.”

호가명은 차게 말허리를 끊고 말했다.

“지난 일을 굳이 탓해 봐야 무의미하지. 앞으로 만회하면 될 일.”

딱히 매정한 말은 아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옹호에 가깝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엽위는 호가명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었다.

“우선은 놈들을 추적…….”

“애초에!”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엽위가 호가명의 말을 끊어 내고 으르렁대듯 말했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저들에게 배를 탈취당하고, 곱게 강남 땅을 밟게 한 만인방의 잘못 아니오!”

“…….”

“그렇지 않았더라면 쓸데없이 죽어 나가는 이들도 없었을 터!”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호가명을 노려보며 물었다.

“내 말이 틀렸소?”

죽일 테면 죽여 보라는 듯 악에 받쳐 질러 대었지만, 정작 그 악다구니를 받은 호가명은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렇……. 뭐라고?”

“틀린 말은 아니군. 내 실수다. 아니, 내 잘못이지.”

순간 엽위가 아연한 얼굴로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해남에서 처리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 하지만 여의치 못했다. 해명이 더 필요한가?”

“……아니오.”

“그럼 됐군. 다만……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군.”

“무슨…….”

“‘틀렸소’가 아니겠지.”

순간 엽위가 움찔하며 호가명과 눈을 마주쳤다. 감정 없는 호가명의 눈빛이 둔중하게 엽위를 내리눌렀다.

“아니면, 아직 그대는 과거에 살고 있는 건가?”

엽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한참 동안 부들대던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무례했습니다.”

“알았으니 다행이로군.”

호가명이 더는 따져 묻지 않겠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타 지부와의 연락망은 있겠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저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위치를 확보하라고 해.”

“예. 놈들을 막으라 지시하겠습니다.”

“말을 똑바로 알아듣도록. 내가 명한 것은 행적을 조사하는 거다.”

“……무슨?”

“일개 지부(支部)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다.”

“…….”

“어쨌거나 하오문은 주요 전력. 널려 있는 잡배들과는 다르다. 무의미한 희생을 늘릴 필요는 없겠지. 쓸데없이 접근하지 말고 놈들의 위치만 정확하게 파악하면 된다. 처리는 우리가 하지. 시킨 것만 제대로 하도록.”

엽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움직여라.”

“……예.”

엽위가 몸을 돌려 빠르게 멀어지자, 호가명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때, 귓가에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비로우시기도 하지.”

괴량이 대놓고 이죽거렸다.

“군사 나리는 공명정대하신 것이, 아무래도 사파보다는 황궁이 더 어울리시겠어. 나 같으면 혀를 뽑아 버렸을 건데.”

“쓸데없는 짓.”

하지만 호가명은 그저 담담했다.

“그래 봐야 분풀이일 뿐이다. 이득은 없지. 쥐꼬리만 한 능력이라 해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지금은 그 능력도 필요해.”

“하지만 놈은 방을 모욕했다.”

“놈이 모욕한 건 방이 아니라 나다.”

호가명이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모욕을 받는 건 별일 아니다. 항상 있어 왔던 일이니까. 그러니 쓸데없는 데 신경 쓸 것 없다.”

“어련하시겠어?”

괴량이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물론 괴량 역시 호가명에게 우호적인 감정 따윈 없다. 하지만 확실히 이런 부분은 인정했다. 으레 정파 놈들이 쓸데없는 체면 때문에 화를 자초한다면, 사파는 쓸모없는 자존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곤 하니까.

‘하지만 만약 저놈이 방주를 입에라도 올렸으면 이 자리에서 당장 찢어 죽였겠지.’

그렇기에 호가명이 껄끄러운 것이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군.”

“음?”

괴량이 피식 웃었다.

“급할 때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지만, 저놈들 능력이 과연 고양이만큼이라도 될까? 그 화산검협이 저딴 놈들에게 뒤를 잡히길 바라느니, 절벽에서 발이 미끄러져 추락사하기를 바라는 게 현실적일 텐데.”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능력을 보는 눈은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을 보는 눈은 아직 부족하군.”

“……음?”

“나는 찾아내라고 한 적 없다. 위치를 확보하라고 한 거지. 그건 그저 놓치지 말라는 의미다.”

“차이가 있나?”

“내가 아는 화산검협이라면…….”

호가명의 눈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아니. 말로 해 봐야 의미가 없겠지. 곧 알게 될 거다.”

괴량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잘나셨군.”

“쓸데없이 잡담이나 나눌 시간 없다. 움직이지.”

“그러시지요, 군사 나리.”

괴량이 미련 없이 몸을 돌리자 호가명은 대기하고 있던 부관에게 짧게 지시를 내렸다. 지시를 들은 부관이 잠깐 눈치를 살피다 입을 뗐다.

“그런데, 군사님. 배를 몰고 온 놈들은 어떻게 합니까?”

호가명이 살짝 시선을 옮겨 뒤쪽을 보았다. 해남파의 파문 제자들이 해안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호가명은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따라올 수 없는 놈들은 인질로 잡아 두고, 무공이 있는 놈들은 대동한다.”

“예.”

유공은 그저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호가명의 눈빛이 순간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물론 괴량이 들었다면 또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힐난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호가명의 생각은 달랐다.

‘화산 놈들이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있다면, 저놈들이겠지.’

그리고 그의 생각에는, 아마 이 변수가 저들에게 더없이 치명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눈치챘을 때는 이미 배 속으로 파고드는 독 바른 비수처럼.

“출발해라.”

“예!”

호가명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만인방의 군세가 북으로 또 북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목표는 오직 천우맹.

그리고 화산검협의 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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