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285화 (1,286/1,567)

1285화. 누가 강남에 왔다고? (5)

남궁도위와 당패가 설소백을 돌보는 동안 해남의 제자들이 남김없이 해안에 도착했다.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건만 그들의 얼굴은 벌써 희게 질려 있었다.

“다들 괜찮으냐?”

“⋯⋯예. 장문인.”

대답하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 어린 것은 다름 아닌 불신이었다.

‘왜 이래야 하는 거지?’

굳이 잠수해 들어가지 않아도 해안은 비어 있지 않은가? 그들을 노려 올 만인방은 지금 이곳이 아니라 바다 한중간에 있을 텐데⋯⋯.

설령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해도, 이렇게까지 악을 쓰듯 헤엄을 쳐야 할 당위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이래서야 싸워 보기도 전에 체력을 소진해 버리지 않는가?

“정비가 되는 대로 출발한다. 서둘러라.”

“예!”

해남의 제자들이 치솟는 불만을 억누르고 들끓는 기혈들을 가라앉히기 시작하자, 나름 여유가 생긴 이자양이 곽환소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얘들이 불만이 많은 모양입니다.”

“불만?”

곽환소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불만 말이냐?”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고, 시키는 대로 움직이라는 데서 오는 불만이겠지요.”

“장문인이 명하시면 따르는 게 제자의 도리다. 그걸 위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니더냐?”

“장문인의 명이시면 그렇겠지요.”

곽환소가 눈을 살짝 찌푸린다.

“하지만 지금 이 모든 명령은 다름 아닌 천우맹⋯⋯. 아니, 정확하게는 화산의 장문대리인 백천 도장이 내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장문인께서는 그저 그 말을 따를 뿐이고.”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이자양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저 그렇다는 겁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는 하나, 타문의 동년배가 내리는 지시를 곧이곧대로 따를 만큼 속 좋은 놈이 여기 몇이나 있겠습니까?”

곽환소가 고개를 돌려 이자양을 바라본다. 그러자 이자양이 제 양손을 슬그머니 들어 올리고는 너스레를 떨었다.

“제 의견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애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저야 뭐⋯⋯.”

굳이 변명까지는 할 필요 없었다. 곽환소는 이자양의 성향을 잘 아니까.

그는 능력 없는 자에게 권한이 주어지는 것을 혐오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능력이 있는 자의 말은 불만 없이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화산과 백천의 능력이야 이미 본 바가 있으니 이자양이 굳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

곽환소의 표정을 본 이자양이 피식 웃었다.

“너무 그런 얼굴 하지 마십시오, 사형. 사람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권위를 싫어하고 언제나 탈권위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막상 그 탈권위가 제게 돌아올 때는 불만을 가지는.”

“⋯⋯.”

“그냥 제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 같은데, 저리 뻔히 계시는 분들이 굳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 같다는 겁니다. 저기 있는 분들이 이런 걸 파악 못 할 위인들도 아닌 것 같은데.”

“이유가 있겠지.”

“예, 뭐. 그렇겠죠.”

이자양이 어깨를 으쓱하자 곽환소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마침 천우맹의 맹도들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눈빛이 곱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적당히 설명이라도 해 주는 게 나을까요? 제가 할 일이 아니라 지켜만 봤는데.”

“음.”

남궁도위의 말에 당패가 침음을 흘렸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들이 자의적으로 판단을 내려도 될 일인지가 의문이었다.

“그럼 일단은⋯⋯.”

그때였다.

“다 왔습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이 뭔가를 결정하기 직전에 백천과 청명이 돌아왔다. 그들에게로 다가온 백천이 슬쩍 뒤쪽으로 눈짓을 하며 말한다.

“저희가 확인한 곳에는 적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장은 포위망이 펴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음. 소식도 늦었을 것이고⋯⋯. 안다 해도 제대로 된 포위를 이곳에 구성하는 것은 어렵겠지요. 병력의 공백이 있으니.”

“예. 다른 녀석들의 말도 들어봐야겠지만, 감시하는 이들이 없다면 척후조는 따로 운용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출발하시죠.”

“예. 다만 장문대리.”

“예?”

남궁도위가 슬쩍 해남 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설명이 조금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 저들에게 조금 상세히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이⋯⋯.”

그 말에 백천의 시선이 해남 쪽으로 향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본 것만으로 상황이 어찌 흘러가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는 듯 말이다.

백천이 슬쩍 시선을 돌려 청명에게 넌지시 묻는다.

“어떻게 생각하냐?”

“배가 처불렀네.”

청명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냅 둬.”

“예?”

남궁도위가 놀라 되묻자 청명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럼 뭐 앞으로 뭐 하나 결정할 때마다 일일이 알려 주고 설득할 거야?”

“그건⋯⋯.”

청명의 목소리가 살짝 싸늘해졌다.

“불만이 있어도 상관없어. 불만 있는 놈이 죽고 불만 없는 놈이 사는 곳이 아니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혹시라도 저 불만이 나중에 문제를 만들지 않을지가⋯⋯.”

“괜찮습니다.”

그 말을 받은 건 청명이 아니라 백천이었다.

“저분들도 곧 알게 될 겁니다. 여기는 그런 걸 생각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걸요.”

“⋯⋯.”

백천이 가라앉은 눈으로 해남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감도는 것은 경멸도, 무시도, 그렇다고 안타까움도 아니었다. 오히려 동질감이었다.

‘나도 그랬지.’

과거의 백천은 그랬다. 스스로 뛰어나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당장의 실력이 굉장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 재능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자신이 화산을 이끌고, 그 명성을 천하에 떨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 자부심을 깨뜨린 건 청명이고, 또한 현실이었다.

청명이라는 벽을 만나지 못했다면 백천은 결코 스스로를 깨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 역시 마찬가지지.’

아무리 다짐하고 애쓴다고 한들, 구파일방의 일원인 해남의 제자라는 자부심이 그리 쉽사리 사라질 리 없다.

실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다른 이들은 당연히 온당한 설득으로 자신들을 대우해야 한다고 믿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도 곧 알게 될 것이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는 그들이 그토록 귀중히 여겼던 명성이나 지위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백천이 실감했듯이.

“사숙!”

그때, 숲으로 정찰을 나갔던 화산의 제자들이 돌아왔다.

“주변에 적의 기척은 없는 것 같습니다.”

“미리 약속한 지점까지 확보하고 왔습니다. 이 근처는 안전합니다.”

“없어요. 적.”

백천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확인하려 했던 것은 적의 유무라기보다는, 포위망이 어디까지 형성되어 있는가였다.

지금 얻은 정보대로라면 적들은 꼬리를 붙일 여력은 있어도, 이 주위를 느슨하게나마 포위할 여력은 없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거꾸로 말해 뒤쪽에 더 확실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다는 의미겠지.’

백천이 임소병에게 시선을 옮겼다.

“녹림왕.”

“예이.”

“적이 어디부터 포위망을 형성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뭐, 그건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지요. 지금 저들이 틀어막으려고 할 곳은 셋 중에 하나입니다. 첫 번째는 여기. 우리가 상륙할 지점이지만, 그건 아닌 걸로 밝혀졌고.”

“예.”

“두 번째는 남녕부터 광주까지 넓은 지역을 둥글게 막아 포위망 자체를 넓게 가져가는 방법입니다.”

“음.”

“하지만!”

임소병이 얼굴을 뒤틀었다.

“저 호가명의 성향을 고려한다면 또 다르죠. 제가 생각하는 곳은 담강(湛江)입니다. 이 분지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좁은 길목을 물 샐 틈 없이 틀어막으려 들 겁니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우리가 바다를 통해 우회할 수도 있잖습니까. 독심나찰이 그 정도도 생각 못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쯧쯧. 그래 주면 저들이야 오히려 고마워하겠지요. 지금 우리의 앞을 막고 있는 건 늑대지만, 등 뒤에서 쫓아오는 놈들은 범입니다. 물로 들어가 시간을 끌어 준다면 호가명은 되레 좋다고 쫓아오겠죠.”

“과연.”

납득했다는 듯 백천이 동의를 표했다.

“그러니.”

임소병이 슬쩍 몸을 돌려 해남의 제자들을 바라본다.

“대충 쉴 만큼 쉬게 했으면 움직여야 할 겁니다. 이미 시간은 충분히 낭비되고 있으니 말이죠.”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담강까지는 사력을 다해 이동하는 것으로 하죠.”

임소병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천이 다른 이들을 바라본다.

딱히 이견이 보이지 않는 듯하자 백천이 곧바로 걸음을 옮겨 금양백에게 다가갔다.

“장문인.”

“예. 장문대리.”

금양백이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백천을 바라본다. 강남으로 진입했다는 긴장감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우선은 담강까지 전력을 다해 이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바로 말입니까?”

“예. 적들이 추적해 오고 있고, 앞쪽에는 포위망이 형성되고 있을 게 분명한 터라, 시간을 끌 수 없습니다.”

금양백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여쭈고 싶은 것이, 담강에 도착한 뒤에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그때 상황에 맞춰 정하겠습니다.”

“상황에 맞춰⋯⋯.”

금양백의 눈에 짧게 불만이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 이상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백천이 가볍게 꾸벅이고 제자리로 향하자, 금양백이 빤히 백천의 등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제자들에게 움직일 채비를 하라 일러라.”

“알겠습니다, 장문인. 다만⋯⋯.”

장로 중 하나가 조금 떨떠름해 보이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정말 대책은 있는 것이겠죠?”

“⋯⋯.”

“저는⋯⋯.”

“애초에 우리는 이곳에 살려고 온 것이 아니잖느냐?”

“⋯⋯압니다. 하지만 그럴 거면 차라리 그 해남의 해안에서 죽도록 싸우는 게 낫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저 혹여 이러다가 개죽음을 당하지 않을까 싶어서.”

“⋯⋯.”

“저들은 고작 열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백이 넘지 않습니까? 사람의 수를 감안하더라도 죽을 곳을 정해야 한다면 저희가 정하는 쪽이⋯⋯.”

“그만.”

금양백이 장로의 말을 끊어 냈다.

“채비나 시키거라.”

“⋯⋯예. 장문인.”

물러나는 장로들을 보며 금양백이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저들의 태도에 화가 난 것이 아니다. 그의 뇌리에 같은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짜증이 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 간사하구나.’

해남의 해안에서 저들의 능력을 본 게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불신이 생기려 한다는 말인가? 짐승 새끼도 은혜가 무엇인지는 아는 법이거늘.

‘아니. 간사한 게 아니다.’

금양백이 눈을 감았다.

‘그저 살고 싶은 거구나.’

한 번 만인방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보니, 포기했던 생에 대한 집착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니 살길을 자꾸 찾으려 하는 거겠지.

그것을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그저 이 작은 욕심들이 커져, 일을 그르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출발한다!”

금양백이 마음에 이는 미혹을 떨쳐 내려는 듯 더욱 힘차게 목소리를 높였다.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