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282화 (1,283/1,567)

1282화. 누가 강남에 왔다고? (2)

“다 왔군.”

“예. 이제 곧입니다.”

갑판에 몰려든 해남의 제자들이 가까워지는 땅을 응시했다.

강남.

그들의 얼굴이 더없이 굳어졌다.

물론 강남을 밟는 게 이번이 처음일 리는 없다. 강남불침의 조약이 그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는 종종 내륙에 들르곤 했으니까.

게다가 천하후기지수비무대회에 참가할 때도 강남을 통해 숭산까지 가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때의 강남과 지금의 강남은 완전히 다른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은⋯⋯.’

곽환소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제부터 그들은 이곳부터 장강까지, 물경 이천오백 리에 달하는 거리를 주파해야 한다. 그들을 잡아 죽이려 이를 갈고 있는 사파 무리를 뚫고 말이다.

‘정말 가능할까?’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드는 느낌이었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몸으로 실행하는 것은 다르다. 충분히 각오했다고 생각했건만, 막상 강남 땅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전신이 긴장으로 뻣뻣이 굳었다.

곽환소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해남 제자들 역시 긴장으로 낯을 굳힌 채였다. 아마 다른 배에 탄 제자들의 상황 역시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긴장을 풀려고 하지 마라.’

곽환소는 의식적으로 주먹을 몇 차례 쥐었다 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경직된 분위기에 질식해 버릴 것 같았다.

‘긴장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억지로 긴장하지 않으려 하는 게 더 이상하지.’

곽환소가 긴 숨을 내뱉으려는 바로 그때였다.

“슬슬 다 온 것 같은데.”

갑판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온 임소병이 부채를 촥 펼치더니 제 얼굴로 살랑살랑 부쳐 댔다. 남궁도위가 넌지시 물었다.

“생각한 시간에 도착한 겁니까?”

“끄응.”

슬쩍 앓는 소리를 흘린 임소병이 부채를 탁 접었다.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생각보다는 좀 많이 늦었습니다.”

“⋯⋯그래요?”

임소병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대로라면 못해도 세 시진 전에는 도착해야 했는데⋯⋯. 그래야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었는데.”

“⋯⋯.”

“왜 역풍이 불어 가지고는, 하⋯⋯. 미치겠네. 진인사대천명이라. 아무리 제가 날고 기는 재주를 지닌 책사라 해도, 역풍이 불 것까지 짐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제갈공명은 역풍을 불게도 하던데⋯⋯.”

남궁도위가 별생각 없이 건넨 말에 임소병의 볼이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켰다.

“내가 공명이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습니까?”

“아, 아니요. 능력이 부족하단 말이 아니라. 그냥⋯⋯.”

“그러는 남궁 소가주는 왜 그것밖에 못 합니까? 남궁 소가주 대신에 전대 가주가 왔으면 만인방 새끼들 그 해안에서 다 검기 맞고 터져 죽었지!”

“아⋯⋯.”

“뭐요?”

“녹림왕께서 선친을 그리 높이 평가하시는지는 몰랐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새끼가?”

“예?”

“크흠!”

임소병은 못마땅하게 헛기침하며 고개를 획 돌렸다. 어째 이 인간도 날이 갈수록 만만칠 않다.

그의 시선은 다시 강남 땅 쪽으로 고정되었다. 얼굴이 슬며시 굳어졌다.

거대한 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저곳은 바다를 향해 직선으로 길쭉하게 튀어나온 분지 지형이다. 상륙을 고려한다면 응당 가장 피해야 하는 지형이다.

우선 상륙 지점이 너무 뻔히 노출되는 데다, 내륙 깊숙한 곳으로 향하기 위해선 직선거리로만 삼백 리에 달하는 분지를 돌파해야 한다. 우회로도 존재하지 않는 외길을 말이다.

책사들이 보면 학을 뗄 지형이고, 자다가 꿈에도 나올 지형이었다.

“정말 저기로 상륙합니까?”

넌지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임소병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왜요? 문제라도 있습니까? 우리가 저기서 헤엄쳐서 갔었잖습니까?”

“제가 뭘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잖습니까? 일단 그때 저들은 우리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병력의 진군 방향도⋯⋯.”

“호오오오?”

임소병이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남궁도위를 보았다.

“아아, 병법을 좀 아신다?”

“⋯⋯.”

“히야, 대단하시네. 병법도 아시고. 아, 그러고 보니 들어 본 적 있습니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되기 위해 익히는 제왕학에는 병법도 있다지요. 그 외에 시서화(詩書畵)같은 문예적인 소양까지 갖춰야 한다던데?”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고 그저 견식으로 조금⋯⋯.”

“쯧쯧쯧.”

임소병의 부채질이 난폭하게 급해졌다.

“이래서! 이래서 어설프게 배운 것들이 더 문제라니까!”

“⋯⋯.”

“멋모르면 저 뒤에 있는 양반들처럼 ‘아, 저기 내리나 보다.’ 하고 입이라도 닫고 있을 텐데, 꼭 수박 겉핥기로 배운 것들이 수박 껍질에서 나는 맛이 수박 맛이구나 하면서 이리 참견하고 저리 참견하고!”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군주니 뭐니 하는 것들이 나라 말아먹는 거지! 뭐만 하면 내가 배워 봐서 아는데! 내가 배운 병법은 그거랑 다르던데!”

“그, 그냥 의견을 낸 겁⋯⋯.”

“어? 막말로! 그거 배웠다고 병법을 잘 알 것 같으면, 댁네 전대 가주는 뭔 생각으로 장강까지 돌진했냐! 그 양반은 뭐 병법을 빼먹고 배웠대?”

“서, 선친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그건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한 일입니다! 마음으로!”

“마음? 마음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선친을 모독하지 마십시오!”

지켜보던 곽환소의 눈에서 초점이 흐려졌다.

‘이 상황에도 저러고 있네.’

머리털 난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선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저것들이 머리털 난 사람이 아니든가.

“쯧.”

임소병이 혀를 차고는 신경질적으로 부채를 부쳐 댔다.

“뭐 대충 생각하면 그 말도 그리 틀린 건 아닌데.”

“그렇죠. 그러니까⋯⋯.”

“대충 생각했을 때 그렇지, 대충 생각했을 때!”

“⋯⋯.”

“적이 예상할 수 있는 지점에 상륙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적이 대비하고 함정을 파거나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기 때문 아닙니까?”

남궁도위가 동의하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임소병이 버럭 소리쳤다.

“저기는 지금 그 방어선을 구축할 병력이 없다니까! 그 병력이라는 것들은 지금 다 해남에서 발이나 동동 구르고 있다 이 말입니다!”

“아⋯⋯.”

“그런 상황에서 상륙을 망설이며 시간이나 끌고 있으면, 그 없던 방어선이 생긴다니까? 병법에서 제일 중요한 건 이치가 아니라 시기요, 시기! 지금은 맞고 나중에는 틀리다가 통하는 게 병법이라 이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남궁도위가 이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가슴속엔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하나 있었다.

“⋯⋯그, 그럼 아까는 왜 미치겠다고 하셨습니까?”

“아쉬워서 그러지, 아쉬워서!”

“예?”

임소병이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강남 땅으로 획 시선을 돌렸다.

“세 시진만 일찍 도착했어도 어떻게든 광동에 달려가 저 만인방 새끼들 본단을 싹 불태워 버릴 수 있었을 텐데.”

“⋯⋯.”

“그랬으면 그 장일소 놈 얼굴이 참 볼만해졌을 텐데! 아이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쩌자고 이럴 때 역풍을⋯⋯.”

“⋯⋯그런 걸 하고 있을 땝니까?”

“왜요? 책사는 사람도 아닙니까? 저 장일소 새끼가 일부러 녹림이랑 장기 전선 구축하고 우릴 툭툭 쳐 댈 때마다 제 위장도 덩달아 얼마나 뒤틀렸는데! 제 건강이 나빠진 건 반은 그 새끼 탓입니다!”

“남은 반은요?”

“화산검협 때문이지,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뭔가 납득이 가는 것도 같았다⋯⋯.

“끄응. 아쉽게 됐네.”

임소병이 아쉬움의 한숨을 푹 내쉬며 불평했다.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만인방의 본단을 불태우고자 했던 건 단순히 그의 기분을 풀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정과 사를 막론하고, 어느 문파든 본단이 불탄다는 건 그 의미가 대단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화산만 봐도 그렇다.

십만대산의 정상에서 윗대를 모조리 잃었음에도 화산이 망했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랬던 화산이 폭삭 망했다는 말이 공식화된 것도, 마교의 잔당 놈들이 섬서로 쳐들어와 화산의 전각들을 불태워 버린 이후 아니었던가?

단순한 건물이라고 취급할 게 아니다. 본단의 전각들은 상징성을 지니니까. 이왕 들어온 김에 만인방의 본단을 모조리 불태워 버릴 수 있었다면, 확고한 장일소의 장악력에 분명히 타격을 입힐 수 있었을 텐데⋯⋯.

“쯧. 어쩔 수 없지.”

지금은 방법이 없다. 어설프게 본단을 불태우러 갔다가 여기 있는 이들이 구워질 판이니. 아쉽긴 해도 깔끔하게 포기하는 수밖에.

“잘 들으십시오!”

임소병이 목소리를 높이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곽환소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사파 출신인 임소병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그가 내놓은 계책의 효용을 느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곽환소가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다. 청명과 백천, 남궁도위를 비롯한 천우맹의 쟁쟁한 이들이 모두 임소병의 말을 경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들이 저자의 말을 들어 준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임소병에 대한 검증은 이미 끝난 것이다.

‘그러니 뭔가 대단한 계책이 나올 거야.’

사파 출신임에도 정파 각 문파의 수장들이 그 말을 듣게 할 정도면 필시 신출귀몰한⋯⋯.

“상륙한 뒤에는 병법이고 나발이고 없습니다.”

“어⋯⋯.”

아닌데⋯⋯. 신출귀몰해야 하는⋯⋯.

“어설프게 머리 굴리지 말고, 발에 땀 나도록 달리십쇼. 저 망할 사파 새끼들이 제대로 된 천라지망(天羅地網)을 구축하기 전에 최대한 전진해야 합니다!”

순간 기겁한 곽환소가 소리쳤다.

“자, 잠시만요! 그랬다간 저들이 저희의 종적을 다 알게 되지 않습니까!”

“상관없습니다.”

“예?”

“알아도 상관없다고요. 어차피 알게 될 텐데, 그럴 거면 한 발이라도 더 빨리 가는 게 이득이지!”

곽환소가 입을 딱 벌렸다.

‘미친놈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으로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동의를 구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깊은 절망이 곽환소를 반겼다.

“간만에 말 같은 소리 좀 하네.”

천하에 명성 자자한 화산검협 청명이 씨익 웃고.

“간명해서 좋군요.”

화산의 장문대리 백천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보냈다.

“일단 합리적입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남궁도위마저 이 외의 방법은 없다는 듯 찬성을 표했다.

그 과정을 지켜본 곽환소는 제 머리까지 이상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걸 진짜 한다고?’

이 미친 짓거리를?

“자, 잠시만!”

“아, 또 뭡니까?”

곽환소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짜냈다. 뭐라도 말 같은 말을 해야 한다.

“그, 그렇게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포위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럼 돌이킬 수 없잖습니까?”

“뭐래.”

그 대답은 임소병이 아닌 청명에게서 나왔다.

“사패련이 만만하냐? 그럼 엉덩이 빼고 숨어다니면 포위 안 당해?”

“그건⋯⋯.”

“남의 집에 쳐들어가서 깽판 놓을 생각이면 포위당할 각오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아, 아니. 각오는 할 수 있는데, 정말 포위를 당하게 되면 그땐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청명이 제 배를 의기양양하게 쭉 내밀었다.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지!”

곽환소의 얼굴에 절망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번에도 그와 생각이 다른 듯했다.

“확실히 합리적이야.”

“좋은 계획이로군.”

“이견의 여지가 없어.”

천우맹도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곽환소의 두 눈엔 눈물이 차올랐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

“그럼 우선 상륙부터?”

“물론입니다. 다만⋯⋯.”

임소병이 히죽 웃으며 해안을 바라보았다.

“병력은 없어도 눈은 있을 테니, 선물 하나 정도는 해 줘야죠.”

“응? 선물?”

임소병의 얼굴이 순간 사악한 빛으로 물들었다.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