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1화. 누가 강남에 왔다고? (1)
촤아아아악!
배가 거친 물살을 헤치며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배가 파도를 타 넘을 때면 유공은 묘한 쾌감을 느끼곤 했다. 아마 그의 몸에 해남의, 바다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유공은 배를 몰고 파도를 가르면서도 즐겁지 않았다. 아니, 즐겁기는커녕 참담했다. 그가 모는 배에 몸을 실은 것이 그동안 해남을 지독하게 괴롭혀 온 만인방의 악적들이므로.
“똑바로 몰고 있겠지?”
허리에 도를 찬 이들이 수시로 물으며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유공은 입 안 살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헛수작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그렇게 멍청한 인간은 아니오.”
“그래 보이는데?”
만인방도들은 큭큭거리며 저들끼리 비웃어 댔다.
하지만 그 노골적인 조롱에도 유공은 대응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배에 오른 순간부터는 목숨이 이들에게 저당 잡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아니, 어쩌면 이 배에 오르기 전부터 말이다.
“기억해 둬라. 마을 하나 지우는 건 일도 아니야. 네놈이 헛짓을 벌인다면, 네 마을 놈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다. 아니, 차라리 죽는 게 다행인 꼴을 당하게 될 거다.”
“⋯⋯알고 있다지 않소.”
“쿡쿡쿡.”
유공은 알고 있었다.
이들이 그를 이리 지속적으로 협박하는 게 정말 불안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그저 이동하는 동안의 지루함을 풀어 줄 적당한 유희거리로 유공을 가지고 노는 것뿐이다.
그가 어떤 반항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살다 보니 별 호사를 누리는군. 설마 내가 해남파 놈이 모는 배에 타게 될 줄이야.”
“파문당했다고 하니 해남파는 아니지 않나?”
“그것도 색다른 경험이지. 해남파 파문 제자는 해남파보다 더 희귀하니까.”
“그야 그렇지.”
희귀하다는 말을 던졌던 이가 대놓고 비웃으며 유공을 훑어보았다.
“정파 놈들은 참 자비롭기도 하지. 파문 제자가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니. 방에서는 파문을 논하는 놈이 있다면 목을 톱으로 천천히 썰어 버렸을 텐데.”
“감히 그런 생각을 하는 놈이 있을 리 없지.”
“그러게나 말이야. 그런데도 이리 상처 하나 없이 내보내 주다니. 해남의 장문인이라는 놈은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군.”
“그렇지. 결국은 그 파문한 놈이 제 뒤꿈치를 물어 대고 있는데 말이야. 내가 해남의 장문인이라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을걸?”
“하하하핫. 그렇겠군.”
지그시 깨물린 유공의 입술이 희게 질렸다. 이들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함부로 내뱉어 대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를 찌르고 있었다.
이 와중에 그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건, 저들의 말 중 반박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 그는 자비를 베풀어 준 사문을 쫓는 사냥개가 되어 있으니까.
심지어는 누구보다 철저하게 그 뒤를 쫓는⋯⋯.
유공의 시선이 흘끗 뒤쪽으로 향했다. 갑판에서 붉은 매를 날리는 호가명의 모습이 보였다. 유공의 얼굴이 절로 굳어졌다.
‘빌어먹을.’
저 매는 해남이 육지로 보내는 전서구(傳書鳩)들을 모조리 사냥했다. 그리고 이젠 해남파가 강남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 강남에 진을 친 사파 놈들에게 전하고 있을 것이다.
저 매들만 아니었어도⋯⋯.
퍼억!
그 순간 유공의 얼굴이 옆으로 획 틀어지며 입술에 피가 비쳤다.
“이놈이 어디 군사께 살기를!”
“그만둬라. 군사께서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잖나!”
“쯧.”
만인방도 하나가 못마땅한 듯 유공을 노려보았다. 유공은 소매로 입술에 맺힌 피를 훔쳤다.
‘빌어먹을.’
고개를 푹 숙였다. 가슴속에, 무어라 형용하기 힘들 만큼 무거운 어둠이 스몄다.
파드드드득.
호가명의 손끝을 떠난 매는 창공 위로 쏜살같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즉시 방향을 돌려 육지 쪽으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괴량이 입을 뗐다.
“어디로 보내고 있는 거지? 전달해야 할 곳엔 이미 전달한 걸로 아는데?”
“하오문.”
“하오문이라고?”
괴량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호가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포위를 위해서는 감시하는 눈이 많아야 한다. 하오문의 협조 없이는 위험하지.”
“흠.”
괴량이 재미있다는 듯 호가명을 빤히 보았다.
그가 알기로 호가명은 하오문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지금 자신의 이름으로 하오문에 협조를 구하고 있다. 이는 호가명이 이 일을 얼마나 중히 여기고 있는지 증명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본단에는?”
호가명은 침묵을 지켰다. 괴량의 입가가 뒤틀렸다.
“설마 련주께 알리지 않을 셈인가?”
“⋯⋯.”
“이는 항명이 될 수도 있다. 알고 있겠지, 군사?”
“물론이다.”
이 질문엔 망설임 없이 대답한 호가명이 덧붙였다.
“물론 련주께서 이 소식을 알고 나서신다면 저놈들의 목숨을 끊는 것 정도야 별일도 아니겠지.”
“그런데?”
“⋯⋯하지만 련주께는 나쁜 버릇이 있다. 쉬운 일이 있으면 그 일로 가볍게 이득을 취하시는 게 아니라, 그 일을 뒤틀어 큰 이득을 만들어 내려 하시지.”
“⋯⋯.”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작은 이득이 빠져나갈 수도 있다. 나는 그걸 막고 싶은 거고.”
“호오. 일개 군사가 감히 사패련주를 평하는 것인가?”
“하.”
짧게 코웃음을 친 호가명이 괴량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자 괴량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었다.
“련주의 비호가 계속 네게 머물 거라 여기는 건 오만일 텐데.”
“그런 생각은 한 적도 없다. 나는 그저 내 쓸모를 증명할 뿐이다.”
“글쎄. 아무리 그 가치를 증명한다 한들, 련주께서 과연 제멋대로 움직이는 말을 좋아하실까?”
그 말에는 호가명도 반박하지 못했다.
호가명도 알고 있다. 의도를 가지고 장일소를 속이거나 배제하는 것. 이는 장일소가 가장 싫어하는 행위다. 호가명이 아닌 이가 저지른다면 사지가 찢겨 죽을 것이고, 설령 호가명이라고 해도 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장일소는 호가명에게 이 일로 한번 경고한 적이 있다. 이를 무시한 대가는 상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호가명은 망설임 없이 일을 강행했다. 지금도 그 의지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때로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도 있지.”
“음?”
“⋯⋯놈은 위험하다.”
“화산검협을 말하는 건가?”
호가명이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괴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가 안 가는군.”
“⋯⋯.”
“물론 그놈은 괴물이다. 우리 같은 범인들의 기준으로는 걸어 다니는 재앙이나 다름없는 존재지.”
괴량은 선뜻 자신을 범인으로 비유했다.
그는 만인방의 단주다. 자부심이 대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범인이라 칭함에 있어서 조금의 망설임조차 느끼지 않았다. 상대가 화산검협이라면 고민의 여지조차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건 우리의 기준이다.”
“⋯⋯.”
“방주께는⋯⋯.”
“련주.”
“⋯⋯그래, 련주께는. 우리가 아닌 련주께 비한다면 말이 달라지지. 놈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련주의 입장에서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장난감일 뿐이다. 련주께 비한다면 그놈조차 범인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그건 너도 알 텐데?”
“⋯⋯.”
“그런데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군. 너는 설마 놈의 독니가 련주께도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패군께?”
호가명은 침묵을 택했다. 괴량의 두 눈에 드물게 놀란 기색이 스쳤다.
“⋯⋯진심이군.”
“⋯⋯.”
“이유는?”
호가명이 얼굴을 굳혔다. 그도 그럴 게,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장일소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감이다.”
“⋯⋯감?”
“그래. 아니면 불안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지.”
괴량이 무표정하게 호가명을 보며 물었다.
“내가 잘못 듣기라도 한 건가?”
“⋯⋯.”
“천하의 독심나찰 호가명의 입에서 감? 불안? 내 귀가 잘못된 건 아닌 것 같은데?”
“비웃을 테면 비웃어라.”
“비웃는 게 아니라. 이해가 안 되는 거다. 내가 아는 군사는 그런 것들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었을 텐데.”
호가명의 입에선 대답 대신 한숨이 흘러나왔다.
괴량의 말도 맞다. 호가명은 본디 논거가 없는 주장을 혐오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그는, 어쩌면 생에 가장 중요할 결정 중 하나를 오직 감에 의존하여 진행하고 있다.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설명하긴 어렵다.”
“⋯⋯.”
“하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그 불안의 정체가 무엇이든, 련주께 조금이라도 해가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일찌감치 배제해야 한다.”
호가명이 씹어뱉듯 말했다.
“설령 그 과정에서 련주의 명을 거역하게 된다고 해도.”
“⋯⋯.”
“화산검협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될 수 있다면 련주의 귀에 닿기 전에, 그리고 저들이 장강 유역에 도달하기 전에!”
괴량이 조금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호가명이 이리 감정적으로 나오는 걸 처음 보았다. 지금 모습만 보면 누구도 이 사람이 만인방 내에서 가장 경원시되는 냉혈한 독심나찰 호가명이라고 생각지 못할 것이다.
“어쨌건 련주에 대한 충성에서 비롯한 일이란 거군.”
“막을 텐가?”
“내가?”
괴량이 어이가 없다는 듯 나직이 웃었다.
“네 말대로라면 놈의 행적이 련주께 알려지는 순간, 련주께서 놈을 놓아줄 확률이 높다는 거겠지.”
“⋯⋯아마도.”
“그럼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하지.”
호가명이 슬쩍 시선을 주자 괴량이 입꼬리를 뒤틀며 이를 드러냈다.
“련주께 반항할 용기는 없지만, 내가 점찍은 사냥감이 내 영역을 벗어나 달아나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니까. 그리고 궁금하거든. 놈이 죽을 때는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말이야.”
그는 혀로 제 입술을 핥으며 두 눈을 빛냈다. 호가명의 얼굴이 슬쩍 찌푸려졌다.
사파 중 살인을 꺼리는 이가 있겠냐마는, 괴량은 그중에서도 유독 심하다. 살인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도, 살인 그 자체를 즐기는 이다.
정확하게는 강한 자를 사냥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긴장과 마침내 강자를 쓰러뜨렸을 때의 쾌감에 중독된 이다.
하지만 지금 호가명에게는 그 괴량이 가장 필요했다. 이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괴량이 물었다.
“그래서 포위망은?”
“이미 어느 정도는 갖춰졌다. 며칠 내로 완전해지겠지. 그러니 놈을 반드시 죽여라. 네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쓸데없는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된다. 그건 내 특기니까.”
살기로 번들거리는 괴량의 눈을 보며 호가명은 작게 코웃음 쳤다. 이내 그의 시선은 강남 땅으로 옮겨졌다. 청명에게는 사지가 될 바로 그 땅.
‘설명해 봐야 이해할 수 없겠지.’
뭐라 말하겠는가?
아무리 그가 독심나찰 호가명이고, 사패련의 군사이자, 장일소의 수족이라 해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놈에게선 련주와 같은 냄새가 난다.’
천하의 누구도 그리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장일소를 오래도록 곁에서 모셔 온 호가명은 알 수 있었다. 그 두 사람이 닮았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다르되, 극단적으로 닮았다. 그러니⋯⋯.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패군께서 누군가의 손에 쓰러지는 날이 온다면⋯⋯ 그건⋯⋯.’
잠깐 넋 놓고 생각에 잠겨 있던 호가명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무릇 군사란 천에 하나의 가능성조차 흘리지 않고 대비해야 하는 자. 그게 비록 근거 없는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호가명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화산검협 청명.’
호가명의 눈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네가 정말 련주님과 동류라면 나는 너를 잡지 못하겠지. 하지만 너는 련주님이 아니다.’
그 차이가 청명의 목을 죌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궁금하군.’
저 청명이 호가명의 손에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장일소는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화를 내실까? 아니면 어쩔 수 없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것인가? 그에게 있어서 화산검협이란 대체 어떤 존재일까?
‘주제넘은 의문이로군.’
호가명은 머리 안에 든 것들을 날렸다.
명을 거역할 수는 있다. 하지만 련주를 감히 재단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그 선을 지키지 못한다면 호가명은 더는 호가명이 아니게 될 테니까.
‘오직 련주를 위해서다.’
호가명의 눈빛이 끝없이 깊게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