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0화. 나는 틀리지 않았어. (5)
“걸렸네.”
“혼나겠네.”
화산의 제자들이 백천과 나란히 선 청명을 멀리서 지켜보며 혀를 찼다.
“사숙 많이 화나신 것 같죠?”
“화가 안 났겠냐?”
“사숙 성격에 안 패고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죠.”
“패면 되레 맞잖아.”
“그래도 일단 패고 보는 게 사숙이잖아요?”
당소소의 말에 윤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긴 하지.”
그러니 백천이 화산에서 유일하게 청명이 놈의 발목이라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남궁도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장문대리께서 화를 내실 일이 있습니까? 청명 도장이 뒤를 막아선 건 애초에 다 계획됐던 일 아닙니까?”
조걸이 피식 조소했다.
“계획이야 했죠.”
“그런데 왜⋯⋯.”
“마당에 난 잡초 좀 뽑으라고 했더니, 마당을 갈아엎어 버리는 사람한테 뭐라고 하실 건데요?”
“⋯⋯.”
“적당히 막다 빠졌으면 다칠 일도 없었을 텐데, 거기서 눈이 돌아서 앞으로 돌진했으니 혼나도 싸죠.”
“아⋯⋯.”
“아마 뒈지게 혼날 겁니다.”
“혼나야지!”
“이번에는 진짜 좀 제대로 처맞았으면 좋겠다.”
남궁도위는 쓴웃음을 지으며 청명의 등을 보았다.
청명이 만인방과 홀로 맞서 싸운 일이 남궁도위의 눈에는 한없이 영웅에 가까운 행보로만 보였는데 이들에게는 사뭇 달리 보였던 모양이다.
그건 아마 청명에 대한 입장과 시각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남궁도위에게 청명은 선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이 화산의 제자들에겐 사형제이자 가족이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고 해도, 가족이 위험을 무릅쓰는 걸 좋아할 이는 없을 터. 그러니 이들의 이런 반응도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하지만⋯⋯.
남궁도위는 문득 백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장문대리는 어떻게 생각할까?’
사실 곁에 선 이들은 그저 사형제로서 화산검협을 걱정하면 된다. 하지만 백천은 아니다. 한 문파의 장문대리로서 화산과 천우맹을 생각해야 하는 백천은 이제 더는 단순한 청명의 사숙으로 살아갈 수 없다.
실질적인 남궁세가의 가주 위(位)를 맡은 남궁도위는 그걸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궁금한 것이다. 지금 백천이 청명에게 어떤 말을 할지.
안타깝게도, 이 거리에서는 저들의 작은 대화 소리가 잘 들리질 않았다. 내력을 돋워 들으려 하면 못 할 것이야 없겠지만, 그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러니 남궁도위의 시선은 그저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등에만 꽂혀 있었다. 짐작도 어려운 대화를 나누고 있을 그 두 사람의 먼발치에서.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던 백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몸은?”
“멀쩡해.”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내일 아침쯤이면 흉도 안 남고 멀쩡해질걸? 만인방 새끼들도 별거 없더라고.”
백천의 시선이 슬쩍 청명의 다리 쪽으로 향했다.
“소소 말은 다르던데?”
청명은 상처 입은 다리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했다.
“의원이라는 애들은 원래 그렇잖아. 별것 아닌 걸로 호들갑 떨고. 걔들 말에 일일이 신경 쓰고 살면 방구석에 누워서 아무것도 못 해.”
백천이 피식 웃었다.
“소소가 들으면 당장 뒤집어질 말이네.”
“안 들리게 했어, 그래서.”
청명도 낄낄대고 웃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청명은 당소소가 화산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 주고 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전장에서 의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청명보다 잘 아는 이도 드물 테니까. 심지어 당소소는 동시에 전투도 가능하지 않은가.
백천은 웃음기를 거두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청명을 빤히 보았다. 청명은 슬그머니 그 시선을 피해 버렸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백천이 계속 시선을 거두지 않으니 진땀을 흘리던 청명이 결국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 진짜! 잔소리할 거면 그냥 해. 빨리 듣고 끝내게.”
“안 해.”
“아, 알았다고. 내가⋯⋯. 어? 뭐라고?”
“안 한다고.”
바다에 꽂혀 있는 백천의 시선은 영 심드렁했다.
청명은 휘둥그레 떴던 눈을 멍하니 끔뻑였다. 이렇게까지 기다렸는데도 잔소리할 기색이 없는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청명이 고개를 슬쩍 들이밀며 백천의 안색을 살폈다.
“사숙.”
“왜.”
“뭐 잘못 먹었어?”
“⋯⋯.”
“보나 마나 귀에 못박이도록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러자 백천이 청명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리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었냐?”
“⋯⋯.”
“네 생각에는?”
청명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 그럼 됐어.”
백천은 굳이 청명의 행동을 타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타박하지 않는 게 아니라 타박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모르겠는가. 그렇게 오래 겪고, 질리도록 지켜봤는데.
청명은 어떻게든 초전에 승기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확실하게 짓누르는 걸 보여 줘서 상대가 이후로도 쭉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청명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승리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승리하는가니까.
예전의 백천은 그런 청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단발성 전투라면 청명의 그런 태도는 과하다. 하지만 전쟁의 경우는 다르다. 전쟁은 계속해서 이어지니까.
만인방은 반드시 그들의 뒤를 추적할 것이다. 그럼 저 강남 땅을 종단하는 내내 전투를 치러야 한다. 그러니 할 수 있을 때, 될 수 있는 한 확실한 인상을 남기는 게 낫다.
다음에 청명을 마주한 이들이 절로 겁을 집어먹는다면 이어지는 전투가 한결 편해질 테니까.
그렇게 되면 피해를 조금이라도 더 줄일 수 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청명이 입은 몇 개의 상처를 대가로 말이다.
몇 개의 상처와 몇 개의 목숨.
두 가지 중 무엇이 중한가는 비교할 필요조차 없다. 그게 청명의 사고방식이다.
그렇기에 오래도록 그를 지켜봐 온 백천은 안다.
잘못이 있다면 청명에게 있는 게 아니다. 청명은 원래 그런 인간이다. 그걸 몰랐을 때는 청명에게 화를 낼 수 있지만, 익히 알고 있는 이상 모든 잘못은 다름 아닌 백천에게 있다.
뻔히 결과가 예상되는 일에 청명을 밀어 넣었으니까.
그때 청명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또 머리 너무 과하게 굴리는 것 같은데?”
백천이 의아한 듯 슬쩍 미간을 찌푸리자 청명이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사숙은 잘하고 있으니까.”
“⋯⋯고양이 쥐 생각해 주고 있네.”
청명이 낄낄 웃었다. 백천이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너나 착각하지 마라.”
“응?”
“후회하는 것도 아니고, 자책하는 것도 아니다.”
“⋯⋯.”
“애초에 강남으로 향한다고 했을 때부터, 이 정도는 예상했다. 아니, 이보다 더한 일이 벌어질 것도 생각했지.”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입으로 위험을 무릅쓰자고 해 놓고, 이제 와 가슴 아픈 척, 미안한 척할 생각 없다. 다음에 같은 일이 생겨도 나는 주저 없이 네게 앞으로 나서라고 할 거다. 다른 놈들이 나를 개자식이라고 욕하고 침을 뱉는 한이 있어도. 그리고⋯⋯.”
백천이 잔뜩 굳은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게 네게 더없이 위험한 일이 된다고 해도 말이다.”
청명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이내 이가 환히 드러나도록 미소 지은 청명이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야지.”
위에 선 이는 그래야 한다.
제 선택이 가져온 결과에 고통받을지언정, 한 점의 망설임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게 청문이 걸었던 길이고, 청명이 여전히 청문을 존경하는 이유다. 간혹 이견으로 인해 싸웠음에도 말이다.
청문은 세상 누구보다 청명을 아꼈다.
하지만 동시에 청문은 세상 어떤 이보다 망설임 없이 청명을 사지로 밀어넣는 이였다. 청명이 상처를 입고 돌아오는 날이면 고통스러운 마음을 차마 다 숨기지도 못해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다음 날이 되면 또다시 청명에게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리곤 했다.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으니까. 그건 장문이란 직을 짊어진 이가 전시에 반드시 갖춰야 할 비정함이었다.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장문은 더없이 좋은 장문은 될 수 있지만, 훌륭한 장문은 될 수 없다. 제자가 흘릴 피를 두려워해 피를 흘리지 않을 방법만을 찾다가 결국에는 더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리기 때문이다.
한 문파의 장은 결코 사적인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이조차도,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사지로 밀어 넣을 줄 알아야 한다.
다가올 난세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말했잖아, 녹림왕.’
청명이 속으로 읊조리며 웃었다.
이런데 어떻게 기대를 안 하겠는가. 굳이 귀에 대고 말해 주고 설명하지 않아도 백천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역할을 해내야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기억하고 있지? 장문인께 사숙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한다.”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라는 검을 휘두를 사람이라고 했지.”
“잘 알고 있네.”
청명이 살짝 차분해진 눈으로 백천을 응시했다.
“검을 휘두르면서 검이 상할까 걱정하는 이는 검수가 될 자격이 없어. 생각해야 하는 건 오직 하나뿐이지.”
“얼마나 효율적으로 휘두를 것인가.”
“맞았어.”
청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휘두르기를 망설이는 자는 반드시 상처 입는다. 그리고 문파의 수장이 망설인 대가는 그 제자들에게 돌아온다.
백천은 그걸 아는 사람이었다.
“걱정할 것 없다. 그 정도 생각도 없이 시작한 일은 아니니까. 나는 그저 이 모든 일에 온전히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일 뿐이야.”
청명이 막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였다.
“하지만 너도 하나는 알아 둬라.”
“⋯⋯뭘?”
“네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화산을 지키는 거고, 화산의 제자들을 지키는 거겠지.”
“⋯⋯.”
“그걸 위해 너는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런데?”
청명이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백천은 뭔가 말을 하려다 멈칫하고는 입을 닫았다. 그러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말로 해 봐야 소용없겠지. 곧 알게 될 거다.”
“뭘?”
“아니다.”
백천이 청명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도착하면 다시 움직여야 할 테니까. 그때까지라도 좀 쉬어 둬.”
“아니, 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알게 된다니까.”
“이 인간이 사람 답답하게⋯⋯. 어이. 사숙! 야! 야, 인마! 어디 가! 말해 주고 가라고!”
백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청명을 둔 채 걸음을 옮겼다. 청명의 욕설이 귓가로 쏟아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청명도 곧 알게 될 테니까.
선실 쪽으로 향하니 불만 가득 어린 눈으로 노려봐 오는 다른 화산 제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백천의 입에서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조걸이 이를 갈며 말했다.
“사숙. 혼쭐 내 준 겁니까?”
“뭐⋯⋯ 적당히는?”
“그걸로?”
“장난해요? 그 정도로 저 인간이 정신 차리겠어요?”
“혼내는 게 뭔지 시범 한번 보여 드립니까? 예?”
“걸아⋯⋯. 장문대리시다.”
“장문대리니까 더 혼나야⋯⋯. 악! 왜 날 때립니까!”
시끌벅적한 사형제들을 보며 백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청명도 곧 알게 될 거다.
청명에게 있어서 화산은 이들이지만, 이들에게 있어서 화산은 곧 청명이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이들 역시 화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바로 청명이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