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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79화 (1,280/1,567)

1279화. 나는 틀리지 않았어. (4)

듣기에 따라서는 좋은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임소병은 속내를 그대로 터놓는 사람이 아니고, 청명 역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가 아니었다.

“돌려 맥이는 것 같은데?”

“오? 그걸 눈치채셨습니까? 크으, 역시!”

청명이 말없이 고개를 쭉 내밀더니 희게 포말 이는 바다를 물끄러미 보았다.

“뭘 보십니까?”

“그냥 여기다 네 팔다리 묶어서 던지면 얼마나 깊이 잠길까 생각 좀 하고 있었어.”

“⋯⋯.”

“입만 산 사파 새끼면 그것도 너무 호사스러운 죽음이긴 한데⋯⋯.”

임소병이 슬슬 뒤로 물러선다. 청명이 그런 그를 쏘아본 뒤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너는 아무리 바른말을 해도 사람들이 들어 처먹지를 않는데, 나는 개소리를 해도 남들이 그럴싸하다고 믿어 주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붙어 있다?”

“오. 굉장히 적나라한 표현이네요.”

임소병이 쿡쿡 웃고는 입을 열었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도 이유 중 하나이긴 합니다. 살다 보니 세상의 진리 중 하나를 알아 버린 거죠.”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누가 옳은 말을 하는가.”

“⋯⋯.”

“예전에 저는 이 문장에서 ‘옳은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살아 보니 사람들은 ‘옳은 말’이 아니라 ‘누가’에 더 집중하더라고요.”

“그건 그냥 네가 더러운 사파 새끼라 그런 게 아닐까?”

“⋯⋯.”

“사파 새끼가 옳은 말을 한다고 들어 처먹는 게 더 이상하지. 사기 친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 아니냐?”

“거, 씨⋯⋯.”

“뭐?”

“크흠. 아무튼!”

임소병이 크게 헛기침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저 같은 인간이 옳은 말을 하기 위해서는 그 말을 듣게 해 줄 사람이 필요한 겁니다. 그러니 저 원술이나 동탁 같은 놈들에게도 책사들이 붙었던 거지요. 내 말에 관심 없는 세상 사람들을 하나하나 설득하는 것보다는 말 안 들어 먹는 한 사람을 설득하는 게 더 현실적이거든요.”

“아, 그래?”

청명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

“듣고 보니 좀 이상하네.”

“뭐가 말입니까?”

“네 말대로라면 너는 지금 나를 설득해야 하잖아?”

“그렇죠.”

“그런데 어차피 나는 안 들어 먹을 걸 안다면서?”

“그도 그렇죠.”

“그럼 앞뒤가 안 맞잖아.”

“확실히 그렇습니다.”

임소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청명의 지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청명의 눈빛에 순간 ‘이 새끼가 맛이 갔나?’ 하는 의구심이 스쳤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그것도 다 이유가 있으니까.”

“응?”

“역사를 보면 꽤 흔한 일입니다. 똑똑하기 짝이 없는 책사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어처구니없는 군주의 선택을 따라가는 일 말입니다.”

“그런 일이 있어?”

“꽤 흔하죠.”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그래서 보통 그런 경우, 역사가들은 윗놈들이 권력으로 책사를 찍어 눌렀다고 해석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당연히 그런 줄 알았고요.”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는 건가?”

“예. 머리가 굵어진 후로 혼자 조사를 좀 해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더군요. 천하에 명성을 날렸던 책사들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판단이 아닌 군주의 판단대로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설령 자신의 원칙과 맞지 않아도 말이죠.”

“왜?”

무언가에 취하기라도 한 듯 주절거리던 임소병이 불현듯 입을 다물더니 청명을 빤히 보았다. 그 눈빛이 무거워서 청명은 저도 모르게 침묵했다.

“왜일 것 같습니까?”

“글쎄⋯⋯.”

“사실 예전에는 저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해하게 되더군요.”

“뭘?”

“책사도 사람이란 걸요.”

“⋯⋯응?”

임소병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책사는 가장 냉정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주변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감정에 흔들리지 않아야 하고,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어서는 안 되지요. 예. 그래야 훌륭한 책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이죠. 그런 책사도 결국에는 사람인 겁니다.”

“⋯⋯.”

“감정을 품고, 흔들리기도 하고, 혹시나 하는 기대도 품어 보는. 다시 말하자면⋯⋯.”

임소병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했다.

“그 사기꾼 놈 말에 속아 보고 싶어지는 건 책사도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임소병이 낄낄대며 웃더니 물었다.

“책사가 가장 지옥으로 느끼는 순간이 언제인 줄 아십니까?”

“⋯⋯글쎄?”

“내가 세운 계획이 모조리 어긋나는 순간입니다. 그럼 책사가 가장 즐거워하는 순간은 또 언제인지 아십니까?”

“⋯⋯그것도 모르겠는데.”

“바로 내가 세운 계획이 모조리 어긋나는 순간입니다.”

가만 듣고 있던 청명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그 표정을 본 임소병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해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말이라고 해?”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다. 책사는 자신의 계획이 착착 맞아떨어지는 것에 말로 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계산의 영역을 넘어선 무언가가 현실에서 벌어지는 걸 한없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전혀 이해가 안 가는데?”

“도장은 그럴 겁니다. 그걸 본 적이 없으니까요.”

임소병의 두 눈에 묘한 빛이 피어났다.

“책사도 처음부터 그런 걸 느끼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반대했던 계획을 누군가가 밀고 나갔는데, 그게 머리로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을 뛰어넘은 무언가를 만들어 낼 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되죠.”

“⋯⋯.”

“그래서 때때로 기대하게 되는 겁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개소리지만, 그 개소리가 정말 상황을 뒤바꿀지도 모르겠다 하면서요.”

청명이 임소병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대부분 상황에서는 그냥 개죽음으로 끝나겠지만 말이죠.”

“⋯⋯.”

“그래서 말리지 않는 겁니다. 어쩌면 이 선택이 나를 개죽음으로 몰아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개죽음을 피한다면 맞이하는 건 합리적인 죽음뿐이니까요.”

청명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인 죽음이라는 말이 그리 틀리지는 않았다. 지금 천우맹의 힘으로는 사패련과 마교를 감당할 수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리고 상식적으로 움직인다면 그들이 맞이할 수 있는 건 정당하고 응당한 죽음뿐이다.

“말은 그럴싸하게 했지만, 결국은 도박이다. 이 말이잖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임소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책사는 합리의 선에서 생각합니다. 그건 거꾸로 말하면 합리의 영역을 벗어난 상황은 계산하기 힘들다는 거죠. 솔직히 저는 이 상황에서 천우맹이 사패련과 구파일방, 마교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 같은 건 모릅니다. 그게 가능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냉정한 말이었다. 하지만 세력 간의 구도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는 책사로서는 더없이 합당한 말이기도 했다.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은 따로 있겠죠.”

“⋯⋯.”

“철저하게 비이성적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내세운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임소병은 잠깐 침묵하더니 웃었다.

“어쩌겠습니까? 길이 그것뿐이라면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요.”

조용히 듣고 있던 청명이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눈앞의 책사는 자기가 하는 말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으면서도 무시해 버리는 걸지도 모른다.

“오해하는 모양인데⋯⋯.”

“예?”

“나는 그런 사람이 아냐.”

청명이 바다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나에게 가진 기대가 뭔지는 알겠는데,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기대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기대를 하는 사람이지. 그러니까 검일 수밖에 없는 거야.”

청명의 시선이 갑판 쪽으로 흘끗 돌아갔다. 이리저리 둘러앉은 해남의 제자들이 아닌, 갑판에 막 나오고 있는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서.

“이끌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지.”

“흐음.”

임소병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그게 언제까지일까요?”

“음?”

“자신의 역할을 착각하는 사람이란 참 재미있습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혼자서만 제 역할을 한정해 규정 짓는 사람 말입니다.”

청명은 무표정하게 다시 시선을 바다를 향해 되돌렸다.

“설명해 봐야 넌 모를 거야.”

“아니요. 압니다.”

“⋯⋯뭐?”

임소병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당신이 얼마나 자신에게 가혹한지 말이죠.”

청명의 눈빛이 살짝 어둑해졌다.

“솔직히 저는 당신의 과거에 뭐가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겪었다는 것만 알죠. 그리고 그건 아마 저기에 있는 화산의 제자들도 모두 짐작하고 있을 겁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뿐이지.”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모순적이라는 거죠.”

“모순?”

“예.”

임소병이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 이끄는 자가 못 된다고 단정하는 건 경험에서 나온 게 아닙니까? 제가 짐작할 수는 없지만, 당신은 아는 그런 경험이요.”

“그래.”

“그리고 저들은 이끌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저들이 성장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 아닙니까?”

“맞아.”

청명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임소병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청명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게 모순이라는 겁니다.”

“뭐가?”

“물론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저들은 굉장한 속도로 성장하고 있죠. 언젠가는 강호를 이끄는 이들이 될 겁니다.”

“⋯⋯.”

“하지만 그걸 기다리느니 차라리 당신이 그리되는 쪽이 빠르지 않습니까?”

“⋯⋯뭐?”

순간 청명은 한 대 맞은 듯 멍하니 임소병을 보았다.

“이제 겨우 애송이 티 벗은 저들이 강호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 때까지 성장하도록 기다리느니, 지금 앞서 있는 당신이 사람을 이끌 수 있게 되는 쪽이 훨씬 더 합리적일 것 같은데요.”

“그건⋯⋯.”

“그래서 재밌다는 겁니다.”

임소병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당신은 다른 이들이 가진 가능성은 모두 끌어내서 평가하면서 스스로에게는 지독할 정도로 박해요. 마치 이미 싸늘해진 시체를 평하는 것처럼, 더 성장할 수도 없고, 더 나아갈 수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

“물론 자기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개인의 자유지만, 그런 당신의 평가를 우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임소병의 목소리가 청명의 귀를 파고들었다.

“다만, 한 가지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에 대한 그 평가가 화산과 천우맹의 미래를 갉아먹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다른 이들이 당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도.”

청명이 입을 꾹 닫았다.

그 표정을 본 임소병도 더는 이야기를 이어 가지 않았다. 그는 말을 아끼는 사람이 아니지만,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영역이 청명에게 있어서는 금역(禁域)과도 같다는 걸 모를 이가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이 아직 많지만⋯⋯.”

임소병이 고개를 돌려 이쪽으로 다가오는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전문 잔소리꾼이 나타났으니 저는 이만 빠지지요.”

그 말에 청명 역시 슬쩍 시선을 돌렸다. 백천이 다가오고 있었다.

임소병이 씩 웃으며 물러나니 백천은 말없이 임소병이 있던 자리에 섰다. 그리고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았다.

청명도 백천도 한동안 말없이 그리 바다만 하염없이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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