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8화. 나는 틀리지 않았어. (3)
촤아아아아.
꽤 거칠어진 파도가 배에 부딪히며 흰 포말을 일으켰다. 청명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답답하군.’
제 발로 달려 나가는 것이라면 다리에 박차를 가하면 되고, 말을 타고 가는 거라면 말을 재촉하면 될 일이지만, 바람이 밀어다 주는 배를 타고 이동하는 건 사람의 힘으로는 속도를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강남 땅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는 그냥 이렇게 멍하게 시간을 때워야 한다.
‘하여튼 이런 건 영 적성에 안 맞는다니까.’
어찌 보면 이건 실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 자연스러움 앞에 답답함을 느낀다니, 애초부터 청명은 도사가 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인지도 모른다.
“생각이 많아 보이시네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청명이 고개를 돌렸다. 녹림왕 임소병이 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아니면 생각이란 게 없으시거나.”
“⋯⋯.”
“어느 쪽이시죠?”
“이쪽 같은데?”
청명이 턱짓으로 제 주먹을 가리키자 녹림왕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피식 웃어 버린 청명은 다시 바다를⋯⋯. 아니, 정확히는 바다 너머의 강남 땅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걸리지?”
“글쎄요. 지금 같은 속도라면 한밤중에야 도착하겠군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군.”
“뭐. 도장께서 잘하시는 대로 헤엄이라도 쳐서 가면 금방이겠지만⋯⋯.”
임소병이 갑판 쪽으로 흘끗 시선을 주었다. 해남의 제자들이 여기저기 뭉쳐 앉아 쉬고 있었다. 탈진해 버린 말들처럼 말이다.
“그랬다가는 저 양반들은 완전히 뻗어 버릴 테니까.”
“흠.”
청명이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임소병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았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청명은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임소병은 애초에 대답을 들을 생각으로 물은 게 아닌 듯 태연히 말을 이었다.
“물론 저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인 사람이지만, 그쪽은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 아닙니까?”
“누가 들으면 자기 뒈지는 건 상관없는 줄 알겠네.”
“윗사람 잘못 만나서 뒈지는 건 책사에게는 그냥 자연사입니다. 책사라는 족속들은 원래 그렇게 뒈지는 거지요.”
“⋯⋯그게 녹림왕이 할 말이야?”
“녹림왕이고 나발이고 뭐가 어떻습니까? 제가 생각한 제 천우맹에서의 역할이 그게 맞는데.”
청명은 작게 웃어 버렸다. 하여튼 정말 특이한 인간이다.
그러나 임소병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청명이 특이한 인간인 모양이었다.
“물론, 도장께서 하시는 일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임소병이 조금 서늘한 눈으로 해남의 제자들을 훑어보았다.
“모르겠습니다. 저런 짐덩이들을 굳이 끌고 간다고 해서 과연 도움이 되기나 할까요?”
“⋯⋯.”
“구파일방 중 하나인 해남을 천우맹에 끌어들일 수 있다면 대외적으로 커다란 상징은 되겠으나⋯⋯. 글쎄요. 명분이란 건 나중에 힘이 되기 때문에 명분인 것이죠.”
임소병이 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멀리 있는 명분보다 당장 앞에 있는 실리를 우선시하는 사람들이 꼭 잘못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딱히 없습니다.”
임소병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묻고 싶은 것뿐이지요. 제대로 칼도 휘둘러 보지 못한 주제에 세상 전투는 혼자 다 치른 양 탈진해서 나가떨어진 저 어설픈 것들을 살리는 게 과연 도움이 될까 하고 말이죠.”
그 말에 청명 역시 해남의 제자들을 일별했다. 기진맥진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평생 피 볼 일 없이 살았던 이들이 눈앞에서 사람의 목이 잘려 나가고, 팔다리가 허공에서 흩날리는 광경을 직면했는데 충격을 받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특히나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청명도 알고 있다. 임소병의 지적도 그리 틀리지 않다는 걸 말이다.
변명거리가 있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청명은 저 전투가 뭔지도 모르는 애송이들을 데리고 강남을 돌파해야 한다. 저 사패련이 버티고 있는 강남을 말이다.
“반대할 거면 미리 반대하지.”
“반대한다고 제 말을 들어주신 적은 있습니까?”
임소병이 부채 끄트머리로 제 턱 언저리를 긁적였다.
“책사란 기본적으로 비효율적인 걸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반대해 봐야 달라질 게 없는 걸 알면서도 굳이 반대하는 건,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지요. 쓸데없이 입만 아프고.”
그러자 청명이 말없이 임소병을 빤히 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청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서.”
“어디 한둘이었겠습니까?”
“그러게 말이야.”
- 말해 봐야 뭐 합니까? 어차피 사형하고 싶은 대로 할 거면서! 내가 차라리 소귀에 경을 읽지!
청명이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바락바락 소리를 치던 청진이 놈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래도 청명은 그때와 딱히 달라진 게 없는 모양이다. 스스로는 참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래도 말하면 뭐가 달라질지도 모르잖아.”
“글쎄요.”
임소병이 묘한 눈빛으로 청명을 보며 말했다.
“단순히 고집을 부리는 거라면 그럴지도 모르겠죠.”
“⋯⋯.”
“하지만 이건 단순한 고집이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청명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은데.”
“물론 그럴지도 모르죠. 아니, 뭐 솔직히 그럴 확률이 훠어얼씬 더 높은 건 저도 아는데.”
⋯⋯근데 이 새끼가? 청명이 임소병을 조용히 노려보자 임소병은 금세 먼 바다를 보더니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더니 다시 조용히 말했다.
“그럼에도 막지는 못하겠단 말입니다.”
“왜?”
이유를 묻는 말에 잠깐 침묵하던 임소병이 대뜸 다른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옛이야기를 듣거나, 역사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뭔데?”
“제일 똑똑한 사람들이 멍청한 인간들 밑에서 개고생을 하다가 결국 뒈지는 거였죠.”
“⋯⋯.”
“본디 책사란 그 시대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역임하는 자리입니다. 그럼 그 사람들이 내린 결론이 가장 정답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그 윗대가리란 것들은 항상 그 말을 들어 처먹지를 않다가 폭삭 망하고, 나중에 가서야 후회를 하더라 이 말이지요. ‘아아. 내가 그때 그 말을 들었어야 하는 건데.’라는 뻔한 대사나 늘어놓으면서 말이죠.”
“지금 나 까는 거야?”
“쯧. 좀 끝까지 들어 보십시오.”
청명이 영 못마땅한 얼굴로 흘겼지만 임소병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 상황을 보며 제가 느낀 가장 큰 의문이 뭐였는 줄 아십니까?”
“⋯⋯윗놈들은 왜 말을 안 들을까?”
“그건 아닙니다. 윗놈이야 원래 말을 안 들어 처먹는 머저리 같은 것들이지요. 원래 그런 놈들이 대가리가 되는 겁니다. 애초에 멍청하게 난 놈들을 멍청하다고 욕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냥 태생이 멍청한 거⋯⋯. 아, 아니! 댁 욕 아니라고! 주먹 내려놓으라고!”
“⋯⋯조심해라, 너.”
청명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말하자 임소병이 히죽 웃었다.
“어쨌든 답답했던 건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왜 저런 인간들 밑에서 상식적이지도 않은 짓을 하면서 개고생을 하는가였죠. 그냥 자기가 세력을 만들면 되는 건데.”
청명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서?”
“그래서 생각한 거죠. 나는 저런 짓은 하지 말아야지. 나는 내 말만 듣는 내 세력을 만들어서 저 멍청한 놈들이 이끄는 세력을 모조리 개박살 내 줘야지!”
“그것 때문에 녹림왕이 됐다고?”
“뭐⋯⋯. 그건 반쯤은 떠맡은 거지만요.”
실제로 떠맡긴 했지만, 정말로 그가 녹림왕이 되기 싫었다면 방법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스스로 해 보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럼 생각한 대로 했으면 됐잖아.”
“예. 당연히 생각대로 했었죠. 그런데 곧 알게 되더라고요. 그게 얼마나 현실을 모르는 애송이의 망상이었는지.”
임소병이 짜증 난다는 듯 세게 혀를 찼다.
“맞는 말을 하면 뭐 합니까? 귓등으로도 듣질 않는데. 옳은 방법을 이야기해도 책상물림의 헛소리라고 무시하고.”
“⋯⋯.”
“설득이요? 아, 하면 되죠. 당연히 해 봤죠.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애초에 하질 않더라고요. 아홉 개 맞는 이야기를 해도 하나가 살짝 어긋났다고 그걸 물고 늘어지며 제 말이 다 틀렸다고 지껄여 대는데, 성질 같아선 확 진짜⋯⋯!”
“못 이기잖아?”
“⋯⋯그래서 참았죠.”
청명이 축 늘어진 임소병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고생했네.”
“⋯⋯말도 마십쇼.”
임소병의 질린 얼굴을 보며 청명은 낄낄 웃었다.
사실 냉정히 봤을 때 임소병의 무력은 부족한 편이 아니다. 하지만 녹림왕이란 이름에 맞는 정도도 아니라서 문제였다. 게다가 그는 얼마 전까진 제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병자였다.
약육강식의 원리에 그 어디보다 충실한 녹림이라는 곳에서 임소병의 말이 먹혀 봐야 얼마나 먹혔겠는가?
그가 어떤 고생을 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처음엔 선대에 충성한 녹채를 제외하면 다들 임소병을 제대로 녹림왕 취급도 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나이가 들고 무력이 높아지면서 목소리는 커졌을 텐데?”
“적당히 녹림이나 먹고 마는 게 목표였으면 그럴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래서 뭐가 달라집니까? 선대보다 못한 멍청한 녹림왕이 되는 거죠.”
“하기야.”
임소병이 청명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럴 때 본 거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 대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결론을 내리고, 어처구니없는 도박을 반복하고, 딱 객사하기 좋은 얼간이⋯⋯. 아, 아니. 그냥 예전에 그랬다고! 예전에! 콜록! 콜록! 아이고, 병이 도져⋯⋯.”
“⋯⋯.”
“그런데도!”
임소병이 히죽 웃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판단을 내리고, 사지로 걸어 들어가겠다는데도 주변의 사람들이 그 길을 기꺼이 따르는, 그런 인간이 있더라고요.”
“⋯⋯.”
“그때 알게 된 거죠. 아. 그런 사람은 애초에 따로 있구나, 하고.”
청명은 이번에도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과대평가야.”
“물론 그렇겠죠.”
⋯⋯근데 이 새끼가?
“그런데 말입니다.”
“응?”
“그 과대평가를 하고 있는 게 저뿐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임소병이 해남의 제자들을 향해 작게 턱짓했다. 청명도 덩달아 그들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해남에서 얌전히 잘 먹고 잘 살던 이들이 어디서 굴러들었는지도 모를 양반이 길 하나 제시해 줬다고 평생 살아온 해남을 떠나 사지로 걸어 들어가고 있네요. 죽어도 거기서 죽겠다고.”
“⋯⋯.”
“이게 논리로 가능한 일이라고 보십니까?”
“그게 가장 옳은 길이니까.”
“그게 중요한 거죠.”
임소병이 낄낄대며 웃었다.
“사람이 옳은 길만 선택하고 산다면 세상에 전쟁 같은 건 없습니다. 옳은 길을 안다고 행할 수 있다면, 세상은 선의로 가득하겠죠. 그런데 막상 세상은 어떻습니까?”
“⋯⋯.”
“도장은 남들이 모르는, 대단하게 옳은 길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임소병이 씩 웃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차마 걸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길을 제 발로 걷게 만드는 사람인 거죠.”
임소병의 시선이 청명을 넘어 강남으로 향했다.
“설사 그 길의 끝이 사지라 해도 말입니다.”
침묵을 지키던 청명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