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7화. 나는 틀리지 않았어. (2)
고홍이 복잡한 눈으로 유공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어린 강한 원망에, 유공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사형⋯⋯.”
“형님이라 불러라.”
유공이 짧고 싸늘하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해남의 제자가 아니다.”
“⋯⋯예, 형님.”
고홍은 제 옆에 선 다른 해남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마을 청해촌(淸海村)은 해안에 인접한 마을 중에서도 가장 큰 곳이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는 하산한 해남의 제자들이 여럿 머물고 있었다. 지금 유공은 그들을 모두 소집한 것이다.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배를 몰아야 한다.”
“아, 아니, 형님!”
고홍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리는 해남 출신입니다. 저 배를 타게 되면 무슨 꼴을 당할지 정말 몰라서 그러시는 겁니까?”
다른 해남의 제자들도 말만 안 했을 뿐, 고홍과 같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원망 어린 눈빛을 받으면서도 유공은 차게 답했다.
“그럼?”
“예?”
“여기서 다 죽을 테냐?”
그 말에는 모두가 입을 닫았다. 유공은 씹어뱉듯 말을 이었다.
“우리만 죽고 끝나는 일이면 고민이라도 해 보겠지.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런 게 아니지 않으냐.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을 판인데, 뒤에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으라는 말이냐?”
“하, 하지만 사형. 아니, 형님!”
고홍은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저희가 배를 몰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능숙한 편은 아니잖습니까?”
“그래도 몰 수는 있지.”
“아니⋯⋯ 그런 식이면⋯⋯.”
“그럼?”
유공이 고홍의 말을 끊어 버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무학도 할 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을 저 배에 태우겠다는 거냐?”
“그, 그건⋯⋯.”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다른 사람도 하기 싫다. 적어도 우리는 상황이 위험해지면 배에서 뛰어내려 달아나 볼 수라도 있겠지. 강남 땅에 들어서도 상황이 영 아니다 싶을 때 도망이라도 쳐 볼 수 있다.”
“⋯⋯.”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럴 힘이 없잖느냐?”
고홍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해남의 남자들은 숙련도에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 다들 웬만큼은 배를 몰 줄 안다. 그건 해남파의 제자들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배를 모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정말로 큰 문제는, 그들이 몰아야 하는 배가 다름 아닌 사패련이 탄 배고, 그들이 배를 몰아 쫓으려 하는 게 이곳에 모인 이들이 저버린 해남파라는 점이었다.
“긴말할 것 없다.”
유공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애초에 우리가 해남에서 하산한 이유가 마을에 남아 있는 가족들 때문 아니었더냐? 이제 와 고민할 이유도 없는 일이다.”
“말이야 맞지만⋯⋯.”
그때, 묵묵히 유공의 말을 듣고 있던 담환(譚還)이 삐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새삼 왜 이래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뜻이냐?”
“그럴싸한 말이지만, 사실 저희 말고 다른 사람들이 가도 되는 것 아닙니까. 배를 몰 사람만 있으면 되는 거고, 이 마을에는 저희 말고도 배를 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유공이 질책하듯 묻자 담환은 아예 대놓고 비웃으며 말했다.
“잘난 척하지 마십시오, 사형.”
“뭐?”
뜬금없이 터져 나온 말에 유공의 눈에 순간 분노가 어렸다. 하지만 담환은 겁을 집어먹기는커녕, 오히려 더 삐딱하게 나왔다.
“우린 살겠답시고 사문이고 사형제고 모두 내버리고 도망친 사람들 아닙니까?”
유공이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닫았다.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저 말이 틀리지 않단 걸 그가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와 뭐 대단한 선의와 협의가 있다고 목숨까지 걸어야 한단 말입니까? 그럴 거면 해남에서 하산하지도 않았지요.”
“이놈이⋯⋯.”
“저는 안 할 겁니다.”
“담환!”
담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하산을 망설이던 우리에게, 우리가 죽고 나면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되겠냐고 했던 건 다름 아닌 사형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제 손으로 해남의 문적에서 제 이름을 파냈습니다. 평생 떠나지 않으리라 했던 해남을 제 발로 나왔단 말입니다!”
“⋯⋯.”
“그런데 이제 와 다시 목숨을 걸라고요? 이제 와 옳은 일을 하라고요? 왜 그래야 합니까? 제 목숨부터 챙기는 게 옳다고 말씀하신 건 바로 사형이 아닙니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으냐?”
“정말 상황이 다릅니까?”
“⋯⋯.”
“정말요?”
유공이 입을 닫았다. 그는 분명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따지고 들어 결론을 낼 수 있을 만한 문제가 아니다.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바가 다르니까.
그러자 담환이 입꼬리를 올리며 조소했다.
“문파고 사형제고 모두 내버리고 나 살겠다고 도망친 위인들에게 새삼스레 지켜야 할 양심이란 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양심 따지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왔잖습니까? 비열한 인간은 비열한 인간답게 살아야지요. 배를 타고 가시든 말든 사형들은 알아서 하십시오. 제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가겠지요.”
“그게 누구라도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냐? 여기는 우리가 자란 마을이다.”
“해남파도 우리가 자란 곳이었어! 빌어먹을!”
담환이 격하게 고함을 내지르자 유공이 흠칫하며 몸을 살짝 떨었다. 독기 어린 눈으로 유공을 노려보던 담환이 이를 갈았다.
“그렇게 남을 위하는 척할 거면 해남에서 검이나 휘두를 것이지 여기까지 와서 뭐 하는 짓거리야! 차라리 저기서 같이 싸우기라도 했으면 적어도⋯⋯.”
담환은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 무슨 말을 하건 의미가 없단 생각 때문이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유공이 옆구리를 찔렀다고는 하지만, 결국 선택한 건 그 자신이라는 걸.
그리고 그 선택의 대가도 온전히 그가 져야 한다는 걸 말이다.
“⋯⋯어쨌든 저는 안 합니다. 알아서 잘해 보십시오. 어차피 저는 배 다루는 실력도 별로니 도움도 안 될 겁니다.”
담환이 냉정하게 몸을 획 돌렸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서선 말했다.
“아, 그리고⋯⋯.”
“⋯⋯.”
“죄책감이라는 건 그런다고 덜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럴 거면 애초에 죄를 짓지 말았어야죠.”
그 말을 끝으로, 담환은 신경질적인 걸음걸이로 멀어져 갔다.
유공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뗐지만 결국 깊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 틈을 타 다른 목소리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저, 저도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형.”
“저도요. 아시다시피 아버님이 병환이 있으신데 제가 자리를 비우면 돌볼 사람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다른 제자 둘도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발을 뺐다. 혹시 유공이 잡기라도 할까 봐 후다닥 달아나며 뒤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유공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파르르 떨리는 주먹이 지금 그의 심경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킨 유공이 고홍을 바라보았다. 고홍은 불만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너는 안 가느냐?”
“저요?”
“너도 병든 노모가 있지 않으냐?”
“노모요?”
고홍이 삐딱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발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고홍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안 그래도 사형이 부를 때부터 이 꼴이 날 줄 예상했습니다.”
“⋯⋯.”
“그래서 어머니께 몸을 좀 빼야겠다고 하니까, 그 병드신 노모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모르겠다.”
“당신이 짐이 될 거면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을 거랍니다.”
유공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해남의 여인은 그렇다더군요. 눈 뜨면 같이 살던 남편이 바다에 빠져 죽고, 또 하루 잤다 눈 뜨면 자식 중 하나가 물고기 밥이 되고.”
“⋯⋯.”
“그래도 손가락 빨고 슬퍼하며 기다리는 게 아니라, 물질이라도 해서 남은 자식 먹여 살리고 이를 악문 채 악착같이 살아가는 게 해남의 여인이랍니다. 그러니 자식 놈이 당신 핑계로 바다에 나가기 싫다고 엉덩이나 빼는 꼴은 못 보신답니다.”
고홍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실 웃었다.
“말 두 마디 내뱉을 때마다 그렇게 기침해 대시며 말입니다.”
“⋯⋯.”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는 거지요. 저 배를 몰아 나가면 마을 사람들은 살아도, 내 손으로 사형제를 죽이는 꼴이 되는 건데.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고홍⋯⋯.”
“그래도 뭘 어떡합니까? 정신 나간 노인네 상대하려면, 멀쩡한 놈이 그 정신에 맞춰 줘야지. 적어도 당신 아들놈이 겁쟁이라 남들을 사지로 내몰았단 소리는 죽기 전에 안 듣도록 만들어 드려야 할 거 아닙니까. 다 안 간다면 몰라도 사형은 갈 모양인데.”
“그게⋯⋯.”
“네 아비는 너를 먹여 살리려고 용감하게 바다에 나갔다가 죽었다, 그러니 평생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혼자 아들을 먹여 살려 당당한 해남파의 제자로 만들었음을 자랑스러워하시는 분이지요. 어머니는 제가 해남에서 하산한 것도 모르십니다. 그런데⋯⋯ 제가 그 앞에다 대고 어떻게 못 가겠다고 합니까.”
유공은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고홍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해남에 남을 걸 그랬습니다. 내가 뭐 하자고 해남을 나와서⋯⋯.”
유공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슬쩍 숙였다. 묘한 침묵이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이 어색함을 털어 내고자, 유공은 남은 다른 제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너는?”
“뭐, 비슷합니다.”
“⋯⋯그래.”
유공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대화를 이어 봐야 좋을 상황도 아니고, 그럴 만한 여유도 없다. 우선은 할 일을 해야 했다.
“저놈들이 안 가겠다고 했으니, 원래 예정보다 사람을 더 뽑아야겠다. 각 배에 적어도 둘 이상은 탈 수 있게 해라. 우리가 타는 배는 한 사람만 타는 걸로 하고.”
“예, 사형.”
“⋯⋯알겠습니다, 형님.”
“움직이자.”
재빠르게 달려 나가는 사제들을 바라보며 유공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바다는 무심하리만치 푸르기만 했다.
“준비 끝냈습니다.”
“오래 걸렸군.”
호가명이 어두운 눈으로 유공을 바라보았다.
“⋯⋯빨리 끝난 겁니다.”
“흠.”
호가명은 그럭저럭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배를 잘 모는 이들을 선별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시간이 지체된다면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
“출발하지.”
“⋯⋯예.”
유공이 몸을 돌려 배로 향했다. 다른 이들은 이미 배에 타고 있었다. 그만 배에 오르면 출발하게 될 것이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던 유공은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해안가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감사를 담아 그를 바라보는 이들부터, 시큰둥한 얼굴로 지켜보는 이들, 거기에 적대감 어린 눈으로 바라봐 오는 그의 사제들까지.
그중 한 곳에 유공의 시선이 멈춘다.
그의 아내가 흠뻑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품에 안긴 어린 아들까지 눈에 똑똑히 담은 유공은 그 모습이 빠져나가기라도 할세라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살아서 돌아온다.’
반드시⋯⋯.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것이다.
무슨 일을 해서든.
유공이 배에 오르는 모습을 본 혈검단주 괴량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호가명에게 물었다.
“굳이 저런 놈들을 데리고 갈 필요가 있나? 오히려 방해될 것 같은데?”
“모르는군.”
“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적이 아니다.”
“⋯⋯.”
“바로 배신자지.”
그 말을 들은 괴량은 조금 흥미가 동한 듯 유공의 등을 보았다. 웃음기 섞인 호가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특히나 죄악감을 품은 배신자만큼 지독한 놈들은 없지. 곧 너도 알게 될 거다.”
호가명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