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6화. 나는 틀리지 않았어. (1)
"뭐라고 했지?"
호가명이 나직이 되물었다.
원래도 호가명은 그리 인상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으나, 표정이 워낙에 냉하고 날카롭다 보니 보는 사람을 지레 겁먹게 했다.
그런 호가명이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니 보고하는 입장에서는 심장이 덜컥거릴 수밖에 없었다.
“배, 배는 인근 마을들에서 징발했습니다. 원래 타고 온 것만큼 커다란 배는 구할 수
없었습니다만, 적당한 크기의 배를 여러 척……"
"본론만."
보고하던 이가 마른침을 삼켰다.
“육지에서 데려온 선원들이 저희가 징발한 배를 모는 것은 어렵다고 합니다."
호가명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이해가 안 가는군. 선원은 배를 모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왜 배를 모는 게 어렵다는 거지?"
"그, 그들의 말로는 해남도의 배가 자신들이 몰던 배와 구조가 달라서 모든 게 쉽지 않다고 합니다.”
호가명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도를 쓰는 무인이, 쓰던 것과 다르게 생긴 도는 잡고 휘두르기 어렵다고 우기는 모양새가 아닌가?
“책임자를 불러와라."
"이, 이리로!"
호가명이 이리 말할 줄 알았는지, 보고하던 이가 즉각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그러자 한쪽에서 있던 장정 하나가 후다닥 달려와 호가명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처, 천한 놈이 군사님을 뵙..….”
"됐다."
호가명이 허례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사내의 말을 잘라 버렸다. 그러자 안 그래도 창백했던 사내의 얼굴이 더욱 희게 질렸다.
“배를 몰지 못한다 했다고?"
“……예․ 그, 그렇습니다."
"이유는?"
호가명이 싸늘한 눈으로 선원을 바라보았다.
“손에 맞지 않는 배는 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는가?"
“아, 아닙니다. 군사 어른!"
선원이 머리를 바닥에 닿도록 조아렸다.
“쇤네가 아무리 천한 무지렁이라고는 하지만, 평생 배만 몰아 왔습니다! 그런데 어찌 몰 수 없는 배가 있겠습니까?"
호가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 말이 맞다.
“그럼?”
“하, 하지만 해남의 배는 저희에게 익숙지 않은 배입니다. 태풍이 지나갔다고는 하지만, 파도가 여전히 높고, 지금은 역풍도 불고 있습니다. 이러면 저희가 모는 배는 평소보다 늦을 수밖에 없습니다."
"늦다?"
"예. 적어도 육지에 닿기까지 한나절 이상은 더 소요될 것으로……"
"한나절이라...…”
여유가 있다면 느긋하게 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에게 유일하게 없는 것이 여유다.
한나절이면 저들이 광동을 빠져나가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래서 못 몰겠다?"
“모, 몰라고 하시면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는 건 감안해 주셔야......”
호가명이 피식 웃었다.
“똑똑하군. 그러니 젊은 나이에 대표로 왔겠지.”
저 선원이 배를 못 몰겠다고 한 것은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다. 이 말을 하지 않고 배를 몰아 나갔을 때 생각 이상으로 시간이 지체된다면 당연히 폭급한 만인방의 방도들이 저들에게 책임을
물으려 할 터.
이자는 지금 그때 늘어놓을 변명거리를 호가명에게 공인받으려 드는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오히려 이자에게 상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제 입장을 궁리하고 해결책을 내어 놓는 자는 호가명이 제일 좋아하는 유형의 인간이니까.
하지만 지금 호가명이 느끼는 건 감탄보다는 짜증이었다.
'일이 꼬이는군.'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손끝으로 제 볼에 감긴 붕대를 매만졌다. 마른 붕대가 끈적한 액체로 축축하게 젖어든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군사! 제가 이들을 닦달하겠습......"
“그럴 필요 없다.”
호가명이 보고하는 이의 말을 자르고 사내에게 물었다.
“너희는 이 배가 익숙지 않다는 것이군. 맞나?"
"예."
"그럼 익숙한 사람을 부르면 되겠지."
호가명의 입꼬리가 슬쩍 뒤틀렸다.
"듣자 하니, 해남의 사는 이들은 모두가 선원이라더군. 맞나?"
“모두는 아니더라도, 배를 몰 줄 아는 이가 둘 중 하나는 될 것입니다."
호가명이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돌렸다. 해안과 인접해 있는 커다란 어촌이 보였다.
"모조리 끌고 와라. 한 사람도 남김없이."
“예!”
호가명이 눈이 어둡게 일렁였다.
모여든 마을 사람들은 불안한 눈초리로 주위를 에워싼 이들을 바라보았다.
만인방, 그 이름만으로도 심약한 이는 심장이 쿵쾅거릴 수밖에 없다. 이 강남에서 사패련과 만인방의 이름이 주는 공포는 그만큼이나 거대하다.
"초, 촌장님."
"조용히......”
누군가가 겁에 질려 입을 열려 하자 마을의 촌장인 종(宗) 노인이 재빨리 단속했다. 그리고 주위를 보며 상황을 살폈다.
'이게 무슨 일인가?'
그가 보기에는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다. 그들을 모은 만인방의 무인들이 하나같이 악에 받쳐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 모였나?"
"그, 그렇습니다. 이 마을에 있는 이들은 이게 전부입니다."
종 노인이 대답하자 호가명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촌장인가?"
“그, 그렇습니다.”
호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배를 육지까지 몰아 줄 이들이 필요하다."
그 말에 촌장은 해안에 정박 되어 있는 배들을 흘끗 바라보았다.
"해남의 배니 해남 사람이 가장 잘 몰겠지."
호가명의 말을 들은 이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배, 배를 몰아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호가명은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붙였다.
"그것도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먼저 간 배를 쫓아야 한다."
이곳에 있던 이들 중 몇몇은 지금 만인방이 원하는 게 뭔지를 이해했다.
'해남이구나.'
해남파가 배를 탈취했던 해안은 이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해남파가 해안에서 무언가를 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이들도 있었다.
촌장, 종 노인의 얼굴에 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육지……까지 가야 하는 겁니까?"
"그렇다."
"그럼 그 뒤에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노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말로야 배만 몰아 주면 된다고 하지만, 막상 저들과 함께 배에 오르고 나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운이 없다면 육지에 몇 달이고 잡혀 있을 수도 있고, 더 운이 나쁘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대체 누가 선뜻 나서려 하겠는가? 더구나 지금 만인방이 하려는 건 해남파의 뒤를 쫓는 일이다.
“하지만…… 영웅님들."
노인의 두 눈에 간절한 빛이 어렸다.
“저, 저희는 태풍 때문에 몇 날 며칠 배를 곯았습니다. 안 그래도 배까지 가져가시는데, 장정마저 데려가시면 저희는……”
호가명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사람 몇 데리고 간다고 모두 굶어 죽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머, 멀쩡한 배는 다 가져가시는데 저희가…….”
"그만."
호가명은 깔끔하게 촌장의 말을 잘랐다.
“나는 논쟁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즐기는 사람에 가깝지. 하지만 지금은 쓸데없이 논쟁으로 낭비할 시간이 없다."
"......"
“련주께서는 무인이 양민들에게 손대는 걸 싫어하시지. 하지만 그건 양민들을 보호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양민들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결과적으로 련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한데......”
잠시 말을 멈춘 호가명이 차갑게 조소했다. 안 그래도 서늘한 그의 인상이 섬뜩할 정도로 차가워졌다.
“상황이 여기까지 왔음에도 해남의 편을 들어 련을 방해하는 이라면, 굳이 보호해야 할 이유도 없지. 차라리 미리 제거해 두는 편이 련에 이득일 터.”
그 말에 몇몇 만인방도들이 허리춤에 찬 도를 뽑아 들었다.
마을 사람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직 생각은 변함없나?"
호가명이 피식 웃으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금방 벌벌 떨며 넙죽 엎드릴 것 같았던 노인의 눈에 순간 독한 빛이 번뜩였다.
"죽이려면 죽이시오."
“......뭐라 했지?"
이건 호가명에게도 의외였는지 살짝 놀란 기색이 스쳤다.
"죽이려면 죽이라 했소!"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좀 노인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혹시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 덜덜 떨던 노인이 어느새 두 눈에 독기를 품고 호가명을 쏘아보고 있었다.
“실성이라도 한 건가?"
“실성? 당연히 했지."
종 노인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지금 네놈들이 뒤쫓으려는 해남파의 문도 중에는 내 자식도 있다!"
"......"
“사람이 제 목숨이 아무리 귀하다지만, 어느 미친 부모가 제 자식 죽이려는 이들에게 손을 빌려준단 말이더냐! 차라리 죽고 말지! 마음대로 해라, 이 천하의 악적 놈들아!"
호가명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저 노인 하나만 저리 날뛴다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으나, 노인이 악을 쓴 순간 뒤쪽에 있는 다른 촌민들의 눈빛에도 독기가 어리는 걸 본 것이다.
'섬이라 그런가?'
관계와 유대가 굉장히 끈끈하다. 육지였다면 자식이든 뭐든 감히 사패련의 행사를 반대하고 나서지는 못했을 텐데.
호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알겠군."
"군사……”
“달아난 놈들을 쫓아가는 것도 중요하지. 하지만…… 세상에는 급하더라도 꼭 하고 지나가야 하는 일이 있다.”
호가명이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해남에도 필요하겠지. 사패련에 대항하는 자들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에 대한 본보기가.”
그 말을 들은 만인방도들의 입가에 살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군사, 그러면...….”
"하나도 남기지 마라."
호가명이 앞에 모인 이들을 한번 훑고는 말을 이었다.
“쥐새끼 한 마리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인 뒤, 마을은 불태워라.”
허락이 떨어진 그 순간 만인방도들이 살기를 뿜으며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들려 했다. 운명을 직감한 마을 사람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때.
"그만두시오!"
한 사람이 고함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음?"
호가명이 앞으로 나선 이를 바라보았다.
굳은 얼굴로 앞으로 나선 장정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배는 내가 볼 수 있소. 다른 배를 몰 이도 내가 골라내겠소."
"흐음."
호가명이 진지한 눈으로 그를 훑어보다 물었다.
“내가 굳이 그럴 이유는? 배를 몰 이는 다른 곳에서도 구할 수 있는데?”
“……육지에 닿는다고 끝은 아닐 것 아니오.”
"무슨 말이지?"
“해남을 쫓으려는 것 아니었소?"
"......"
“나는 그들이 남긴 흔적, 그리고 그들이 쓰는 표식을 구분할 수 있소."
호가명이 나직이 웃었다.
"해남의 제자로군.”
"......그렇소."
잠시 침묵하던 호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개로는 쓸 만하겠군. 하지만 한 마리로는 부족해. 네가 몇 마리를 더 끌고 오겠다면 마을 사람들은 살려 주지."
“...…알겠소.”
"유공아!"
“상공!"
유공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될 수 있는 한 나서지 않으려 했지만, 이제 방도가 없다. 이들을 살리겠다고 문파까지 저버렸는데, 이들이 이리 죽어 버린다면 그가 한 일은 모두 헛짓이 되지 않는가.
어떻게든 이들은 살려 내야 한다.
“......시키는 건 뭐든 하겠소. 그러니…... 그러니 이들을 살려 주시오."
"거래, 좋지. 알겠다. 준비를 빠르게 마쳐라. 반 시진 내에 출발한다. 그때까지 준비가 덜 끝나 있다면 거래는 없던 걸로 하겠다."
"알겠소."
"알겠소?"
호가명이 조용히 되묻자 유공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알...... 겠습니다."
수치가 번진 얼굴을 보며 호가명은 무표정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몸을 돌리려던 그가 문득 멈춰 섰다.
“아, 그리고.”
"예?"
순간 호가명의 손에서 섬전 같은 장력이 날아들었다.
퍼억!
날아든 장력은 가장 앞에 서 있던 종 노인의 몸을 여지없이 강타했다.
"촌장님!"
"아, 아버지!"
노인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굳이 살펴볼 것도 없이 절명한 게 분명했다.
"저 노인은 제외다."
"......"
“기억해라. 거래는 거래다. 네가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남은 이들도 같은 꼴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곱게 죽지 못할 거다."
유공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좋군.”
호가명이 마침내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만인방도들 역시 아쉬움을 뒤로한 채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그제야 유공은 고개를 돌려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마을 사람들의 눈빛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비난과 적의가 어린 눈빛 속에서, 유공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그래야 한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