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5화. 독 안에 든 범이겠지. (5)
“이 정도는 괜…… 아아아악!"
청명이 꽥 비명을 지르며 제 다리 쪽을 보았다. 당소소가 상처를 꿰맨 실을 있는 힘껏 동여매고 있었다. 손등에 돋아난 퍼런 핏줄이 그녀의 감정을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 소소.….."
“왜요? 아파요?”
"……아니요.”
당소소는 영 뾰루퉁한 얼굴로 청명의 상처를 마저 꿰맸다. 길게 갈라져 있던 종아리 부분의 상처가 순식간에 깔끔하게 정리됐다.
"됐어요."
당소소가 면포로 제 손을 닦으며 청명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치료는 다 했어요. 문제는......"
“치료 다 됐으면 된 거지 뭐."
"...... 아니, 사형은……!"
“아이고, 답답해라! 선실 안에만 있었더니 영 속이 갑갑해서 못 버티겠네. 나 잠깐 나가서 바람 좀 쐴게!"
“다리! 그 다리 쓰면 안돼! 야!"
청명은 멀쩡한 한쪽 다리로 강시처럼 뛰어 선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당소소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대체 저 양반은......"
모두가 그런 그녀에게 위로의 눈빛을 보냈다.
"어떠냐?"
겉으로 보기에는 깔끔하게 치료도 끝났고, 청명도 멀쩡해 보인다. 하지만 윤종은 청명이 태연한 척한다고 적당히 넘어가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소소가 혀를 차더니 대답했다.
"멀쩡해요. 해독은 다 마쳤고, 상처도 사형이 평소에 입어서 오던 거에 비하면 별로 심하지 않아요."
그 말을 들은 남궁도위가 아연실색하며 당소소를 바라보았다.
'이게 평소보다 덜한 거라고?'
사람 다리가 뼈가 보일 정도로 갈라지고, 몸에 손가락보다 긴 맹독 강침이 열 개가 넘게 박혔는데?
그럼 평소에는 대체 무슨 부상을 입고 다녔다는 말인가? 저 양반은 뭔 목숨이 열댓 개쯤 되나?
"그럼 다행 아니냐?"
"다행이죠. 다행이긴 한데……”
잠깐 말끝을 흐리던 당소소가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의원 입장에서 제일 끔찍한 환자는 큰 상처를 입은 환자가 아니에요. 그런 환자는 의식만 있으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진짜 골치 아픈 환자는 입었던 상처가 다시 덧나고 벌어진 환자예요. 그때부턴 외상이 문제가 아니라 내상이 문제가 돼요. 살아 있는 환자의 피가 썩기 시작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겠다."
윤종이 무거운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청명이 어떤 상처를 입든 살아 있기만 하면 됐다. 그들이 청명의 상처를 돌보는 건 언제나 전투가 완전히 끝난 뒤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제 시작이지.'
그들은 이제 겨우 해남도를 빠져나왔을 뿐이다. 이제 다른 곳도 아니고 저 강남을 뚫어서 장강까지 향해야 한다. 그사이 이만한 전투가 몇 번이나 더 벌어질지는 그들조차 감히 예상할 수가 없다.
"다음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완전히 회복하는 건 어렵다는 거로군."
“네.”
당소소가 딱 잘라 대답하더니 말했다.
"그러니까 사형."
“응?”
“다음에 청명 사형이 날뛰려고 하면 목에 줄을 채우는,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든 최대한 말려야 해요."
“.…..알았다.”
“대충 듣지 마시고요."
살짝 서늘해진 당소소의 목소리에 윤종의 얼굴이 굳어졌다.
“청명 사형을 말리지 못한다는 건 제가 제일 잘 알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적당히 넘어갈 일이 아니에요. 다음 한 번이면 어떻게든 되겠죠. 그런데 두 번이면? 또 세 번이면?"
"......"
"한 번씩 잊어버리는 모양인데, 저 양반도 사람이에요. 사람은 심한 상처를 입으면 죽어요. 보나마나 저 양반 또 무리할 텐데, 이번에는 정말......"
"알고 있다."
윤종이 담담하게 당소소의 말을 끊었다. 당소소가 살짝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봤지만, 윤종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네가 생각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사형……”
“뒤에서 손가락이나 빨려고 검을 휘둘러 온 게 아니다. 해안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어서 참았을 뿐.
지금부터는 청명이 놈만 날뛰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다."
윤종은 평소보다 훨씬 단호했다. 당소소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본디 윤종은 성향 자체가 부드럽고
온건하다. 하지만 때로는 화산의 누구보다 더 강경할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 알겠어요. 사형."
당소소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분위기가 정리되자 조걸이 제 뒷머리에 깍지 꼈던 손을 올리며 기지개 켜더니 너스레를 떨었다.
"끄응. 말이야 쉽지. 저 새끼 말릴 생각 하니까 벌써 위장이 쿡쿡 쑤셔 오는데요?"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지."
"......예?”
윤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원래 같았으면 청명이 놈 옆에서 귀가 터지게 잔소리를 늘어놨을 사람 생각 좀 해 봐라. 지금 여기에 있지도 못하니 속이 얼마나 터지겠느냐?"
"아."
잠깐 탄성을 흘린 조걸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그렇겠네요. 그 성격에."
또 다른 선실.
백천이 좌정하고 있었다. 이를 보는 금양백의 얼굴엔 놀라움이 스쳤다.
이미 한번 격한 전투를 겪었지만, 백천의 옷자락에는 혈흔 한 점 묻어 있지 않았다. 그 말인즉, 백천이 그만한 전투를 치르면서도 여유를 남기고 있었다는 의미다.
'화산이라……'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편견을 지우고 그가 평가할 수 있는 최대로 평가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실전에서 본 화산의 힘은 금양백의 그런 노력을 무의미하게 했다.
바다를 본 적 없는 사람은 아무리 설명을 듣는다 해도 바다의 넓음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것처럼, 화산을 겪어 보지 못한 이는 아무리 소식을 듣고 고민을 거듭해도 화산의 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들이 백이 넘게 모여 있다면……'
아니, 사실 따져 보면 그가 본 건 제대로 된 화산의 힘도 아니다. 그저 화산에서 가장 명성을 날리고 있는 몇의 활약일 뿐이다.
만일 지금 이들의 뒤를 채우고 있는 게 해남이 아니라, 늘 동고동락하며 함께 수련해 온 이들이라면 과연 어떤 힘을 발휘하겠는가. 생각만으로도 새삼 등골이 서늘해졌다.
'천우맹에 대한 평가도 달리해야겠군.'
금양백이 천우맹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편에 가까웠다.
만일 이들이 목숨을 걸고 해남을 찾아 주지 않았다고 해도, 그는 천우맹이 가진 이상과 가치를 높이 쳐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는 결국 구파일방의 주류가 되지 못하는 이들이 모여 만든 연맹이 천우맹이라는 편견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해안의 전투를 보고 알게 되었다.
'그런 게 아니구나.'
밀려난 게 아니라 합류한 것이다. 그 검과 그 사람을 보고 말이다.
"...... 먼저."
그 순간 백천이 입을 열었다. 금양백의 어깨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만난 순간부터 금양백은 백천을 화산의 장문대리로서 최대한 존중했으나,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본 후로 마주하니 태도가 또 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을 잃어 상심하셨을 마음에 심심한 위로를 드립니다."
금양백이 고개를 느리게 저으며 침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괘념치 마십시오. 각오한 일입니다.”
"......"
"그리고 그 아이들도 각오했을 겁니다."
백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금양백이 헛기침을 터뜨렸다. 자신이 백천의 반응을 살피고 있다는 걸 불현듯 스스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니, 반응을 살핀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스스로 한 행위를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상대의 평가부터 기다리는 것. 그걸 세상은 ‘눈치를 본다'라고 칭하지 않던가?
누가 그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아니건만, 은근히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금양백이 아닌 누구라도, 눈앞에서 그런 광경을 봤다면 당연히 이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호에서 문파들이 어떻게든 절대고수를 한 명이라도 더 보유하기 위해 갖은 수를 쓰는 건 다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겸연쩍은 마음과 부끄러움을 애써 숨기며 짐짓 침착하게 말했다.
“장문대리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화산검협께서 부상을 당하신 것 같던데, 그 안위를 살피기도 전에 저희에게 먼저 와 주실 줄은.……”
“당연한 일입니다. 상처를 입었다 한들, 어찌 목숨을 잃은 이들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까? 글쎄. 모르겠다.
만일 이곳에 천우댕이 아닌 다른 구파일방 문파들이 함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 장문인들 중 화산검협의 상처가 아니라, 해남 제자의 죽음을 먼저 위로하려 할 이가 단 하나라도 있었을까?
'없었겠지.'
조금 서글픈 생각일지 모르나,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다.
하지만 백천은 제 사제의 상처를 살피지 않고, 해남의 제자들을 먼저 다독였으며, 금양백을 위로하러 왔다. 본인은 당연한 일이라고 잘라 말하지만, 그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을 세상은 영웅이라 부르는 법이다.
금양백은 새삼 생각했다. 화산이 가진 힘은 무력이 아니라 이런 부분에서부터 나오는 것일지 모른다고.
"하지만, 장문인."
그때 백천이 고개를 들며 금양백을 바라보았다.
"이제 시작입니다."
"......"
“아마 해남의 제자들도 지금은 많이 당황했을 겁니다.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고 다짐하는 것과 정말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건 확연히 다릅니다.”
금양백이 안색을 굳혔다. 반박할 수 없는 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금양백부터 그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는데, 어린 제자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이럴 때일수록 장문인께서 제자들을 잘 다독여 주셔야 합니다.”
평소의 금양백이라면 이쯤에서 한마디 했을 것이다. 그건 이쪽에서 잘 알아서 할 테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금양백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긍정을 표했다. 그가 가진 경험이 이들의 경험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으니까.
“사패련은 바로 추적해 올 겁니다. 그렇게 되면 강남 땅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질 겁니다."
"......"
“제자들의 마음이 꺾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저희도 노력하겠습니다.”
"으음."
금양백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최선을 다하겠소."
"감사합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백천을 보며 금양백이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상황이 어렵긴 하지만...… 한 가지 호재는 있소이다."
"호재라 하시면?"
백천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금양백의 미소가 조금 자연스러워지고 환해졌다.
“마침 역풍이 불고 있소이다."
백천이 이해가 어렵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장문대리가 보시기에는 모두 같은 남해 사람들로 보이겠지만, 사실 광동과 해남은 문화부터 양식까지 모든 면에서 다르오. 그리고 그건 배의 형태도 마찬가지외다."
"아."
금양백이 고소를 머금었다.
“해남 사람들은 광동의 배를 볼 수 있지만, 광동 사람들은 해남의 배를 몰아 볼 일이 별로 없소.
그러니 배를 징발한다고 한들, 이 역풍을 뚫고 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오."
"조금은 여유가 더 생겼다고 봐도 될 것이오."
금양백이 밝게 미소 지으며 백천을 보았다. 하지만 백천의 표정은 딱히 밝아지지 않았다.
“외람되지만, 장문인."
"...... 으음?"
그는 무겁게 고개를 저으며 금양백을 향해 말했다.
“그리 생각하신다면, 사패련을…… 만인방을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겁니다.”
"......"
“저들은 추적의 고삐를 늦추지 않을 겁니다. 어떤 방법을 쓰든 말입니다.”
확신으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금양백은 순간 입을 꾹 닫았다.
그리고 같은 시각.
해남에서 펼쳐진 광경은, 백천의 예상이 그리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