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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74화 (1,275/1,567)

1274화. 독 안에 든 범이겠지. (4)

인간은 바다를 정복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다 동원했다. 그러니 본디 바다 위를 누빌 수 없는 인간이 근해를 넘어 저 먼 대양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평범한 이들이야 상상하기 어려웠겠으나, 어쨌든 바다에 맞서고자 한 인간들의 노력과 집념이 이런 거대한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렇게 바다와 맞서 싸우는 이들일수록 바다의 위대함을 직면하게 된다. 아무리 노를 젓고 아무리 돛을 펼쳐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배를 몰아갈 수 없는 순간이 언젠간 반드시 온다.

그럴 때는 그저 기다릴 뿐이다. 바다가 이끌어 주기를 바다의 용왕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곽환소는 다소 망연한 눈으로 바다를 보았다.

드높은 파도가 몰아치고, 역풍이 불어온다. 이럴 때는 사람의 힘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저 돛을 접고, 노를 들여놓은 채 묵묵히 기다리는 수밖에.

사실 곽환소는 이런 순간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어찌 생각하자면 이 순간이야말로 인간이 바다와 하나가 되는 순간이니까, 바다의 흐름과 사람의 흐름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니까.

하지만 지금 바다를 응시하는 곽환소의 눈에 떠오른 건 일체감으로 인한 만족 따위가 아닌, 더없는 무력감이었다.

자연은 원래 대항할 게 아니라 어울리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으니 몰아치는 대로 떠밀려 가는 것 역시 그리 나쁜 게 아니라고 여겼건만.

지금 곽환소는 제 생각이 그저 무력한 자의 자기 위안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중이었다.

'전쟁...…'

그의 손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해안을 떠나온 지 한참인데도 떨림은 진정되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손을 소매 밖으로 빼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웃긴 일이다. 생각해 보면 조금 전 있었던 일은 곽환소가 평생을 꿈꿔 왔던 상황이 아니었던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도한 사파의 악적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게 될 날을 오래도록 기다렸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지금껏 참아 왔을 뿐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 누구보다 용맹하게 싸워서 해남의 검에 의기가 어려 있음을 증명할 것이라 수도 없이 다짐했다.

하지만...... 그의 눈으로 본 전쟁이란 그가 생각하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아직도 코끝에 어린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는다.

사람의 피냄새가 그렇게 역겨울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내장을 쏟아내며 죽어 가는 이가 지르는 비명이 그렇게 처절하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 지독한 난전 와중에는 제 동료의 잘린 머리를 짓밟고 앞으로 전진하는 일조차 흔하다는 것도.

그가 듣고 꿈꿔 왔던 전장의 낭만은 그저 허울에 불과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와중에 피어나는 협의와 의기?

'개 같은 소리……'

곽환소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런 말을 지껄이는 이에게 심장이 꿰뚫려 죽은 이의 부릅뜬 눈을 보여 주고 싶다. 잘린 제 팔을 찾아 두리번대는 이의 풀린 눈을 본 이라면, 전장에는 시체가 뿜는 악취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곽환소가 떨리는 손으로 제 어깨를 감싸 쥐었다.

죽어 가는 이들이 내지르던 비명이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그리고 곽환소를 더욱 견디기 힘들게 하는 건 그렇게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 간 이들 중에서는 그의 사제들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양소(楊笑)…….”

유독 그가 아끼던 사제다.

또래보다 체구가 작고, 성격이 착해 거칠기 짝이 없는 해남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았던 사제.

그러니 차라리 하산해 제 삶을 꾸리는 게 나을 거라 여겼던 이.

하지만 양소는 끝까지 해남을 저버리지 않았다. 실력은 부족할지 모르나, 해남과 운명을 함께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강남행에 동행했다.

그리하여 그는 해남도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허무한 죽음을 맞았다.

심지어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도록, 비참하게.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실감이 곽환소의 속을 헤집었다.

'나는 대체 뭘 보고 있었던 거지?'

할 수만 있다면 전장에서의 활약을 꿈꿨던 지난날의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다.

전장에 흐르는 피는 그가 아끼던 사제들의 피고, 그 전장에서 얻는 빛나는 위명은 수없는 목숨을 대가로 얻어 내는 것이다.

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꿈꿨다는 말인가?

“사형.”

곽환소가 고개를 돌렸다. 사제 이자양이 다가오고 있었다. 낯빛이 평소보다 창백한 것을 보야 그 역시 심적인 고통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냐?"

"......여덟입니다.”

"......"

“여덟이 없습니다."

곽환소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토록 일방적인 싸움이었는데.'

승기를 잃지 않고 몰아치기만 했다. 상대의 방어선을 파죽지세로 돌파에 단번에 배를 탈취했다.

대승. 그 말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승리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여덟이 죽었다.

그럼 해남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지독한 싸움을 벌여야 할 강남 땅에서는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갈 거란 말인가?

“……누군지는 확인했느냐?"

"예, 사형……”

그들의 이름을 물으려던 곽환소가 이내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차피 희생자를 알아 봐야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줄 수도 없다. 그들은 지금 단순히 전장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또 다른 전장으로 향하는 중이니까.

“피해가 적지 않구나.”

“예…… 하지만 화산검협이 아니었다면 피해는 훨씬 더 컸을 겁니다. 어쩌면..….”

이자양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곽환소는 그가 하려던 말이 뭔지 알 수 있었다.

'거기에서 해남이 전멸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겠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들이 아무리 빠르게 저들의 배를 탈취했다 해도 배를 움직이기 전에 추격당해 뒤를 잡혔다면, 모두가 물고기 밥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최악의 사태를 청명 혼자서 막아 낸 것이다.

“……생각해 보면 정말 무모한 짓거리였군요."

"그렇구나.”

“이런 작전인 줄 알았다면 거부했을 겁니다."

"그랬을지도."

곽환소의 대답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그러자 이자양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사형은 화도 안 나십니까? 까딱하면 다 죽을 뻔했는데! 그리고 그 무모한 작전 때문에 사제들이 유명을 달리했는데!"

곽환소가 대답 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자양이 입을 꾹 다물었다.

"사제들이 죽은 게 저들 탓이냐?"

“.…..아니, 제 말은……”

“그리고 애초에 이리될 거라고 저들이 말해 주었다면, 네 말대로 동참하지 않았겠지. 그랬다면 지금쯤 우리가 어떻게 되었겠느냐?"

이자양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본산에서 맞서 싸우다가 모조리 죽어 나갔을 게 분명하니까. 이 강남행이 해남을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당장 그들의 목숨을 조금이나마 더 이어 주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미리 말할 수 있었을 리가 없지.'

이건 듣는 것만으로 납득이 갈 만한 일이 아니니까.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을 일이니까.

애초에 만인방의 본대를 상대로 한 사람이 뒤를 틀어막고 시간을 끌어 줄 수 있다는 말을 세상 누가 믿겠는가?

그러니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 진실 같은 건 터럭 하나만큼의 가치도 없으니까.

“저들이 잘못된 게 아니다. 잘못된 쪽이 있다면 강남으로 향한다는 사실에 눈이 멀어 상황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우리지."

"그건......”

“물에서 온 사람들이 물이 빠지는 때를 어찌 알겠느냐? 아니, 애초에 물이 빠진다는 사실은 알았겠느냐? 네가 생각했어야 하고, 내가 생각했어야 할 일이다. 우리가 멍청했던 탓에 모두를 죽일

뻔했다. 그런데 되레 남의 탓을 할 셈이냐?"

"......"

“실력도 없는 것들이 의욕만 앞서서 할 수 있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죄 없는 이들을 탓하기까지 하라고?"

이자양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깨물었다.

곽환소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못난 모습을 보이는 이자양을 이해했다. 사제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약해서, 멍청해서 잃지 않아도 될 사형제를 잃은 마음을 무얼로 위로할 수 있겠는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탓할 사람을 찾고 싶고,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원망하고 싶은 게 사람이다.

"죄송합니다. 사형."

그때 이자양이 곽환소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제가……"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 어리석고 비겁했습니다.”

"자양……"

곽환소가 그를 가만 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이자양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였다. 게다가 이자양은 스스로 해남에서 가장 냉철하다 자부하던 이다. 충격이 더 컸으면 컸지 작지 않았으리라.

잠시 짧은 침묵이 그들 사이에 맴돌았다.

어색함에 곽환소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뗀 순간, 이자양이 다시 말했다.

“사형."

"...... 말하거라.”

"저들은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요?"

이자양은 허탈한 얼굴로 말했다.

"이해가 안 갑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침착을 유지할 수 있는지. 그 만인방을 보고도 어떻게……”

그는 말끝을 흐리며 침묵했다. 이자양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구름으로 덮인 하늘만 보고 살던 이가 마침내 구름 위까지 뛰어올랐는데, 그 위로 또 끝없는 창공이 펼쳐져 있는 걸 확인한 것이다.

응당 기쁘기 이전에 암담하고 당혹스럽겠지.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냉철할 수 있는 겁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겁을 먹지 않을 수 있는 겁니까."

“나라고 알겠느냐?"

곽환소가 고개를 내저었다.

강함은 차라리 이해할 수 있다. 저들은 강하고, 그들은 약하다. 그건 굳이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는 부분이니까. 더 단련하고, 더 노력하면 아주 극복은 못 하더라도 어느 정도 간극을 좁힐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눈에 선했다. 미친 듯이 달려드는 수백의 군세를 상대로 홀로 뛰어든 청명의 뒷모습이 말이다.

‘내가 저 사람만큼 강해진다 해서 그럴 수 있을까?'

그 대답을 곽환소는 이미 알고 있다.

"확실한 건, 우리가 이 섬에서 그저 억울해하며 분통만 터뜨리는 동안, 저들은 피 흘리며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이겠지."

"......"

“육지의 샌님 놈들이 강단도 없으면서 젠체한다고 욕해 왔지만..….”

곽환소가 피식 웃었다.

“진짜 샌님은 우리였던 거다. 제대로 검을 휘둘러 사람 한번 죽여 본 적 없는 샌님."

"사형..….”

“어떻게 저렇게 싸울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었지?"

이자양이 의문 어린 눈으로 곽환소를 바라보았다. 곽환소의 시선은 저 멀리 강남 땅으로 향해 있었다.

“지금은 모르지만, 우리도 곧 알게 될 거다. 아니…...”

곽환소의 얼굴은 어느새 차게 굳었다.

“깨달아야 한다. 깨닫지 못하면 저기서 죽을 뿐이다."

이자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만일 그들이 저 사파로 가득한 강남을 살아서 돌파할 수 있다면…… 그때는 이 해안에서 있었던 전투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저 그러길 바라야지.'

곽환소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한참 동안 일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킨 그는 뒤늦게 생각이 났다는 듯 물었다.

“청명 도장은 어떻더냐?”

“...…지금 몸에 박힌 강침을 뽑아내고, 살을 꿰매고 있는 모양입니다."

“강침을 뽑아?"

“예. 몸뚱이에 손가락보다 긴 강침이 열 개 넘게 박혀 있었다고 하더군요. 엽동이 놈이

말하기를,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열 번은 더 넘게 죽었을 거랍니다."

곽환소는 순간 아연했다.

“멀쩡해 보였는데……”

“..…. 별게 아닌 모양이지요.”

이자양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사람에게는 말입니다."

곽환소의 시선이 선실 쪽으로 향했다.

청명이 치료받고 있을 그 선실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던 곽환소가 이내 깊은 탄식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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