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273화 (1,274/1,567)

1273화. 독 안에 든 범이겠지. (3)

“천하의 군사도 화산검협은 감당하기 어려운 모양이군."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흘리는 괴량을 보며 호가명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그 꼴을 당하고도 입은 움직이는 모양이군.”

"쿡쿡쿡."

괴량이 대답 없이 웃어 대자 호가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화산검협이 이런 계책을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무시하는 건가?"

"아니."

호가명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는 피해 없이 달아나는 계책 같은 걸 고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 건 나 같은 쥐새끼나 생각하는 방책이지."

“.....…쥐새끼?"

“그래. 그리고 저 배에는 나 같은 쥐새끼가 한 마리 타고 있지."

“녹림왕이로군."

"그렇다.”

괴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런 잔재주는 녹림이 자주 부려 대던 것이다.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군."

괴량이 입가에 고인 피를 뱉어냈다.

"어떤가? 우리를 두고 발을 뺀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는 건?"

"후회?"

“놈들은 우리가 바로 뒤를 쫓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겠지. 하지만 내 생각에는 여유가 조금 있는 것 같은데."

괴량이 슬쩍 해남도를 바라보았다.

"감히 우리를 두고 떠난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 줘야지."

"불가(不可)."

호가명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딱 잘라 끊어 버렸다. 괴랑의 눈썹이 불쾌하게 살짝 꿈틀했다.

“나는 네 명을 들을 이유가 없어."

“너는 화산검협은 이해한 것 같지만, 녹림왕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는군.”

"음?"

“놈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다. 우리가 바로 뒤를 쫓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이유는?"

“광동에 무엇이 있는지 잊었나?"

그 말에 괴량이 순간 입을 닫았다.

광동에 무엇이 있냐니. 그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들에게는 말이다.

".……본단이로군.”

"그래."

저 바다 건너에는 만인방의 본단이 있다. 그리고 그 본단은 지금 텅텅 비어 있다. 남은 인원은 호가명이 모조리 끌고 왔으니까.

"우리가 뒤처진다 싶으면 저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본단을 노릴 거다. 해남을 불태우는 대신 우리는 본단을 잃게 되겠지."

"그깟 전각 따위에 집착하는 건가?"

"전각 따위는 아무래 좋아 문제는 그 본단의 창고에 강북과의 전쟁을 대비해 비축해 놓은 재물과 군량이 그대로 있다는 점이지."

호가명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남에서 살육을 벌이는 틈에 본단의 군량이 모조리 타 버리기라도 한다면? 아마도 련주께서친히 너를 두고 시험하시겠지. 사람이 과연 어떤 꼴을 당해도 살아 있을 수 있는지 말이야."

괴량이 입을 닫았다.

그는 천하에 무엇도 두려울 게 없지만, 장소만은 별개다. 그 장소가 웃으며 다가오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등을 타고 소름이 돈아 올랐다.

“..….서둘러야겠군.”

"말할 시간이 있으면 움직여라. 지금도 쥐새끼 놈이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늦게 출발하길 기도하고 있을 테니까.”

"알겠다."

괴량이 지체 없이 몸을 돌려 멀어졌다. 호가명은 멀어지는 배를 차가운 눈으로 보며 중얼거렸다.

“너도 취해 버린 모양이로군, 녹림왕."

호가명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건 임소병다운 계책이면서, 동시에 전혀 임소병답지 않은 계책이었다.

전술적인 영역에서야 더없이 임소병답다. 상대의 선택을 강제하고, 그를 통해 이득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전략적인 영역에서는 전혀 임소병답지 않았다.

그가 아는 임소병이라면 이런 미친 짓거리는 절대 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실력이 떨어지는 녹림도들을 이끌고 지난한 싸움을 반복해 온 임소병이라면, 저 해남파의 문도들을 이끌고 강남을

돌파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임소병이 내렸어야 할 선택은 오직 하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해남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해남은 잃을지언정 천우맹의 핵심들은 살아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가장 옳은 방법이라는 건 임소병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임소병이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오직 하나뿐일 것이다.

머리로 세상을 농락하는 이들은, 결국 머리가 아닌 부분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 가장 합리적인 이들이 가장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을 하는 이들에게 이끌리는 것은 괴상하지만, 또 지겹도록 반복되어 온 일이니까.

화산검협 청명이라는 술에 취해 버린 임소병으로서는 이 이상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따르는 이가 선택하지 않을 계책은 내어 놓아 봤자 무의미하니까. 그저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그런 면에서 보자면 임소병의 계책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화산검협은 반드시 죽는다.”

호가명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설령 나머지 모두를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독단으로 화산검협을 죽인 벌로 목을 내어 놓는 한이 있더라도, 저자만은 결코 강남 땅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게 저자를 처음 대면한 순간부터 호가명을 괴롭혀 오던 어찌할 수 없는 불안과 결별하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전서응을 가져와라!"

"예!"

호가명이 무심하게 몸을 돌리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보다……’

그는 처참하기 짝이 없는 해안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화산검협이라…...”

사파조차 몸서리치게 할 만큼 잔인한 손속을 가진 이를 검협이라 불러 주는 것도 참으로 우스운 일 아닌가?

"차라리 매화검귀가 낫겠군.”

슬쩍 조소한 호가명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파도가 흘러드는 피를 무심하게 밀어 냈다.

***

"던져!"

"으라차아아아!”

조걸이 갑판을 뜯어내어 전력으로 집어 던졌다. 나무판자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수면 위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그 판자를 다름 아닌 청명이 내밟으며 허공으로 도약했다.

"읏차!”

조걸과 윤종이 판자를 던질 때마다 청명이 연이어 밟으며 점차 배에 가까워졌다.

이윽고 마지막 발판을 밟고 크게 도약한 청명이 갑판 위로 내려섰다.

쿵!

둔중한 소음과 함께 갑판에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청명아!"

“너 괜찮......"

바람처럼 달려가려 하던 화산의 제자들이 순간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멈춰 섰다. 청명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그들마저 움츠러들게 한 것이다.

'청명......'

윤종이 입술을 깨물었다.

청명의 눈에선 무시무시한 한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옥에서 막 기어 올라온 수라라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면 저 손에 들린 검이 날아들 것만 같았다. 그러지 않을 걸 알면서도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두가 멈춰 선 그 순간, 한 사람만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청명을 향해 걸어갔다.

"청명."

그러자 청명의 시선이 그쪽으로 획 급격히 돌아갔다. 검을 쥔 손이 순간적으로 움찔 떨렸다.

"괜찮아?"

그 한마디에 살기 어렸던 청명의 눈이 천천히 느슨해져 간다. 지척까지 다가온 유이설을 멍하니 바라보던 청명이 들고 있던 검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당연한 소리를."

“다쳤어.”

"별거 아냐."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고는 검을 털어 검집에 밀어 넣었다.

"처, 청명아!"

"사형! 다쳤잖아요!"

화산의 다른 제자들도 그제야 고함을 치며 다가갔다.

남궁도위가 참았던 숨을 몰래 토해 냈다.

전신이 삽시간에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버렸다. 아주 잠깐, 숨 한 번 내쉴 만큼의 짧은 대치에 불과했지만, 그 대치가 그에게 준 압박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저 화산검협이......"

그가 아는 청명은 언제나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검이야 살벌하기 그지없더라도, 청명이라는 사람은 늘 긴박한 와중에도 주변을 살피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남궁도위가 지켜본 청명은 그랬다.

그런 청명이 자신의 살기를 제어하지 못할 만큼, 해안에서의 전투가 격렬했던 것이다.

하지만 남궁도위가 경악한 건, 화산검협을 저렇게까지 몰아붙인 만인방에 대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살기를 내뿜고 있는 청명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처럼 다가간 유이설에게 경악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거리를 제법 두고 있었던 남궁도위조차도 순간적으로 검을 뽑을 뻔한 살기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검을 뽑는 게 아니라 갑판 밖으로 몸을 던져 버리고 싶은 살기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살기를 내뿜는 이에게로 검도 뽑지 않고 다가간단 말인가? 저 청명이 검을 휘둘렀다면 그대로 목이 달아났을 텐데.

'정상이 아니야.…..'

화산의 다른 제자들이 청명을 믿지 못해서 다가가지 못했겠는가?

누구도 청명이 제게 진짜로 검을 휘두를 거라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몸은 굳는다. 그게 예기치 않은 위험을 직면한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반응이자 생존본능이니까.

제 목숨을 아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짓이었다.

"벗어요. 사형!"

“.……너 미쳤냐?"

"뭔 개소리야! 상처 봐야 하니까 옷 벗으라고!"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언제나 그랬듯 청명이 당소소와 드잡이질을 시작했을 때, 백천이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청명에게 다가섰다.

“청명아."

"응?"

청명이 고개를 들자 백천이 손에 든 양동이를 내밀었다.

“......일단 좀 씻어라. 꼴이 말이 아니다."

더러워서가 아니다. 다만, 언제 어디서건 마귀처럼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은 보기에 좋지 않다. 특히나 이곳에는 그들만 있는 게 아니잖은가?

청명은 그제야 주변을 슬쩍 돌아보았다.

차마 이쪽으로 다가올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해남의 제자들이 보였다. 심지어 해남의 장문인인 금양백조차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이쪽을 바라볼 뿐, 차마 다가와 말을 걸진 못했다.

"쯧."

새삼 이 세상이 과거의 그때와 다르단 걸 실감한 청명은 백천이 내민 양동이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곧장 제 머리 위에서 뒤집었다.

촤아아아악!

물이 쏟아지며 청명의 전신을 뒤덮고 있던 피를 쓸었다. 한 번으로 말끔해진 것은 아니나, 그래도 훨씬 보기에 나아졌다.

그 틈에 백천이 눈은 청명의 몸을 빠르게 살폈다. 청명의 다리를 덮은 의복이 새로이 짙게 젖어 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너 다리……”

"음?"

청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제 다리를 흘끗 보았다. 길게 갈라진 의복 사이로 깊은 상처가 드러나 있다.

"별것 아냐."

"중독됐냐?"

백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남의 피를 씻어 내고 나자 청명의 피가 보였다. 피의 색이 거무스름했다. 백천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소소. 해약 ……”

“됐어."

청명이 고개를 저으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이 천천히 검게 물들더니 이내 손끝에서 붉은 삼매진화가 피어났다. 동시에 코를 찌르는 날카로운 향이 사방으로 퍼졌다.

“대단한 독도 아닌데 뭐."

"너......"

“걱정할 것 없어. 다리 한 대 맞은 대가로 배를 찢어 줬으니까."

백천은 말없이 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내가 판단을 잘못했어.'

상대를 얕잡아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인방의 주전력이 장강에 있는 이상, 이곳에서 청명을 상대할 만한 이는 없을 거라 여겼다.

그 안일한 판단이 하마터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뻔했다.

“청명아. 내가……”

"사숙."

"응?"

"한가롭게 이야기나 하고 있을 시간 없어. 움직여. 저 새끼들 곧 쫓아올 거야."

"......"

“안 그래?"

백천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 그 말이 맞다."

"그럼 속력 높이라고 해."

“그래.”

백천이 지시를 내리려 움직이자 청명이 해안을 돌아보았다.

'만인방……'

생각 이상으로 지독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할 수 있어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해야 하기에 하는 일이니까.

'반드시 빠져나간다.'

청명의 눈이 차가운 살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유이설이 그런 청명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무심한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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