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2화. 독 안에 든 범이겠지. (2)
독을 품은 사복검이 굶주린 뱀처럼 날아들었다.
일반적인 검이라면 몸을 뒤틀어 피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지금 그 선택지는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검보다는 채찍에 가까운 사복검은 언제든 공격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설사 피한다 해도 저 검이 몸을 휘감는 것만은 막아 낼 수 없다. 날이 선 사슬 같은 사복검이 몸뚱이를 휘감는다면, 그 결말이 어떨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쿵!
그 절체절명의 순간, 청명이 강하게 진각을 내밟았다. 단전 깊숙이 잠자고 있던 내력이 대하처럼 용솟음치며 전신을 휘돌았다. 천하에서 가장 맑은 기운만을 모은 내력이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힘을 만들어 냈다.
카가가가각!
청명의 검을 붙든 사복검들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 순간 청명이 단번에 암매검을 제 품 쪽으로 확 끌어당긴다.
쿵!
둔중한 폭음이 울렸다. 동시에 전력으로 사복검을 당기며 청명을 부여잡고 있던 이들이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시종일관 냉정하던 그들의 눈에 순간적으로 당혹감이 어렸다.
다섯이 넘는 이가 전력을 다하고 있음에도 되레 그들을 끌어당겨 버리는 완력 때문에?
아니다.
지금 그들이 끌려간 곳을 향해 무엇이 날아들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딸려 가던 혈검단원들은 급히 검을 놓고 몸을 빼려 했다. 하지만 사복검을 타고 오른 강한 흡력(吸力)이 그들의 손을 떨어지게 내버려 두질 않았다.
'아, 안......'
속절없이 끌려들어 가면서도 비릿하게 조소하는 청명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이 더없이 악귀 같아 보였다.
콰득! 콰득! 콰득!
독사처럼 날아들던 사복검이 혈검단윈의 등판을 파고들었다.
"끄륵......"
뱀의 혀처럼 배를 뚫고 나온 시복검을 망연히 내려다본다. 눈으로 보고도 못 믿겠다는 듯 멍하니 보던 그들이 덜덜 떨며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웃고 있는 청명과 시선이 마주쳤다.
“꽤 훌륭했지만 말이야……”
파아아앗!
단숨에 내리그인 암매검이 전방에 있던 혈검단원을 수직으로 양단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지."
청명은 쏟아지는 피를 전신으로 맞으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의 전신으로 낭창대는 사복검들이 기민하게 뻗쳐 왔지만, 한번 당한 수에 또 당할 청명이 아니었다.
캉! 카앙! 카앙! 캉!!
암매검이 날아드는 사복검들의 머리를 연이어 가격한다. 살아 있는 것처럼 요동치던 사복검들은 머리를 꿰뚫린 뱀처럼 힘없이 뒤로 튕겨 나갔다.
사복검은 당길 땐 더없이 강한 힘을 실을 수 있는 반면, 무언가를 뚫고 들어갈 땐 일반적인 검이 내는 힘의 절반도 끌어낼 수 없다.
한번 잡았던 기세를 놓쳐 버린 사복검은 더 이상 청명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파앗!!
청명이 땅을 박차며 더욱 가속했다.
그의 눈앞에 보이는 건, 이제 다섯밖에 남지 않은 혈검단원과 그 뒤로 펼쳐진 드넓은 바다. 그리고 그 바다 저 먼 곳으로 사라져 가는 천우맹의 배였다.
시위를 떠난 활처럼 앞으로 쇄도한 청명은 필사적으로 사복검을 휘두르는 혈검단원들의 지척까지 단숨에 도달했다. 싸늘하기 이를 데 없었던 혈검단원들의 두 눈에 당혹감이 얼핏 떠오른 그 순간.
파앗!
횡으로 몸을 비튼 청명이 맹렬한 일검을 휘둘렀다. 그 검에 실린 경기는 그를 막아서는 게 무엇이든 모두 갈라 버릴 것만 같았다.
혈검단원들의 실력으로는 막아 내는 게 불가능한 일격!
하지만 그 순간 그들의 두 눈에 더없이 악독한 빛이 떠올랐다.
촤라라라락!
청명을 노리던 사복검들이 빛살처럼 회수되며 검을 들고 있는 혈검단원들의 몸을 감쌌다.
콰득! 콰득!
검편으로 이루어진 사복검이 혈검단원들의 몸을 휘감자 붉은 핏물이 솟구쳤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위다. 자해에 가까운 짓거리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한 혈검단원들이 이를 악물고 청명의
검 앞으로 제 몸을 던졌다.
청명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그 순간.
콰아아앙!
혈검단원들의 몸이 주위에 휘감긴 사복검째로 단숨에 두 동강 났다. 제아무리 사복검을 갑옷처럼 둘렀다 해도, 그 검에 모든 내력을 불어넣었다 해도, 강선으로 이어진 사복검 따위가 청명이 전력으로 휘두른 검을 막아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갈라진 몸뚱이가 여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짓이겨져 튕겨 나갔다. 단숨에 세 사람의 몸을 부숴버린 암향매화검이 그 기세를 잃지 않고 네 번째의 몸에 틀어박혔다.
콰가가가각!
검편과 강선이 청명의 검에 얽혀 들었다. 인간의 근육과 뼈도 마치 질긴 고무처럼 청명의 검을 조여 왔다.
콰아아앙!
하지만 청명의 검은 여지없이 네 번째 몸마저 부수듯 갈라 냈다. 그러고도 여력이 남은 검이 마지막 혈검단원의 몸으로 날아드는 순간.
청명의 등골로 오싹한 기운이 타고 올랐다.
기감. 아니, 어쩌면 육감.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등 뒤에서 날아드는 위험을 감지해 냈다. 전투의 열기에 조금만 더 정신을 빼앗겼다면 결코 알아차릴 수 없었을 은밀한 접근.
하지만 청명이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 앞쪽에 선 마지막 혈검단원이 와락 달려들며 암향매화검에 제 몸을 박아 넣었다.
카가가각!
사복검이 몸에 박힌 암매검을 조이고 뒤들기 시작했다. 설사 제 몸속이 난자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이 검을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수였다.
청명의 시선만이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섬전이라는 말이 부족할 속도로 날아들고 있는 혈검단주 괴량의 모습이 보였다.
쇄애애액!
일순 세상이 흐릿하게 이지러지는 것 같다. 뭉개진 세상 속에서 보이는 거라고는, 오직 괴량이 찔러 오는 검의 시커멓게 물든 첨봉뿐이었다.
뿌드드득!
혈검단원도 그 모습을 보았는지 있는 힘을 다해 청명의 검을 잡아끌었다. 선천지기까지 모조리 끌어냈는지, 혈검단원의 입에서 선홍빛의 피가 주르륵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런데 그 순간, 청명이 입꼬리를 비트는 듯이 웃으며 잡고 있던 암매검을 그대로 놓아 버렸다.
콰득!
힘의 균형이 무너진 순간, 암매검은 혈검단원이 잡아당기는 힘을 그대로 받아 혈검단원의 가슴에 손잡이까지 박혀 버렸다.
청명이 그 순간을 놓칠 리 없다. 그는 몸을 빙글 회전하며 반동을 이용해 암매검 손잡이 끝을 팔꿈치로 후려쳤다.
쾅!
짧고 강한 폭음과 함께 암향매화검이 혈검단원의 가슴을 그대로 뚫고 나갔다. 버드나무처럼 부드럽게, 하지만 섬전보다 빠르게 혈검단원의 옆을 스치고 지나간 청명은 쏘아지는 암매검의 손잡이를 잡아채고 한없이 유려하게 몸을 돌렸다.
바로 지척까지 도달한 괴량의 섬뜩한 눈빛과, 차갑게 가라앉은 청명의 눈빛이 허공에서 일순 교차했다.
촤아아아악!
화폭에 붓을 그어 내듯, 허공에 일필휘지로 그린 검격이 날아드는 괴량의 검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아아앙!
이어지는 거대한 폭발.
힘과 힘, 내력과 내력이 충돌하는 여파를 이겨 내지 못한 해수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마치 하늘과 땅이 뒤집히기라도 한 듯이.
그렇게 솟아오른 바닷물은 이 광경을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을 한순간 완벽하게 차단했다.
촤아아아아.
솟구친 바닷물은 이내 비처럼 쏟아졌다.
겨우 다시 모습을 드러낸 해안에는 오직 괴량 혼자만이 서 있었다.
털썩.
위태위태하게 흔들리던 괴량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아랫배까지 쩌억 갈라진 상처에서 흐른 피가 푸른 바다로 흘러들었다.
“단주님!"
혈검단원이 놀라며 달려왔지만, 괴량은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먼 바다만 날카롭게 주시했다.
어느새 청명은 저 바다 위로 쏘아지고 있었다. 차마 잡을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로 멀리.
“..….화산검협.”
괴량이 히죽 웃었다. 뒤틀린 그의 입술 사이로 피에 젖은 이가 드러났다.
"명불허전이군."
수하들을 먹이로 던져 주고, 그 틈을 노려 혼신의 기습을 가했음에도 이 꼴이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았다.
이건 너무도 당연한 결과니까.
“이제 시작이지……”
괴량이 제 가슴을 움켜잡았다.
까딱했다가는 내장이 쏟아져 나올 만큼 깊은 상처였다. 하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 죽지 않았다면 기회는 있다는 뜻이니까.
“추적할 준비를 해라.”
"예!"
괴량은 전투로 얼룩진 해안을 둘러보았다.
“……꼴 좋게 됐군."
각오한 일이기는 했지만, 막상 눈으로 결과를 확인하니 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남해의 바다답게 눈이 부시도록 희던 백사장은 어느새 검붉은 피로 흠뻑 물들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널린 시신들은 제아무리 담이 큰 사람이라도 섬뜩함을 느낄 만큼 참혹했다.
시체 중 멀쩡한 것을 찾기가 어렵다. 사파와 사파가 서로를 절멸할 각오로 싸워 댄다고 해도 이토록 결과가 처참하진 않을 것이다.
"크큭."
괴량을 더욱 어처구니없게 하는 것은, 이 시신들 중 대부분이 만인방도라는 점이었다. 드문드문 해남 제자들의 시신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일부러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수였다.
일방적인 패배, 그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참상이었다.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군."
옆에서 들려오는 싸늘한 목소리에 괴량이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흐른 피를 닦지도 않은 호가명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차갑게 말했다.
"주님께서 아시면 어처구니없다고 웃어 버리시겠군.”
"아니, 칭찬하실 거다."
"......"
"사냥이란 그런 거니까."
괴량이 읊조리듯 말하며 섬뜩하게 웃었다.
짐승의 사냥과 인간의 사냥은 다르다.
짐승은 자신보다 약한 짐승을 사냥하지만, 인간은 자신보다 강한 짐승을 사냥한다. 사냥하기 위해 상대보다 꼭 강할 필요는 없다는 소리다.
이제 저 화산검협도 곧 알게 될 것이다.
자신보다 약한 이에게 사냥당하는 공포를, 그리고 자신보다 약한 이에게 짓밟히는 굴욕을 말이다.
“이제 적당히 추적하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독 안에 든 쥐야."
“독 안에 든 범이겠지."
"어쨌건 독 안이지."
“흠."
호가명은 딱히 반박하지 않고 바다를 내다보았다.
저 배가 향하는 곳은 강남.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보다야 현명한 선택이라 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어느 쪽이든 저들에게는 사지(死地)일 뿐이다.
"조여 가야겠군.”
괴량이 막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이었다.
"구, 군사!"
"......음?"
추적을 위해 배를 밀러 갔던 이들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배, 배의 밑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전부요!"
"......뭐?"
"이, 이대로라면 모래톱에서 꺼낸다 해도 배가……”
호가명은 보고하는 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다시 바다로 옮겼다. 이젠 많이도 멀어진 배들이 보였다.
“한 방 먹었군.”
평소라면 이런 뻔한 수에 당할 호가명이 아니다.
'아무리 침착한 척해 봐야 화산검협이 나타난 게 내게도 무척 놀라운 일이었던 모양이군.'
호가명의 눈에 드물게 짜증이 일었다.
“배를 수배해라! 지금 당장!"
"예!"
명을 내린 그는 멀어지는 배를 차디찬 눈으로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