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1화. 독 안에 든 범이겠지. (1)
산산조각 난 검의 파편들이 어마어마한 기세로 사위를 휩쓸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면 누구도 무사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청명이 검을 제 몸 쪽으로 당기고는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검 끝에서 붉은 꽃잎 같은 검기가 폭포처럼 뿜어져 나와 청명의 몸 주위를 휘감았다.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매화난벽(梅花難壁)!
극단적일 정도로 공격적인 초식만이 가득하기에, 정파보다는 사파의 검술에 가깝다 불리는 이십사수매화검법. 그 스물네 개의 초식 중 유일하게 방어적인 성향이 강한 매화난벽이 청명의 몸 사방을 뒤덮으며 화사한 매화의 벽을 만들어 냈다.
카가가가가가가강!
폭발적인 기세로 날아든 검편들이 철벽처럼 청명을 에워싼 매화검기에 맞아 튕겨 나갔다.
“하아압!”
드물게 청명이 기합을 토했다. 그러자 몸 주위를 휘돌던 매화검기가 순간 폭발하듯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푸욱!
이미 폭발한 검편 덕에 손이 걸레짝이 되어 있던 만인방도들의 몸을 매화검기가 연이어 꿰뚫었다.
하지만 전신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있음에도 청명을 습격한 만인방도들은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 광경만으로도 이들이 지금껏 상대했던 놈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진 이들의 행위에는 청명조차도 안색을 굳혔다.
파앗!
만인방도들이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앞으로 달려든다.
콰득! 콰득! 콰득!
대책 없는 돌진.
날카로운 매화검기는 이 무모한 돌진을 여지없이 응징했지만, 달려드는 이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양손으로 제 머리와 목을 막아 내며 앞으로 또 앞으로 가속할 뿐이었다.
그깟 검기에 수십 번을 꿰뚫린다 해도 머리만 보호하면 즉사할 위험은 없다는 듯.
“흐아아아아!”
그들의 입에서 처음으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청명의 지척까지 도달한 그들이 양팔을 벌리며 청명을 부둥켜안아 왔다.
그 누구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광기 어린 돌진.
하지만 안타깝게도 청명은 ‘그 누구’에 속할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몸을 살짝 뒤로 젖힌 청명이 단번에 검을 횡으로 그었다. 방어를 도외시하고 달려든다면, 그 점을 역으로 노려 주면 그만. 청명의 검격은 정교함을 내려놓은 대신 더없이 빨랐고, 또 더없이 강했다.
파아아아앗!
달려들던 이들의 몸뚱아리가 가슴부터 둘로 갈라졌다.
하지만 일격으로 사방에서 덮쳐드는 이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는 일. 남은 이들은 기세를 조금도 죽이지 않고 청명을 덮쳐 왔다. 그들의 손에는 언제 빼 들었는지 모를 시커먼 소도(小刀)가 들려 있었다.
절체절명의 상황.
하지만 그 순간 청명의 두 눈은 오히려 더 서늘해졌다.
파아아아앗!
청명의 검이 사방으로 반월형의 검기를 뿜어냈다. 붉은 초승달 같은 검기가 달려드는 이들의 몸을 순식간에 조각조각 갈라 놓았다.
하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청명의 지척에 도달한 이가 손에 든 독비(毒匕)를 맹렬히 휘둘러 왔다.
동료들이 모조리 죽어 나가고, 제 목숨마저 경각에 달린 상황임에도 독비를 휘둘러 오는 만인방도의 두 눈에는 감정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차갑다기보다는 무기질에 가까운 무언가.
청명은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독 묻은 단도를 움켜쥔 손이 손목째 잘려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순간 청명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독?’
잘린 손목에서 울컥 뿜어져 나오는 피가 묘하게 검은빛을 띠고 있다. 저건 독에 중독된 이가 보이는 전형적인 증상.
아마 저 피를 뒤집어쓴다면 청명도 독에 중독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여유가 있다면 독 따위야 삼매진화로 태워 버리면 그만이지만, 지금과 같은 격전 속에서 그럴 만한 여유가 주어질 리 없다.
‘뭐, 중독되지 않으면 그만이지.’
파아아앗!
청명의 검이 빛살처럼 허공을 갈라, 달려드는 만인방도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푸우우우욱!
청명의 애병 암향매화검은 단련된 무인의 근육을 종잇장처럼 뚫고, 그 심장에 세 치는 넘게 박혀 들었다.
“끄⋯⋯.”
하지만 그 순간, 만인방도가 손을 들어 제 심장에 박힌 검을 움켜잡았다. 의도가 있다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행위였다. 청명은 일말의 동정도 담기지 않은 무심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검을 당겨 검을 잡은 손가락을 모조리 잘라 버리려던 그 순간.
불룩! 불룩!
죽음만을 앞두고 있어야 할 만인방도의 배가 순간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뭔가 벌어진다는 걸 직감한 청명이 땅을 박차려는 순간, 그보다 한발 빠르게 만인방도의 배가 터져 나가며 가공할 폭발이 청명을 휩쓸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난데없이 일어난 폭발이 해안에 거대한 먼지구름을 피워 올렸다.
“⋯⋯뭐지?”
이 상황만은 천하의 호가명도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혈검단주 괴량을 바라보았다. 지금 청명을 습격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혈검단원들이다. 그들이 벌이는 일은 괴량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볼만한 몰골을 하고 있군.”
괴량이 비아냥대며 말했다. 호가명의 얼굴을 길게 가른 상처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당가에서 금용암기라도 입수했나?”
“금용암기?”
그 말을 듣더니 괴량은 옅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런 게 왜 필요한지 모르겠군. 결과만 같으면 그만인데.”
“⋯⋯.”
“복잡한 게 아니다. 그냥 배를 가르고 그 안에 벽력문에서 입수한 벽력탄을 박아 넣었을 뿐이야. 대신 적당히 독 바른 강침을 둘러 뒀지.”
“⋯⋯사람의 배 안에 벽력탄을 넣었다고? 그것도 독 바른 강침을 꽂아서?”
“그래.”
호가명이 할 말을 잃은 듯 괴량을 바라보았다.
호가명 역시 사파에 몸을 담고 있으니, 결과만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수단이야 무엇이든 괜찮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건 그런 호가명의 선조차 깔끔하게 넘어선 짓이었다.
“그러고도 살 수 있나?”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군사. 벽력탄이 터지지 않아도 당연히 죽겠지. 배 안에 품어도 살 수 있을 만큼 어설픈 독이라면 애초에 쓰지도 않았을 테니까.”
“⋯⋯.”
“어차피 정상적인 수단으로는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는 것들이다. 그 목숨으로 저런 거물의 몸에 상처를 입힐 수 있다면 영광스러운 죽음이지. 그렇지 않은가?”
호가명이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지독하군.’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끔찍한 짓거리지만, 더없이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설사 그렇지 않다 해도, 호가명이 할 말은 없다.
만인방의 단들은 각각의 독립체다. 단에 명을 내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안의 혈검단원들을 어떻게 단련시키고 써먹는가는 오로지 단주의 권한이다.
“⋯⋯잡아 냈나?”
“그럴 리가.”
괴량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말했잖아. 괴물이라고. 네 미천한 무위로는 다들 비슷하게 보이겠지만, 저놈은 차원이 다르다.”
“⋯⋯.”
“기껏해야 구멍 한두 개. 아니, 어쩌면 생채기에 불과할 수도 있지.”
괴량은 점차 가라앉는 먼지구름을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그 생채기가 쌓이고 쌓여서 결국 움직일 수 없는 상처를 만드니까. 그때까지 느릿하게 조여 가면 그만이야.”
호가명의 시선 역시 먼지구름 쪽으로 향했다. 이내 먼지가 걷히고 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화산검협 청명.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지만, 호가명은 똑똑히 보았다. 그의 의복 곳곳에 난 작은 구멍들. 그리고 그 구멍 주변의 의복이 더 색 짙게 물들어 있음을.
청명은 제 몸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숭숭 뚫린 구멍에서 피가 번져 나오고 있다. 다행히 강침이 몸을 완전히 관통하지는 못해서 등판이 터져 나가는 참사는 피했지만, 그걸 과연 다행이라 해야 할지는 의문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독이 묻은 강침들이 몸 안에 박혀 있다는 말이니까.
“퉷!”
입에 고인 피를 뱉어 냈다. 목으로 밀려 올라온 피에 검은빛이 섞여 있다. 그새 독이 번진 모양이다.
“⋯⋯꽤 하잖아?”
상상도 못 했다.
청명은 수도 없는 전장을 경험했다. 심지어 그 전장에서 가장 많이 겪었던 건 마교도였다. 그 지독하기 짝이 없는 광신도들.
하지만 그런 마교도들조차 이런 방식으로 공격을 해 오지는 않았다.
그들이 광신에 물든 짐승이라면, 이들은 감정이 배제된 사냥꾼 같은 느낌이다.
“이래야⋯⋯.”
청명이 입술을 뒤틀었다. 검붉은 피에 젖은 그의 이가 섬뜩하게 드러났다.
“이래야 만인방이지.”
이들을 이끄는 건 그 장일소다. 그놈이 제 수하들을 평범하게 키워 낼 리가 없지.
청명이 몸을 돌렸다. 감상은 여기까지다. 더 시간을 지체하면 정말 위험해진다.
파아아앗!
그의 몸이 검은 선을 그리며 단숨에 해안으로 돌진했다. 어느새 그를 우회해 해안을 점거하고 있던 무리가 기다렸다는 듯 청명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은 붉은 옷을 입은 채 검을 들고 있었다.
지금껏 상대해 온 만인방과는 다르다. 이를 직감한 청명이 자세를 더욱 낮춘 순간, 앞으로 달려들던 이들이 단숨에 검을 휘둘러 왔다.
속도에 모두를 건 듯, 더없이 쾌속한 검격이었다. 청명은 무시하는 대신 침착하게 검을 맞댔다.
챙!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암향매화검에 부딪힌 혈검단원의 검이 유연하게 휘어지며 청명의 검을 휘감아 왔다.
‘연검(軟劍)?’
아니, 아니다!
아무리 내력을 밀어 넣었다고 해도, 연검 따위가 청명의 암향매화검을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
바로 그 순간, 청명의 검을 휘감은 검이 독니를 드러내는 뱀처럼 뒤틀리며 청명의 얼굴을 향해 뻗쳐 왔다. 마치 살을 제거한 뱀의 뼈처럼 마디마디 끊어져 늘어난 것이다.
청명이 두 눈을 부릅떴다.
‘사복검(蛇腹劍)!’
검편과 검편의 중앙을 철사로 이어 늘릴 수 있도록 만든 검!
수없이 강호를 종횡해도 한 번을 만나기가 힘든 기형 병기가 이 순간 청명의 얼굴을 노려 오고 있었다.
청명이 검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암향매화검을 휘감은 사복검은 필사적으로 청명의 검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움켜잡고 당기는 동작과 찌르는 동작이 동시에 이뤄진다.
오직 기형 병기이기에 가능한 괴이막측한 운용이었다.
화아아아아!
그 순간 청명의 좌수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말 그대로였다. 청명의 손이 흐려진다 싶더니 검과 그의 얼굴 사이에 수많은 손그림자를 만들어 낸 것이다. 마치 매화가 꽃잎을 흩뿌리듯이.
절정의 매화산수(梅花散手)!
카가가가강!
허공에 피어난 손그림자들이 날아드는 검을 튕겨 냈다. 기괴하지만 그렇기에 힘이 실리기는 어려운 사복검은 매화산수의 방어를 뚫어 내지 못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검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촤아아아악!
연이어 날아든 사복검이 청명의 암향매화검을 칭칭 휘감았다.
곧 팽팽하게 당겨진 사복검들이 청명의 암향매화검을 단단하게 고정했다. 결코 놓아 주지 않겠다는 듯이!
그리고 다른 혈검단원들이 땅을 박차고 솟아오르며 검을 찔렀다. 그들이 뻗어 낸 검이 제각각 기괴하게 늘어나며 휘어지더니, 커다란 사슴을 향해 달려드는 수십의 독사 떼처럼 사방에서 청명을 향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