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0화. 만인방 새끼들이나 걱정하십쇼! (5)
물론 호가명의 충격은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배에서 해안 쪽을 살피는 해남파 문도들이 받은 충격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저⋯⋯.”
곽환소는 혼이 빠진 얼굴로 말도 다 잇지 못했다.
어느새 완전히 붉게 물들어 버린 백사장 위로 붉은 피가 끊임없이 포말처럼 흩뿌려지고 있었다.
“어떻게⋯⋯.”
만인방. 해남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강남의 패자.
해남을 멸문시키기 위해 해남도로 투입된 그 만인방의 군세를 단 한 사람이 막아서고 있다. 이를 두 눈으로 지켜보는 곽환소의 심정이란 뭐라 표현하기도 어려울 만큼 복잡했다.
애초에 그는 실전이라 칭할 만한 게 이번이 처음이라 해도 무방하다.
물론 진심으로 검을 섞은 적이야 있지만, 서로를 반드시 죽이기 위해 싸운 건 이번이 처음이었고, 소수가 아닌 대규모로 이렇게 전쟁을 치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는 해안을 빠져나온 순간부터 탈진해 갑판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저 화산검협은 그들이 겪은 것을 모두 겪고도 지금 단신으로 저들을 막아 내고 있다. 아니, 되레 몰아붙이고 있다.
“사람도 아니야⋯⋯.”
옆에 선 이자양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돌아보니 그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 턱 끝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본 곽환소는 검을 휘두르는 청명에게로 천천히 다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저 위로 돌연 솟구친 둥근 무언가는 분명 만인방도의 머리통일 것이다.
‘정말 같은 사람인가⋯⋯.’
믿기 힘들었다.
지금 저 만인방도의 목을 쳐 날리는 악귀 같은 이가, 며칠 전 그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며 낄낄 웃던 사람이라는 게.
그때, 남궁도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멀어지는 것 아닙니까?”
진한 우려가 어린 목소리였다.
“물론 거리를 벌려야 하는 건 알겠지만, 너무 고립되는 것 같은데요?”
“아직 괜찮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우려에 답하는 백천의 목소리는 한없이 담담했다.
“장문대리, 하지만⋯⋯.”
“괜찮습니다.”
백천이 다시 한번 딱 잘라 말했다. 곽환소는 그런 백천을 가만 살펴보았다. 얼굴이야 살짝 굳어 있지만 눈빛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저 굳건한 신뢰, 그 하나뿐이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니 남궁도위도 말문이 막혔는지 말없이 백천과 해안의 상황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말했다.
“물론 화산검협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천우맹도라면 감히 누구도 그런 생각은 할 수 없겠죠.”
“⋯⋯.”
“하지만 전장 아닙니까? 조금 흥분한 것만으로도 상황이 완전히 뒤틀리는 곳입니다. 한순간 실기하는 것만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몇몇 이들이 불안한 기색을 띠었다.
청명이 저들에게 당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는 말이다.
하지만 청명도 사람이다 보니 저리 격하게 싸우다 보면 물러나야 할 시기를 놓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저 많은 이들 사이에 고립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숙⋯⋯.”
조걸이 살짝 걱정 실린 목소리로 백천을 불렀다. 남궁도위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듯이. 지금이라도 신호를 보내 청명을 불러들여야 한다는 듯이.
하지만 백천은 대답 없이 묵묵히 청명을 바라볼 뿐이었다. 조걸은 답답한 마음에 다시 한번 백천을 불렀다.
“사숙.”
“흥분이요?”
하지만 백천의 대답은 조걸이 아닌 남궁도위에게로 향했다.
“그런 걸 할 수 있는 놈이면 좋겠습니다.”
“⋯⋯예?”
그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놈은 흥분하지 않습니다. 흥분하는척하는 것뿐이죠.”
“⋯⋯.”
“물론 놈도 사람이니 흥분해 자신을 잃을 때가 있겠지만, 적어도 그게 지금은 아닙니다.”
그 말에 윤종과 유이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흥분한 게 아니라는 겁니까?”
남궁도위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친 악귀처럼 날뛰고 있는 청명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지켜보는 이도 절로 피가 끓을 만한 광경이다. 그런데 어찌 그 광경을 만들어 내는 이가 침착할 수 있단 말인가.
“알게 될 겁니다.”
그러나 백천은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남궁도위도 결국 입을 닫았다. 사실 백천의 말이 조금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남궁도위는 그의 입장을 이해했다.
이건 설명을 해 주지 않는 게 아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논리와 이론이 아니라, 함께 겪어 오며 쌓아 올린 무언가가 내어 주는 대답이다. 그 신뢰의 근원을 사람의 말로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질릴 정도군.’
어떤 면에서는 사실 섬뜩하기까지 하다.
만인방이라는 거대 문파를 상대로 홀로 싸우고 있는 이가 절대 흥분하지 않았고, 절대 당하지 않을 것이며, 절대 실수하지 않을 거라는 굳건한 믿음. 이는 거의 맹종의 영역이 아닌가?
형태야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지금 이들이 청명에게 보여 주는 믿음은 장일소에 대한 만인방의 믿음이나, 천마에 대한 마교의 신앙과도 닮아 있다.
청명은 권위나 배분이 아니라, 실력과 행적만으로 이들에게서 이토록 대단한 신뢰를 얻은 것이다.
남궁도위의 눈에 미친 듯 싸우고 있는 청명의 모습이 보였다.
‘나도 언젠가는 저리될 수 있을까?’
그 등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파아아아앗!
조각난 몸뚱이가 솟구치며 흩어진다. 단면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청명의 얼굴을 뒤덮었다.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청명의 눈은 더없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거리는?’
그의 눈이, 감각이 호가명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를 단번에 가늠해 냈다.
‘멀군.’
앞을 가로막는 놈들이 짜증 날 정도로 많다. 그 수가 조금만 적었어도, 무리를 해서라도 달려가 저놈의 목을 베어 버렸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돌파해 들어가는 건 가능해도 무사히 빠져나오는 게 불가능하다.
달아나는 이의 등에 암매검을 쑤셔 박았다. 학질에 걸린 듯이 떨어 대는 이의 등에 꽂힌 검을 비틀며 위로 올려 쳤다.
가능한 한 많은 피가 흩뿌려지도록. 그리하여 모두가 더 확실하게 이 광경을 볼 수 있도록.
‘어떻게 할까?’
생각 같아서는 무리를 해서라도 잡고 싶다.
본능적으로⋯⋯. 아니, 굳이 본능을 언급할 것도 없이 알 수 있다. 저 호가명이라는 놈은 생각 이상으로 까다로운 놈이다.
청명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순간순간 말도 안 되게 기책을 내놓는 장일소보다 더 상대하기 어려운 놈일지도 모른다.
기책이란 대개 확실한 이득을 얻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호가명은 모험을 감행하지 않고 착실하고 묵묵하게 제 역할을 수행하는 이다.
저런 이에게 뒤를 잡혔을 경우 어떤 참사가 벌어지는지 모를 청명이 아니다.
강남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도, 추후에 벌어질 사패련과의 싸움을 위해서도 호가명을 제거해 두고 싶은 마음이지만⋯⋯.
“으, 으아아아아!”
더는 달아날 곳이 없다는 판단이 섰는지, 달아나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이들이 청명을 향해 다시 돌아섰다. 그러더니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어 왔다.
대로에서 고양이를 만난 쥐는 뒤도 보지 않고 달아나지만,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물려고 달려드는 법. 잠시 생각이 깊어지는 바람에 달아날 틈을 주지 않고 몰아쳐 버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파르르르르르!
청명의 검이 일순 미친 듯 빠르게 떨리더니, 끝에서 붉은 매화 꽃잎을 줄줄이 뿜어 냈다.
파아아아아앗!
흩뿌려진 매화 잎들은 마치 생명과 의지라도 가진 양, 사방으로 번져 나가며 달려드는 만인방도들을 난자했다.
“아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피로 물든 해안에 한 겹 공포를 덧씌웠다.
전신을 수십 번 꿰뚫린 이들이 몸에 난 모든 구멍에서 피를 뿜으며 허물어졌다. 하지만 정작 그 끔찍한 참상을 빚은 청명의 눈은 여전히 한없이 차가웠다.
‘무리군.’
청명이 살짝 공세를 늦추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들을 타 넘어 단숨에 호가명을 노릴 수 있겠지만, 뒤가 확실하지 않다.
특히나 지금 그가 상대하고 있는 이들은 만인방 내에서도 조무래기에 불과하다. 진짜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은 지금 뒤쪽에 있는 호가명의 주변을 철통같이 방비하고 있다.
아마 이제 곧 그가 싸워야 할 이들은 바로 저들이겠지.
‘이래서 싫다니까. 사파 새끼들은.’
청명은 단 한 명의 제자를 구하기 위해 적진으로 뛰어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파는 겉으로는 날뛰어 대는 척하면서, 적의 체력을 빼기 위해 제 동료를 먹이로 던져 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순간 치미는 혐오감에 청명의 눈살이 일그러졌다.
‘위치는?’
그는 슬쩍 바다로 나간 배들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가늠했다.
슬슬 아슬아슬하다.
‘여기까지군.’
청명이 검을 빙글 돌려 역수로 움켜잡았다.
“이번에는 그냥 간다만⋯⋯.”
피에 젖은 청명의 입술이 벌어지며 하얀 이가 섬뜩하게 드러났다.
“그래도 인사는 해야지.”
콰앙!
청명이 강하게 땅을 박차며 위로 솟구쳐 올랐다. 허공에서 허리를 뒤로 한껏 뒤틀었다. 이내 그의 검에서 붉은 검기가 가공할 기세로 번져 나왔다.
파아아아아아앙!
공기를 터뜨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허공에 붉은 선이 피어올랐다.
남해의 푸른 하늘을 반으로 가르듯 그어진 붉은 선이 만인방 군세의 위로 격해 호가명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들었다.
“막아라!”
호가명의 주위를 호위하던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솟구쳤다. 거대한 도가 날아든 청명의 검기를 후려쳤다.
카각! 카가가가각!
‘뭐?’
하지만 막대한 내력이 실린 도와 가녀린 검기가 맞부딪혔음에도 검기는 튕겨 나가지도, 이지러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막중한 무게의 도를 밀고 들어왔다.
‘아, 안⋯⋯.’
카가가가가가각!
내력이 실려 세상 그 무엇보다 단단해진 도가 비명을 내지르며 갈려 나간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검기에 실려 있는 가공할 힘이었다.
“아아아아악!”
막아섰던 이들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그리고 청명이 발출한 검기는 조금도 그 기세를 잃지 않고 호가명을 향해 일직선으로 쇄도했다.
“군사!”
“피하십시⋯⋯.”
콰아아아아앙!
호가명의 등 뒤에서 모래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하지만 호가명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 자리에 오연히 서 있었다.
스슥.
그 순간, 그의 왼쪽 눈꼬리 바로 옆부터 귀에 가까운 뺨까지 길게 가로 그은 듯한 붉은 선이 생겨났다. 왼쪽 얼굴이 삽시간에 그가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 하지만 호가명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지 한없이 어둑한 눈으로 청명을 주시할 뿐이었다.
“흥.”
내려선 청명이 입꼬리를 뒤틀며 조소했다.
‘역시 재미없는 놈이라니까.’
하지만 인사는 했으니, 이걸로 됐다. 강하게 검을 휘둘러 달라붙는 적을 떼어 낸 청명은 날쌘 담비처럼 몸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아앗!
청명의 아래쪽 땅, 피로 물든 붉은 모래 속에서 십여 줄기의 검이 솟구쳤다.
하지만 청명은 되레 비웃으며 몸을 비틀었다. 실로 예리한 공격이지만, 이 정도에 당할 그가 아니다.
하지만 그때.
콰아아앙!
위로 솟구친 검들이 순간적으로 빛을 내뿜는다 싶더니, 이내 폭발하며 수백 개의 조각으로 화해 사방으로 비산했다.
‘뭐?’
청명이 순간 두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