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9화. 만인방 새끼들이나 걱정하십쇼! (4)
“으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일각이 완전히 무너진다.
물론 해안을 뒤덮을 듯한 저 군세에 비하면, 청명이 무너뜨린 부분은 대세에 크게 영향조차 줄 수 없을 만큼 작다.
하지만 상황을 냉정히 지켜보는 이들이라면 그 작은 균열이 만들어 낸 여파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밖에 없다.
청명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파장이 고요한 호수에 생겨난 동심원처럼 점점 번졌다. 금방이라도 상대의 살을 씹고, 피를 들이킬 듯 달려들던 군세가 일순 주춤했고, 이내 점점 더 기세를 잃어 가기 시작했다.
“비, 비키라고! 이 개자식들아!”
“물러서! 물러서! 으아아아아아!”
그건 더 이상 일천에 달하는 군세와 한 개인의 전투가 아니었다. 청명에게 완전히 질려 버린 이들, 만인방이라는 드높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겁을 집어먹어 버린 이들이 몸을 돌려 달아난다.
완전히 이성을 상실해 버린 그들은 막아서는 동료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도를 휘둘렀다.
“이, 이 새끼들이 미쳤나!”
“왜 이러는 거야!”
“아아아아아악!”
제 동료의 도에 맞은 이들은 처음에는 당황했고, 곧 분노했다. 하지만 결국엔 짙은 당혹감에 덩달아 덜컥 몸이 굳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한 만인방도가 몸을 굳힌 채 혼란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장에서 혼란에 빠지는 일은 흔하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는 것도 흔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라고 해서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는 데 익숙하기야 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지금 정신을 놓고 제 편에게 병기를 휘두르면서까지 달아나겠다고 악을 쓰는 놈들이 모두 만인방의 백전노장들이라는 점이다.
처음 전장에 투입된 신출내기가 아니다. 이들은 이미 수많은 적과 싸우고, 수많은 문파를 피로 물들인 전장의 마귀들이다.
그런 이들이 대체 어떻게 오늘 처음 피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적을 두고 달아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이리 광란하면서?
“지, 진정 좀 하라고!”
“비켜! 비키라고! 비켜! 으아아아아아아!”
완전히 질려 버린 이들은 이 순간에도 악을 쓰며 그를 짓누르고 밀쳐 가며 달아나려 몸부림치고 있었다. 당장 비키지 않으면 그의 머리를 막고 있는 도와 함께 통째로 베어 버리겠다는 듯 말이다.
“이 미친⋯⋯.”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아앙!
공기를 잡아 찢는 것만 같은 파공음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달아나려 안간힘을 쓰던 만인방도의 가슴에 붉은 선이 피어올랐다.
“뭐⋯⋯.”
처음엔 세필로 그은 것처럼 가늘던 선이 점점 두꺼워지더니, 이내 상반신이 비스듬히 그어진 선을 따라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몸이 반으로 갈라지고도 죽음을 채 다 수용하지 못한 몸뚱이가 여전히 서 있었다.
촤아아아아악!
잘린 단면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조금 전까지 살아 있었던 그 만인방도를 막고 있던 이는 보았다. 무섭게 솟구치는 그 피 너머에서 달려드는 검은 그림자를.
검은 머리를 시뻘겋게 적신 핏물이 비산하듯 사방으로 흩뿌려진다. 유독 돋보이는 건 긴 머리카락 사이로 엿보이는, 웃고 있는 입술. 그리고 새하얀 이뿐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앞에 있던 이들이 왜 미친 듯이 달아나려 했는지, 그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시야가 막혀 있어 차마 보지 못했던 사신은 애석하게도 그에겐 달아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파아아아아앙!
다시 터져 나오는 맹렬한 파공음과 함께 그의 목이 몸을 떠나 허공으로 치솟았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머리가 ‘죽음’이라는 절대적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극히 짧은 시간. 그는 똑똑히 보았다.
청명이 먹이를 노리는 흑표처럼 목을 잃은 그의 몸뚱이를 짓밟으며 앞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말이다.
‘차라리⋯⋯.’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떠올리려 했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호가명이 차가운 눈으로 전장의 상황을 응시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단련시킨 만인방도들을 단 한 사람이 말 그대로 유린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렇다 할 표정의 동요 없이 상황을 응시하고 있던, 호가명이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어느새 꽉 쥐여져 있던 주먹을 천천히 풀었다. 얼마나 힘을 주고 있었는지, 창백하게 질린 손에 피가 돌며 개미가 갉아 대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다.
“후.”
짧게 숨을 내쉰 호가명이 느리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지만, 이쯤 되면 그게 오히려 못난 모습이고, 과한 허세다. 호가명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가 자신이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꼴이 말이 아니군.”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알고 이해하기에 동요할 수밖에 없다.
초전에 압도적인 힘으로 단번에 기세를 제압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과격하게, 될 수 있으면 잔인하게 적을 참살한다. 맞서 싸우려 들면 어떤 최후를 맞는지 적들이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이란 결국 눈으로 보는 것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아무리 머리로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 해도, 결국에는 당장 코앞에 닥쳐 있는 공포를 본능으로 먼저 받아들이게 된다.
결과적인 승리?
당장 내가 천참만륙이 나 죽을 상황인데, 내가 죽고 나서 얻게 될 승리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저 검 앞에 선 이에게 만인방의 영광 따위가 티끌만큼이라도 중요하겠는가?
그렇게 한 사람이 몸을 돌리는 순간, 공포는 전염된다. 그 전염된 공포는 순식간에 퍼져 나가 군 전체의 사기를 꺾고, 결과적으로는 대항할 의지마저 끊어 버리는 것이다.
호가명은 이 방식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이유야 간단하다. 이건 다름 아닌 만인방이 즐겨 써 온 방식이기 때문이다.
장일소라는 이름이 주는 공포와, 장일소의 명이라면 지옥 불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드는 살귀들이 모인 집단이라는 인식. 그 인식을 만들어 내고 조장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호가명과 장일소였다. 그래야 적들이 그들에게 겁을 집어먹을 테니까.
공포를 바탕으로 초전에 압도적인 모습을 보인 후 적의 사기를 꺾는다. 그리하여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승리를 몇 번이나 일궈 내었다.
지금 호가명은 자신들이 사용했던 방식을 그대로 당하게 됐을 때 어떤 꼴이 되는지 확실히 실감했다.
아니, 저건 오히려 더하다. 훨씬 과격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한 군세를 어떻게 짓밟는지를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화산검협.”
확실히 저 인간은 정상이 아니다.
장일소는 현종이라는 광인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호가명은 달랐다. 호가명이 봤을 때, 현종은 그저 협의라는 명목에 함몰된 우인(愚人),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건 화산검협 청명이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청명의 강함이야 놀랍지도 않다. 이제 와 청명이 강한 것에 놀란다면 호가명은 만인방의 군사를 자처할 자격이 없는 멍청이에 불과할 것이다.
그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건, 홀로 대군을 상대로 뛰어드는 저 광인의 행동 방식이었다.
천하에 청명보다 강한 이가 없는가?
천만에.
있다. 반드시 존재한다. 당장 장일소만 해도 저 화산의 미치광이보다 강하다고 확신한다. 정파에서도 일문의 장문, 혹은 은거한 전대의 고수 정도는 저 청명보다 강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강자 중 누구도 화산검협처럼 저렇게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그 무모한 짓의 결과로 자신이 죽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미친놈은 자신 따위야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달려들고, 검을 휘두르고, 가장 전방에서 적을 짓밟는다.
멍청하고, 한심하고, 또한 벌레 같은 짓거리다. 호가명의 상식으로 보았을 땐 그랬다.
“으아아아아아악!”
“달아나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악!”
하지만 그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가 호가명이 심혈을 기울여 저들의 몸에 새겨 넣은 군율을 저렇게 처참히 박살을 내놓았다.
호가명이 고개를 다시 내렸다. 겨우 의식해 폈던 주먹이 꽉 쥐여 있었다. 손톱이 부러져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본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아 버렸다.
‘가명아.’
인정해야 한다. 이미 알고 있던 일이지만, 그저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정해야 한다. 저 작자는 그의 상식으로 재단할 수 있는 이가 아니라는 것을.
“피해가 크군.”
들끓는 속을 겨우 진정시키고 있노라니, 호가명의 귓가에 비웃음 서린 혈검단주 괴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들로는 못 잡지.”
“⋯⋯.”
“저건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 아니다. 짐승과 짐승의 싸움이지. 물론 승냥이들도 떼로 몰려들면 범을 잡기도 하지만⋯⋯.”
괴량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그건 승냥이들에게 여유가 있을 때 이야기지, 첫걸음부터 선두에 선 놈이 목을 뜯겨 피를 뿜기 시작하면, 남는 것은 일방적인 학살뿐.”
기세라는 건 특히 전장에서는 더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화산검협이라는 저자는 감각과 본능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래서? 이미 실기한 전장이니, 구경이나 하시겠다?”
“왜? 죽어 나가는 놈들의 목숨이 아깝기라도 한가? 천하의 호가명이?”
호가명이 차가운 눈으로 괴량을 보았다.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 군사.”
괴량이 음울하게 웃어 댔다. 소리 내어 웃기는 했으나, 그의 눈은 싸늘하게 청명의 움직임을 단 한시도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짐승은 범을 잡을 수 없지. 범을 잡는 건 사냥꾼이야. 커다란 대호를 잡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 아나?”
“⋯⋯들키지 않는 것.”
“아니, 들키는 거다.”
호가명의 눈이 일순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하지만 괴량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설명을 마저 해 주었다.
“평범한 범은 네 말처럼 기습으로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진짜 대호는 그런 방법으로는 못 잡아. 중요한 것은 힘을 빼 놓는 거지. 습격이 불가능한 거리에서 냄새를 풍기며 내 존재를 알리는 거다. 며칠이고, 몇 달이고, 내 존재를 계속 신경 쓰며 지쳐 가도록 말이다.”
“⋯⋯.”
“저 정도의 목숨?”
괴량이 섬뜩하게 웃었다.
“머릿수나 채우는 저런 허접한 놈들이 저 화산검협의 체력이라도 빼 놓을 수 있으면 되레 영광스러운 죽음 아닌가?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은 심정이야.”
“네놈.”
“아아⋯⋯. 대신.”
괴량의 두 눈에 섬뜩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놈은 반드시 죽는다. 날뛰면 날뛸수록 더욱더 확실하게.”
스멀스멀 번져 오는 괴량의 살기를 느끼며 호가명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검협.’
피보라 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청명에게 정확히 그의 시선이 꽂혔다.
‘너는 반드시 죽인다.’
설령 이곳에 있는 이들을 모두 잃는다 해도, 화산검협만 죽일 수 있다면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반드시⋯⋯.’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천천히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