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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68화 (1,269/1,567)

1268화.

만인방 새끼들이나 걱정하십쇼! (3)

“청명 도자아아아아앙!"

등 뒤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목소리는 청명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하지만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호들갑 떨기는.'

슬쩍 뒤쪽을 살피니 해안을 떠난 배가 속도를 높여 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무인들이 최선을 다해 노를 저어 대고 있으니 곧 안전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겠지만,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청명은 앞으로 물밀듯 밀려오는 만인방도들을 응시했다. 물경 천에 달하는 이들이 눈을 번뜩이고 거친 숨을 토하며 달려드는 모습엔 청명조차도 머리털이 곤두섰다.

이대로 만인방 놈들이 퇴각하는 이들을 덮친다면 피해가 커질 게 자명했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이 말이지?'

말도 안 되는 짓이다. 다른 놈들도 아니고 만인방의 방도들이다. 제아무리 청명이라 해도 일천에 달하는 만인방도와 홀로 맞서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

" 크아아아아앗!”

반쯤 이성을 잃은 듯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만인방도를 보며 청명이 미소 지었다.

"간만에……”

입꼬리가 위로 씩 올라가며 새하얀 이가 사납게 드러났다.

“단순해서 좋네!"

생각할 필요가 없다.

망할 애송이 놈들이 뭘 보고 있는지, 뭘 겪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강호라는 아비규환의 장이 이 순간에도 어떻게 뒤틀려 가고 있는지 등등.

내내 청명의 머릿속에서 들끓던 복잡한 상념들이 증발하듯 사라졌고, 그 자리를 감각들이 가득 채웠다.

코를 마비시키는 듯한 피비린내, 귀가 먹먹할 정도로 누군가가 질러 대는 고함, 피부가 저릿저릿할 만큼의 지독한 살기.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적, 적, 오직 적.

청명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광경이었다.

타탓!

발끝이 모래를 밟고 박차는 감각이 전신을 타고 올라 머리끝에서 터졌다.

팟! 파앗! 파아앗!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보폭은 점점 더 커지고,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역수로 쥔 검을 한껏 젖힌 채 몸을 숙인 청명이 한 줄기 검은 섬전이 되어 만인방도들의 해일 가운데로 파고들었다.

만인방도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화산검협!'

혼자라면 감히 대적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절대 강자다. 하지만 지금 화산검협은 혼자다. 그러니 겁을 먹을 이유 따위는 추호도 없다.

"죽어라아아아아아!"

본능적으로 움츠러드는 어깨를 펴기 위해 쩌렁쩌렁한 기합을 토해 낸 이들이 젖 먹던 힘을 다해 도를 내리쳤다. 맹렬한 적의와 거친 악의를 품은 도가, 화산검협의 작은 육체를 향해 일직선으로

숱하게 내리그어졌다.

콰아아아아앙!

내력과 초식의 조화 따위는 무시해 버린, 그저 상대를 어떻게든 찢어발기겠다는 일념만이 가득한 도격들이 백사장에 떨어지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모래가 먼지로 으스러지며 새하얀 뭉게구름이 피어올랐다.

'어디지!'

순간적으로 시야가 흐려지자 만인방도 중 하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상대는 화산검협이다.

아주 잠깐 종적을 놓치는 것만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부릅뜬 눈으로 미세하게 갈라진 모래알이 파고들었지만, 만인방도는 결코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기감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어디……!'

순간 노력이 헛되지 않게 만인방도의 기감이 청명의 움직임과 위치를 포착했다. 하지만 만인방도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안도와 환희가 아닌 경악이었다.

'뒤? 어, 언제 ...…'

욱신!

그 순간 목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공포가 밀려들었다. 반쯤 본능적으로 목을 움켜잡으려던 그의 시야에 끔찍한 광경이 펼졌다.

앞에 있던 동료들의 목에 가는 세필로 그은 것 같은 붉은 선이 생겨나더니, 이내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책장을 넘기다 손끝을 베인 것 같은 따끔한 통증은 점점 뜨거워졌고, 이내 화상을 입을 것 같은 열기로 뒤덮였다.

그 뜨거움이 목을 넘어 어깨로 번져 갔다. 만인방도는 제 몸에 느껴지는 열기가 무엇 때문인지 그제야 알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만인방도는 웃어 버리려 했다.

'피라는 게...... 생각보다 더 뜨거.…'

하지만 그는 웃음을 채 완성하기도 전에 허물어졌다.

촤아아아악!

십여 명의 목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뒤쪽에 있어 화를 면한 이들은 충격에 두 눈을 홉떴다. 결과야 눈으로 확인했으니 명확하다지만 그 과정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달려들던 청명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바로 지척에 나타났고, 먼저 달려간 동료들이 돌연 피를 뿌리며 쓰러진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학의 상식을 깨 놓는 광경이었다.

사람이란 본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높은 경지로 해내는 이에게는 경외를 느낀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경지의 일을 벌이는 이에겐 공포를 느끼는 법이다.

그리고 그들에겐 이보다 더 큰 공포가 밀어닥쳤다. 화산검협이 이번엔 그들의 코앞까지 다가왔으므로.

"으, 으아!"

처음 선두에 있던 이들이 도에 적의를 실었다면, 이들의 도에 실린 건 당혹감과 공포였다.

청명은 그 흔들림과 균열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파아아앗!

뻗어나간 검이 도를 움켜잡은 손을 손목째 잘라 냈다. 위로 쳐들렸던 도는 그 힘을 내리치는 것으로 전환하지도 못한 채 팽이처럼 회전하며 솟구쳤다.

서걱!

청명의 검은 아직 제 손목이 잘린 걸 인식도 다 하지 못한 이의 목을 단숨에 그었다.

파아아아앗!

또다시 피가 솟구친다. 뒤쪽에 있는 이들의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피, 피, 오직 피뿐이었다.

"이, 이놈...... 컥!"

고함을 치려 했던 입으로 청명의 검이 틀어박혔다. 얼마나 빨랐는지, 마치 청명의 검이 공간을 격해 그곳에 나타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끄륵......."

경추가 끊긴 이의 혼백이 그 육신을 채 떠나기도 전에, 목을 가로로 베며 뚫고 나온 검이 굶주린 뱀처럼 다음 먹이를 향해 쇄도했다.

스아아아앗!

잘 언 얼음을 송곳으로 빠르게 긁는 듯한 소리와 함께 청명의 검이 공기를 갈랐다. 이내 만인방도들의 육체가 빠르게 그였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으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예리한 날이 살을 베고 혈관을 끊는 소리가 처절한 비명과 뒤섞여 울렸다.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파아아앗!

청명이 지나간 자리마다 붉은 꽃이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듯한 광경이었다. 하늘을 향해 치솟았던 피는 후두둑 소리와 함께 백사장에 떨어졌다.

푸른 바다와 새하얀 백사장, 그 백사장을 뒤덮는 검은 물결과 그사이 점점이 번져 가는 붉은 피.

하늘 위에서 이 광경을 바라본다면, 어느 신선이 세상이라는 화폭에 일필휘지로 그려 낸 한 폭의 그림쯤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그림 속에 있는 이들에겐 아름다운 광경일 수가 없었다.

"히, 히익......”

눈앞의 모든 것을 짓밟을 기세였던 이들이 주춤했다.

전신을 붉게 물들인 채 다가오는 청명의 모습만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시각은 오감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이고 강렬한 감각이다.

동료가 뿌리는 피의 열기에 흥분했던 이들도, 머릿수가 압도적인 입장이라 안심했던 이들도,

어쩌면 화산검협이란 거물의 목을 자신이 베게 될지도 모른단 헛된 환상에 취했던 이들도…... 이 참상 앞에선 피가 식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그극.

수많은 이들을 고혼으로 만든 검귀가 전신을 피로 적신 채 다가온다. 손에 들린 검이 붉게 젖은 모래를 긁어 대며 소름 돋는 소리를 자아냈다.

"어......"

언젠가부터 선두에서 달리던 이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또옥.

흠뻑 젖은 청명의 머리카락 끝에서 핏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라 해도 믿을 것 같은 외양이다.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에서 북해의 삭풍 같은 눈빛이 드러난 순간 만인방도들의 가슴속에서 있어선 안 될 감정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

턱.

누군가의 등과 누군가의 어깨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아주 희미한 소리에 불과하지만,

전장에서는 더없이 많은 의미를 담은 소리이기도 했다.

“마, 막..….”

누군가 입을 열려고 한 순간, 청명의 검이 일순 수십 개의 검영을 그려 내며 멈춰 버린 이들을 뒤덮었다.

파아아아앗!

순간 둑이 터진 것처럼, 검에 휩쓸린 이들이 이리저리 쏟아지듯 튕겨 나갔다.

"히,히익!"

그 범위 내에서 유일하게 검격을 피해 낸 이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로 몸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 했다.

콰각!

하지만 청명이 배는 더 빨랐다. 사내가 굽힌 무릎을 채 펴기도 전에 청명의 검이 그의 목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아무리 전력을 다해 도를 휘둘러도 목이 꿰뚫리는 게 더 빠른 상황.

하지만 사내는 자신이 왜 만인방도인지를 그 순간 증명해 냈다. 검이 목울대를 뚫는 순간 사내가 검을 양손으로 움켜잡고 막은 것이다.

“끄, 끄륵……"

절체절명의 순간에 발휘한 임기응변이 사내의 목숨을 구했다. 목이 완전히 꿰뚫리기 직전에 검을

멈춰 세우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끄으....…"

두 눈에 핏발을 잔뜩 세우며, 그는 필사적으로 암매검을 밀어 냈다.

하지만 그 순간, 청명의 입꼬리가 픽 올라갔다.

뿌드드득!

피부와 금속이 서로 마찰해 짓이겨지는 소리와 함께 청명의 검이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카각!

막대한 내력을 담은 손이 종잇장처럼 갈라지며 검이 뼈에 박혔다.

카가각! 카가각!

뼈마저도 갉으며 사내의 목으로 검날이 더 깊게 파고들었다.

"끄......르륵......”

사내의 입에서 붉은 피가 폭포처럼 콸콸 새었다. 이 와중에도 사태의 손은 절박하게 검을 움켜잡은 채였다.

보는 이에게 믿기지 않을 만큼의 공포를 주는 광경이었다. 이 와중에도 청명의 눈은 흥분한 기색도 없이 차갑기 이를 데 없어서.

"끄르륵…...”

사내의 몸이 경련하며 덜덜 떨렸다. 청명의 검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사내의 목을 꿰뚫고 있었다.

“끄륵......”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사내의 두 눈은 혈관이 모조리 터져 흰자위를 찾아볼 수도 없이 붉었다.

뿜어져 나온 피가 흐르는 눈물과 뒤섞여 얼굴을 뒤덮었다.

“사, 살려......”

피거품이 끓으며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게 말이 짓뭉개졌다.

하지만 청명만은 정확히 이해했다. 만인방도의 절박한 두 눈을 보며 청명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웃기지도 않지.”

파아아앗!

그 순간 청명의 검이 가공할 속도로 당겨졌다. 동시에 필사적으로 암매검을 움켜잡고 있던 사내의 양손이 단번에 잘려 허공으로 솟구쳤다.

"아, 안......”

파아아아아아앗!

뒤이어 사내가 본 것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그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는 청명의 검이었다.

콰아앙!

검과 사람의 머리가 충돌하는 순간 폭음이 터졌다. 이는 베어 내는 게 아닌, 부수는 일격이었다.

검면에 충돌한 사내의 머리가 터져 나가며 조각난 머리뼈가 폭죽처럼 비산했다.

털썩.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썩은 짚단처럼 쓰러졌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이로 설명할 수 없는 차가운 공기가 모두의 가슴을 서늘하게 식혔다.

저벅.

무심하게 검을 늘어뜨린 청명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으......"

전신에 피칠을 한 모습은 무섭지 않다.

"어으......"

사람을 베어 기름이 낀 검도, 그 점에서 흘러내리는 피도 피를 뒤집어쓴 이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뜨끈한 피비린내도 마찬가지다.

"으,으으으..…”

하지만 저 눈이 문제다. 이미 숱한 이를 잔혹하게 베었음에도 단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이 차가운 저 눈만은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으…… 으, 으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악!"

누군가가 크게 비명을 내지른 순간 앞쪽에 있던 이들이 몇몇이 몸을 돌리고 공포에 질려 악을 쓰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야! 자리를…...!"

"비켜! 비키라고! 이 개자식아! 으아아아아아!"

공포에 이성을 잃은 이들이 만류하는 이를 향해 도를 휘두른다. 달아나려는 자와 막아서려는 자들이 제멋대로 뒤엉켜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이들은 더 이상 만인방도, 사파도 아니었다. 그저 피에 굶주린 맹수를 보고 달아나기 위해 발악하는 연약한 짐승에 불과했다.

그 모습을 본 청명의 입에서 짧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땅을 박찬 그가 달아나려는 이들의 등에 검기를 쑤셔 박았다.

"싱겁잖아? 응?"

다시 한번 청명의 온몸이 피로 흠뻑 젖었다. 새하얀 이마저도 붉게 물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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