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7화.
만인방 새끼들이나 걱정하십쇼! (2)
"됐다!"
“하여튼 힘만 무식하게 세 가지고는!"
뒤쪽의 상황을 곁눈질하던 화산의 제자들도 순간적으로 환호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 배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여기서 몰살당할 판이었는데, 역시 혜연은 못하는 게 없는 사람이다!
"사숙!"
“아직이다! 더 버텨!"
백천이 크게 외쳤다.
배가 물에 떴다고는 하지만, 아직 물러날 때가 아니다. 이들은 평범한 무인이 아니다. 그 만인방의 방도들이 아닌가, 바다 위에 있는 배라 해서 공격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공격하기 쉬워질 것이다. 배에 적당히 구멍만 뚫어 버리면 되니까. 일단은 놈들이 배를 공격하기 어려울 만큼의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
"큭! 사숙!"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적은 끝없이 밀려오고 사람의 집중력은 무한하지 않다. 무엇보다 적의 기세를 꺾어 놓느라 단기간에 쏟아낸 내력이 슬슬 간당간당했다.
카강!
날아든 도를 쳐 내며 백천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파들은 적의 기세를 귀신같이 알아챈다. 천우맹도들이 조금씩 힘겨워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밀려오는 만인방도들은 점점 더 그 기세를 높이고 있었다.
"흐하하하하핫!"
"화산의 목이다! 잡아 뜯어라!"
동료 의식이 없다는 건 결코 전투에 있어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적어도 백천은 그렇게 믿어 왔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다는 걸, 백선은 이 순간 뼈저리게 절감했다.
이들은 함께 고락을 나누던 동료가 눈앞에서 베어 죽어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아니, 흔들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했다.
그 비정함이 백천을 짓눌렀다.
'이게 진짜 만인방……'
막아 내야 한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해남의 장로들부터 먼저 무너질 것이다. 나이가 든 무인은 내력 덕에 더 강해지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싸움에는 지구력이 필요하다. 길어질수록 내력 이전에 체력이 먼저 갉아먹히니까.
'어떻게 해야 하지?'
이곳의 책임자는 백천이다. 결정은 그가 내려야 한다.
그의 판단에 수십을 넘어 수백의 목숨이 걸려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바로 그때였다.
백천의 귓가에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잡고 휘두를 것처럼 하더니."
"처, 청명..….”
"입만 살아서는!"
청명이 앞으로 박차고 나갔다.
백천의 두 눈에 달려 나가는 청명의 등이 똑똑히 보였다. 순간적으로 그가 달려 나오니 만인방도들이 일제히 거칠게 병기를 휘두르며 공격을 집중시켰다.
이윽고 청명의 손끝에서 십여 개의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니, 그건 빛줄기가 아니라 검격이다. 눈으로 좇을 수도 없이 빨라 그저 희끄무레한 빛줄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검격이었다.
서걱 서걱! 서적! 서걱! 서걱! 서걱!
병장기를 휘두르던 만인방도들이 제 몸을 움켜잡으며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목과 손목, 대퇴부와 옆구리까지.
그 짧은 공방 속에서도 청명의 검은 정확하게 상대의 치명적인 급소만 여지없이 끊어 놓았다.
"이 이놈!"
파아아아앙!
공기를 찢어발기는 파공음과 함께 날아든 검이 달려들던 만인방도의 목을 단숨에 쳐 날렸다. 몸을 떠나 떠오른 사람의 머리가 그 여력만으로 팽이처럼 회전하며 사방으로 피를 흩뿌렸다.
"이, 이..….”
온 얼굴에 피칠을 한 청명이 기괴한 미소를 흘렸다. 그러더니 주춤 물러서는 만인방도를 향해 섬전처럼 따라붙었다.
파아아아아앙!
또 한 번 검이 휘둘러지는 순간, 다급하게 들어 올려진 도와 함께 인간의 육체가 통째로 갈라졌다.
“괴, 괴물 같은…..”
만인방은 수도 없는 전투로 세력을 쌓았고, 명성을 얻었으며, 마침내는 사패련의 수좌까지 차지했다. 방도 하나하나가 백전노장인 동시에 제 목숨에 미련이 없는 전귀들이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모르는 이들의 눈에 지금 분명한 공포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들에게 동료의 죽음은 두려움의 요소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사파라 해도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사파이기에 제 목숨은 아까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파아아앗!
벼락처럼 뻗어진 검이 가슴을 꿰뚫는다. 육체를 파고든 검에 근육과 힘줄이 더덕더덕 달라붙는 순간 검이 순간적으로 비틀어지며 사람의 몸을 안에서부터 헤집어 놓았다.
"끄어어..….”
몸속이 산산조각 나는 고통에 직면한 이가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경련했다.
파아아아앗!
몸을 빠져나간 검은 연이어 휘둘러지며 그의 목을 단번에 쳤다.
쾅!!
포탄처럼 쏘아지는 동료의 머리를 엉겁결에 도로 쳐 낸 만인방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동료의 머리를 후려쳤기 때문에? 아니다. 그런 인간적인 이유일 리 없었다.
도를 후려친 순간, 어느새 코앞까지 쇄도해 온 청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프르르르.
청명의 암매검이 강풍이라도 만난 듯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검이 수십으로 분열하고, 또다시 수백으로 분열하더니, 세상을 붉은 매화 잎으로 가득 채워 냈다.
유이설의 매화처럼 고아하지 않고, 백천의 매화처럼 강건하지 않았다. 조걸의 매화처럼 쾌속하지도, 윤종의 매화처럼 부드럽지도 않았다.
청명이 피워 낸 매화는 그저 날카로웠다.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꽃잎의 폭풍에 휘말린 아들이 꿈에도 다시 듣고 싶지 않을 만큼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천하의ㅈ만인방도답지 않은 나약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이라면 누구라도 이해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신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린 이가 어찌 비명을 참을 수 있으랴. 누구라도 동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 참혹한 광경을 빚은 청명의 얼굴엔 일말의 동정심도 어리지 않았다.
그는 쓰러지는 이들의 사이를 그저 스치듯 지나갔다.
잠시 후, 구멍이 숭숭 뚫린 이들의 목이 동시에 꺾어지더니 붉은 핏줄기가 솟구쳤다.
상대한 이는 반드시 죽인다.
그건 수없이 전장에서 위기를 헤쳐 온 청명의 철칙 중 하나였다.
그 무자비한 손속 앞에서, 들끓던 만인방의 기세가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이 넓은 전장에서 한 사람이 날뛰는 것 정도야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아니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상황도 달라진다. 화산의 제자들에게 달라붙어 방어선을 밀어붙이던 이들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에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히 적의 공세가 약해진 그 찰나, 백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소가주님!"
"압니다!"
조걸과 백천이 순간적으로 치고 나가며 남궁도위 앞에 달라붙은 만인방도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 두 사람이 만들어 준 틈을 놓치지 않고 남궁도위가 검을 치켜들었다. 높게 뻗은 그의 검으로 눈부신 백광이 모여들었다.
막대한 내력을 바탕으로 가공할 위력을 내뿜는 천하의 단 하나뿐인 검술.
남궁세가의 제왕검형이 그 위용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하아아아아아아아압!"
내력을 있는 대로 뽑아낸 남궁도위의 검 끝에 집채만 한 검기가 어렸다가 순간적으로 응축되었다.
동시에 남궁도위의 검이 대지에 내리꽂히는 벼락처럼 아래로 쇄도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남궁도위가 뿜어낸 검력이 그의 앞으로 새하얀 일직선의 길을 만들었다. 제왕검형의 절초 제왕지로(帝王之路)가 남궁황이 아닌 남궁도위의 검에서 현현(顯現)하는 순간이었다!
조금도 굽은 곳 없이 직선으로 내뻗은 순백의 길, 그리고 그 길이 순식간에 적이 뿜어낸 피로 붉게 뒤덮였다.
그건 말 그대로 제왕이 걸어가야 할 길이었다.
"큭!"
순간 창백하게 질린 남궁도위가 휘청거렸다. 무릎이 꺾이려는 순간 그의 어깨를 당패가 재빨리 부여잡았다.
"도위!"
"괜찮습니다! 그보다!"
당장 공격을 지속하라는 말을 하려던 남궁도위가 멈칫하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눈이 부시도록 만개하며 피어나는 붉은 꽃잎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
서로 다른 형태로 뻗어 나가는 다섯 그루의 매화나무.
그건 다르지만 같았다. 하나하나의 나무는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 나무가 모여 만들어 내는 숲은 결국 하나이지 않은가?
해남의 땅.
이 멀고 먼 땅에서 화산의 매화가 피어난다. 마지막까지 짜낸 내력으로 피운 매화는 긴 겨울을 버텨 내고 마침내 개화한 꽃처럼 그저 아름답고 황홀했다.
화아아아악!
흩어진 매화 잎이 바람에 휘날리며 적들에게로 우수수 쏟아졌다.
제아무리 중원을 떨게 하는 만인방의 강자들이라 해도 폭우처럼 쏟아지는 매화의 비를 모두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서걱 서걱!
내력을 끌어 올려 막아 낸다면 목숨을 잃을 만한 상처까지는 입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하나하나의 걷기는 결코 치명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게 꼭 희망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
죽지 않기 때문에, 전신이 난자당하는 고통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느껴야 했으니까.
" 크아아아아악!"
참혹한 비명이 여기저기서 연이어 터져 나온다.
그리고 그 비명이 채 멎기도 전에 들이닥친 건, 해남의 장로들이 내뿜은 장엄한 파도와 같은 검기였다. 그 걷기는 화산의 매화검기와는 달리 만인방도들에게 확실한 죽음을 선사해 주었다.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진 백천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해안에서 제법 멀어진 배가 보였다. 무인들이 전력으로 노를 젓고 있기 때문인지, 생각보다는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청명은 여전히 저 앞에서 싸우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백천의 두 눈에 갈등이 어렸다. 하지만 그 갈등을 잠재운 건 결국 신뢰였다.
백천이 굳건한 목소리로 외쳤다.
“퇴각! 퇴각한다! 배로 가라!"
"예!"
모두가 남은 힘을 모두 짜내 적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즉시 몸을 돌려 해안으로 달려 나갔다.
딱 한 명, 설소백만이 그 자리에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빌어먹을, 뭐합니까!"
조걸은 그를 제 어깨에 냅다 둘러업고 배를 향해 달렸다.
거리를 벌렸다고는 하지만, 저들은 만인방이다. 숨 한 번 내쉴 시간이면 다시 따라붙을 것이다. 그 전에 바다에 뛰어들어야 한다.
"안 돼요! 청명 도장이 저기에 있다고요!"
"안다고!"
조걸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걱정할 놈을 걱정해요! 저 인간이 우리 같은 인간인 줄 알아?"
"......"
“걱정하려거든..….!"
조걸이 힐끔 고개를 돌렸다. 차마 청명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는 만인방도들의 모습이 보였다.
“만인방 새끼들이나 걱정하십쇼! 불쌍하게 저 새끼한테 걸린 놈들을!”
"......예?"
설소백이 당황한 얼굴로 청명이 있는 쪽을 보았다. 청명의 입가에는 기괴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도, 도장...…?'
그리고 그 순간 설소백은 목격했다.
검을 역수로 뒤집어 잡은 청명이 적들의 한중간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말이다.
설소백의 등골을 타고 새파란 전율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