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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63화 (1,264/1,567)

1263화. 살려 보내지 않는다. (3)

"으아아아아아압!"

곽환소가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떨쳤다.

그 기세에 창귀대원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거센 파도 같은 검기가 그 전면을 일거에 뒤덮었다.

“아아아아악!”

전신이 베인 창귀대원이 비명을 내지르며 물러났다. 아까 곽환소의 검을 장난처럼 막아 냈던 놈과 같은 급의 무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나약한 모습이었다.

'이게……!'

곽환소가 검을 힘껏 움켜잡았다.

'이게 화산의 장문대리!'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옆에서 적을 몰아치는 이자양 역시 거의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마 곽한소의 뒤를 따르고 있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니, 아니야!'

사실 '곽환소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 이들이 좇고 있는 이는 곽환소가 아니라 백천이니까!

곽환소가 목이 터지도록 고함을 쳤다.

"밀어붙여라!"

"예!"

기세를 있는 대로 올리고 공격해 오는 해남을 보며 창귀대원들이 이를 갈아붙였다.

“이 개 같은 섬 촌놈들이!"

흉흉한 두 눈에서 불이 뿜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아아아아아악!"

분노를 기세로 바꾸기도 전에 등 뒤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그들의 앞에 펼쳐진 건, 전방을 뒤덮어 오는 붉은 꽃잎의 향연이었다.

악명 자자한 창귀대원임과 동시에, 그보다 더 악명 높은 만인방의 수련을 버텨 냈다고는 하나, 앞뒤로 협공을 당하는 와중에 평소와 같은 침착함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하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저 검술이다.

"아아아아아악!"

"비, 빌어먹을!"

만일 등 뒤에서 날아드는 백천의 검이 다른 정파들의 것처럼 정직한 강점이었다면, 이들도 급한 마음을 잠시 눌러 두고 어떻게든 해남부터 처리하려 했을 것이다.

어쨌든 등 뒤에 있는 이들이 죽어 나갈 동안은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백천의 검은 그리 뻔한 강점이 아니다. 저 흩날리는 검기는 모조리 막아내는 게 불가능했다. 등 뒤의 놈들을 방패로 삼는다고 해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크아아아아아악!"

"큭!드, 등이……”

꽃잎처럼 휘날리는 검기가 창귀대 진영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육체에 연신 박혔다. 꽃잎처럼 얇고 작은 검기니 피륙의 상처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상처를 입는 부위에 따라서는 피를 과도하게

쏟는 치명상으로 이어질 게 자명했다.

실로 미칠 노릇이 아닌가? 등 뒤에선 계속 검기가 날아들며 구석구석을 파고드는데 무슨 수로 눈앞의 적에게만 집중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평소였다면 상대도 안 되었을 애송이 놈들에게도 쩔쩔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놈들이야 눈앞에 있는 창귀대만 상대하면 그만이지만 창궈대는 앞뒤로 쏟아지는 합격을 버텨 내야 하니까.

“저 망할!"

갈 곳 잃은 울분이 끝내 터져 나왔다. 창귀대원 하나가 제 등 뒤를 향해 외쳤다.

"빌어먹을! 겨우 한 놈인데 왜 처리를 못 하는 거야 이 병신 같은 새끼들아!"

"뭐?"

“발목이라도 잡고 늘어지라고! 그 쓸데도 없는 목숨 아끼겠다고 병신처럼 굴지 말고!"

"이 개자식이!"

적에게 터져야 했을 분노가 동료에게로 쏟아진다. 격한 전투를 치르는 중이라 제대로 된 언쟁이 오가지 못했을 뿐, 평소였다면 서로 칼부림이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애초에 이들은 동료 의식이 아니라 힘에 굴복해 하나의 이름을 쓰는 이들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지금 다른 이를 걱정할 이유나 여유 따윈 없었다.

그렇게 생겨난 감정의 균열은 어떻게든 유지되던 창귀대의 기세를 단번에 흐트러뜨리기에 충분했다.

"오오오오오오오!"

적이 흔들리자 해남의 제자들은 한층 기세를 끌어올리며 앞으로 달려들었다.

뒤에선 용기를 더해 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적들을 용서하지 마라! 이곳은 해남이다!"

해남 장문인 금양백의 웅혼한 목소리가 터지는 순간, 해남의 검이 더더욱 날카로워졌다.

파도처럼 돌진하는 해남을 보며 허맹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 안돼!'

당장 어떻게든 수습해야 한다.

창귀대는 지금 해안을 등지고 일자에 가까운 진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중앙이 돌파당하면 대원들이 둘로 나뉘게 될 것은 당연지사다.

그렇게 된다면 남은 이들은 다수의 적에게 사방에서 포위당하게 된다. 안 그래도 적은 수가 둘로 나뉘어 더 기세가 꺾인 상황에서 말이다.

그건 창귀대가 아니라, 창귀대 할아버지가 온다고 해도 당해 낼 수 없다. 본디 다수의 약자가 소수의 강자를 상대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사방에서 포위하여 강자가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그러니 저 중앙이 돌파당하는 것만은 반드시 막아 내야 한단 말이다.하지만……

카캉!

"크윽……”

“이 새끼가 나를 앞에 두고 한눈을 팔아?"

앞을 막아선 거친 머리의 어린 화산 놈이 그를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아니, 놓아주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까딱하다가는 이놈의 검에 목이 꿰뚫릴 판이었다.

그때 이 화산의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왜? 저기로 가고 싶어? 아아, 가능하지."

사내 조걸의 입가에 진득한 비웃음이 어렸다.

“나를 죽이면 말이야. 하지만 그게 될까?"

"개소리하지 말고 그냥 싸워라, 걸아."

“아, 진짜!"

무게를 잡으려다 실패한 조걸이 얼굴을 구기며 순간적으로 허맹에게 검을 내질렀다.

파아아앗!

섬전과도 다름없는 검이 격하게 고개를 꺾어 피한 허맹의 볼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피부가 갈라지고 피가 흐르는 감각이 선명하게 뺨을 달구었다.

허맹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대체 이놈들은 뭐냐?'

화산이 강한 것에 이제 와 새삼 놀랄 만인방도가 어디 있겠는가?

화산이 강하다는 명제는 만인방 내에서는 이미 확고했다. 애초에 그들은 사파. 전장에서 살아가는 사파가 상대의 실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놈들의 움직임은 그리 단순히 설명되질 않았다. 넓은 전장에서 서로 나뉘어 있음에도, 그렇기에 눈짓 한 번 서로 나눌 수 없음에도 마치 서로 고함쳐 대화라도 나누고 있는 것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저 허여멀건 놈이 우왕좌왕하던 해남을 이끌기 시작하기 무섭게 다른 놈들은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쪽으로 향하는 지원을 차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전략적인 움직임이라는 건 개인의 능력과는 관련이 없다. 설사 전술적 능력을 지닌 이라고 해도, 실전에서 제가 가진 능력을 다 발휘할 수는 없는 법이다.

책상물림들이 도면을 그려 놓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과, 날이 선 병기가 오가는 전장 한중간에서 현황을 파악하는 건 천양지차니까.

수없이 전장을 겪은 사람이어야 겨우 감이나 잡을 수 있을 영역인데, 대체 이 어린놈들은 어떻게 이런 움직임을 보인단 말인가.

"어허!"

파아아아앗!

그 순간 날아든 검이 허맹의 어깨를 꿰뚫었다.

"크윽!"

허맹이 정신없이 몸을 뒤로 날렸다. 뻥 뚫린 어깨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나를 앞에 두고 딴생각하면 안 되지! 약해 빠진 사파 새끼가!"

"이익, 이 빌어먹을 놈이……!"

"억울하면 이기든가!"

영 가벼운 말을 쏟아내는 입과는 달리, 조걸의 눈에선 새파랗고 무거운 살기가 쏟아졌다.

한편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오오오오오!"

쿠우우우웅!

"하아아아아압!"

콰아아아아앙!

창귀대 역시 만인방의 무력대라는 이름을 도박으로 딴 것은 아니다. 중앙을 뚫고 있는 해남의 주력을 막아 내야 한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앗!"

하지만 어떻게든 저지해 보려 하는 이들을 향해 쏟아진 건 혜연의 황금빛 불광과 남궁도위가 날려대는 포탄 같은 백색 검기, 그리고 하늘마저 뒤덮으며 쏟아지는 당패의 분홍빛 독분이었다.

"이, 이런..….”

제아무리 간이 크다고 해도 소림의 권력과 남궁의 검기 그리고 당가의 독을 무릅쓰고 전진할 수 있겠는가? 그건 자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눈앞에서 진영이 붕괴하는 걸 보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그들이 우왕좌왕하기를 잠시, 마침내 해남의 선두가 창귀대의 진형 한중간을 돌파했다!

'이, 이런...…'

허맹의 얼굴이 순간 파랗게 질렸다.

'망할 대주 놈!'

이럴 때 빨리 지시를 내려 줘야 할 대주는 이미 화산검협의 검에 모가지가 잘려 나갔다. 그럼 이곳에서 지시를 내릴 이는 그밖에 없는 것이다.

“뒤, 뒤로 물러나라! 포위당한다. 진형을 바꾸……”

파아아아앗!

말을 하다 만 허맹이 황급히 허리를 뒤틀었다. 조걸의 검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그의 얼굴을 길게 가르고 지나갔다.

“자꾸 다른 데를 보시네?”

"이 개자식이!"

허맹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이대로라면 그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중앙을 꿰뚫은 해남과 천우맹 놈들이 방향을 바꿔 그들을 둘러싸기만 해도 끝장……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달려! 승선한다!"

"예!"

창귀대의 중앙을 관통한 이들이 방향을 바꾸는 대신, 그대로 해안으로 내달렸다. 그러더니 정박된 배를 향해 몸을 띄워 올렸다.

“배 안에도 적들이 있을 것이다! 방심하지 말고 장악해라!"

"예!"

금양백의 재빠른 명령에 해남의 제자들이 더욱 박차를 가하며 신속하게 뛰어올라 배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뭐?'

허맹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저게 뭐 하는 짓거리인가? 배를 부수는 것도 아니고, 배에 오른다고?

그럼 저들은 저 배에 타기 위해서 모든 전력을 이끌고 와 창귀대와 싸우는 짓거리를 감행했다는 말인가?

'대체 왜?'

여기는 해남도다.

배는 육지의 수레만큼이나 널려 있다. 그런 해남도에서 저런 미친 짓을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아니, 그 전에......

‘기껏 포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 놓고 그걸 저렇게 내버린다고?'

주력인 저들이 배에 승선해 버리면 해안에 남아 있는 창귀대는 재정비를 할 시간을 벌게 된다.

상식적으로 미쳤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판단이다.

"뭐, 뭐 하는 거냐?"

묻는다고 곧이곧대로 대답해 줄 리도 없겠지만, 원체 황당하다 보니 그 말이 입 밖으로 툭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그를 상대하고 있던 어린 화산 놈도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었다.

“너희 배는 이제 우리 거다."

"......배?"

"어. 화나지?"

"......"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캄캄해진 허맹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애초에 서로 말을 섞을 관계도 아니지만.

저들이 왜 배를 노리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어째서 그들을 포위하지 않았는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온다!"

"응?"

누군가의 외침에 허맹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해안으로 이어지는 숲이 통째로 뒤흔들리고 있었다!

"구......"

허맹의 입에서 순간 어찌하지 못한 반가움과 두려움이 뒤섞여 고함이 터져 나왔다.

"군사! 본대다! 본대가 왔다!"

쿠르르르릉!

나무들이 포탄이라도 맞은 듯 터져 나가며 어마어마한 수의 만인방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사이에서 걸어 나온 만인방의 군사 호가명이 차디찬 눈으로 해안을 쭉 훑었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해안의 한구석이었다. 정확히는 그곳에 여유롭게 선 한 사람.

호가명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군.”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이 먼 섬에는 무슨 볼일이지, 화산검협?"

그러자 청명이 호가명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살짝 꺾었다.

"어…… 미안한데."

"음?"

"누구신지?"

일순 정적이 흘렀다. 호가명의 짙은 눈썹이 미미하게 뒤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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