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2화. 살려 보내지 않는다. (2)
"아-미-타-불!"
장엄한 황금빛 불광이 사위를 뒤덮었다.
"으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한없이 상서로워 보이는 불광이지만, 그 안에 담긴 위력은 절대 온화하지만은 않았다. 불광에 맞은 이들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며 처절한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졌다.
파아아앗!
"크아아악!"
단번에 검을 내질러 달려드는 이들을 물리친 조걸이 살짝 놀란 눈으로 혜연을 돌아보았다.
혜연은 여느 때보다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문 채 연이어 권력을 날리고 있었다.
그때 윤종이 따끔하게 외쳤다.
“한눈팔지 마라, 이 멍청아!"
"사형, 혜연 스님이 오늘따라 엄청 적극적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조걸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검을 날렸던 윤종이 슬쩍 시선만 돌려 혜연을 일별했다.
"화가나신 거겠지."
"예?"
“이때까지는 사파니 어쩌니 해도, 사패련 놈들이 양민을 괴롭히는 걸 우리가 직접 본 건 아니었잖느냐."
“......그게 무슨......"
되물으려던 조걸은 살짝 늦게 그 의미를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패련이 강남을 점거하면서 강북에서도 사파들이 난립하여 엉망이 되기는 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강북에서 난립했던 사파는 사패련이 아니라, 그 사패련에 밀려 도망친 이들에 불과했다.
그러니 냉정하게 따져 보면 그들은 사패련이 양민들을 핍박하는 걸 제대로 목격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곳으로 오는 와중에 사람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그 눈으로 보셨으니, 혜연 스님 성정에 얼마나 화가 나셨겠느냐?”
"아......."
"앞! 이 자식아! 앞!"
"워후!"
조걸이 얼른 몸을 비틀며 날아드는 도를 피해 내더니 섬전 같은 검기를 날렸다.
파아아아앗!
"아아아아아악!"
그가 날린 검이 창귀대원의 어깨를 무참하게 꿰뚫었다.
'만인방의 무력대.'
조걸이 이들을 상대하는 건 처음이 아니다. 애초에 그들의 진정한 실전은 만인방의 적사대와 싸우면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그렇기에 확연히 실감할 수 있었다.
이들은 분명 강하다.
도의 속도, 움직이는 기세까지. 어느 것 하나 '절정'이라는 말에 어긋남이 없다. 창귀대를 이루는 대원 하나하나가 천하의 어느 곳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고도 남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어렵지 않아!'
파아아앗!
전방으로 연이어 열두 번 내질러진 매화검이 달려드는 이의 손목과 가슴을 걸레짝처럼 만들어 버렸다. 창귀대원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조걸은 그런 이의 가슴에 마지막 일격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강해졌다.'
아니, 강해진 건 그뿐만이 아니다.
"이, 이 망할 년이!"
“막아! 저년을 날뛰게 두지 마라!”
소란이 이는 곳으로 시선을 주니 어김없이 창귀대원의 가슴을 짓밟으며 허공으로 뛰어오르는 유이설이 보였다.
볼 때마다 경이로운 광경이다. 허공으로 몸을 날린다는 건, 상대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대체 사고는 어떻게 저리 종횡무진 싸우면서도 부상을 입지 않는 걸까?
육체를 종이 한 장 단위로 섬세하게 움직일 수 없다면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신기였다.
“뛰지 말라고요, 사고!"
유이설이 모두의 시선을 이끌면 당소소가 순식간에 적의 빈틈을 노려 파고들었다.
애초에 당소소는 당가 출신. 당가는 순간적으로 드러난 상대의 빈틈에 암기를 날리는 일만 수백년 동안 연구해 온 가문이다. 그런 가문에서 나고 자란 당소소가 저리 훤히 드러난 틈을 놓칠 리
없었다.
"하아아압!"
당소소가 흩뿌린 검기가 마치 당가의 암기처럼 창귀대원들 사이로 매섭게 파고들었다.
"아악!"
“제기랄!"
여기저기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치명적인 일격은 아니나, 검기가 몸을 꿰뚫는데 태연할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감각이 분산된 틈을 노리며 유이설이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하강했다.
서걱서걱!
검이 살을 베고 힘줄을 끊어 내는 섬뜩한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비명과 함께 여기저기서 피가 솟구쳤지만 유이설의 표정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북풍한설과도 같은 검격이 군더더기 없이 펼쳐졌다.
'강해.'
조걸이 검을 꽉 움켜잡았다.
물론 유이설은 예전에도 강했다. 화산에서 저 백천과 비견될 수 있는 유일한 검수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조걸이 보고 있는 건 유이설의 검이 아니라, 다수를 상대로도 조금도 주저하거나 껄끄러워하지 않는 유이설의 과감함이었다.
유이설은 늘 가장 위험한 곳에 일말의 망설임 없이 파고든다. 반드시 뒤에 있는 이가 그를 지켜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그리고 그 과감함이 만인방의 창귀대라는 강력한 적들을 순식간에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괜한 건 아니었네요."
"응?"
"아닙니다!"
조걸이 유이설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듯 이를 악물며 검을 내뻗었다.
'하여튼 귀신 같다니까?'
이 광경을 보고 나니 알 것 같았다. 항주에서 격전을 겪은 뒤로 그의 가슴에 남았던 묘한 불안감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타앗!"
윤종이 앞으로 치고 나가며 매화를 흩뿌렸다. 그러자 사방에서 그들을 덮쳐 오려던 이들이 주춤하며 기세를 잃었다.
조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눈을 빛내며 검을 찔렀다. 그의 검이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사처럼 영활하게 적의 몸을 꿰뚫었다.
'이거지!'
화산에 가장 부족한 것은 제자의 수다.
그렇기에 그들은 지금까지 청명이라는 절대 강자를 상대로 합공을 하거나, 서로서로 대련 상대가 되어 주는 식으로 수련을 해 왔다.
지금까지는 그걸로 충분했다. 화산의 적이라 할 이들은 다들 화산보다 강하거나, 어떻게든 합공을 펼쳐야 할 강자들이었으니까.
하지만 항주에서 조걸은 똑똑히 느꼈다.
이제 그들이 상대해야 할 건 한 명의 절대강자도, 일 내 일로 생사를 갈라야 할 대적도 아닌, 절대적인 '수'의 우위를 점하는 세력이라는 것을.
하지만 지금 유이설과 당소소가 보여 준 연계가 알려 주고 있었다. 저 귀신같은 청명이 놈은 언제나 그렇듯, 가장 먼저 그 사실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처를 끝내 놨다는 걸 말이다.
'장강!'
장강에서 벌어진 각 문파 간의 끊임없는 대련 개인과 개인이 아닌 문파라는 집단 규모로 서로 싸워댔던 그 시간.
때로는 낭비처럼 느껴졌던 그 과정은 사실 결코 낭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여유롭게 창귀대를 상대하진 못했을 테니까.
다른 문파들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던 일이, 사실은 화산의 능력 역시 함께 키워 내는 일이기도 했다.
"타아아아아아압!"
남궁도위 역시 놀기만 한 건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아앙!
뻗어 나온 백색 검기가 순식간에 달려드는 이들을 피떡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강력한 검기를 보는 순간 조걸의 입에선 허탈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남궁세가에서 태어났어야 했는데.”
“뭔 뜬금없는 개소리야!"
“…… 아니면 소림에라도."
“이게 또 집중을 못 하고!”
윤종의 타박에, 조걸은 울분과 억울함을 실어 연이어 십여 검을 발출했다.
그는 죽어라 찔러 대야 겨우 한 사람을 쓰러뜨리는데, 저들은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두 셋을 날려 버리고 있으니 어떻게 억울하지 않을 수가 있나?
'이래서 소림이고, 이래서 남궁이지!'
구파일방의 태두와 오대세가의 수좌.
그 명성을 결코 운으로 얻은 게 아님을 증명하듯, 각 문파의 미래를 이끌 이들이 자신의 힘을 여실히 증명하고……
"으아아아아아!”
쇄애애액! 왜애애애액!
"으아아아아! 뭐가 이렇게 많아!"
순간 조걸의 두 눈이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물들었다. 당패가 남궁도위를 엄호하기 위해 흡사 풍차처럼 부지런히 팔을 휘두르며 암기를 뿌려 대고 있었다.
".……당가의 미래는 별로 안 밝네요."
"집중하라고, 이 새끼야!"
결국 윤종이 버럭 화를 내며 앞으로 나서려 할 때였다.
파아아아아앗!
귀를 꿰뚫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등 뒤에서 강렬한 기감이 느껴졌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획 돌렸다. 더없이 붉게 흐드러진 매화가 보였다.
같은 검을 쓰는 이들조차 순간적으로 넋을 잃게 만드는 화려한 검기. 그 검기의 중앙에서 화산의 장문대리, 백천이 전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 백천의 뒤로는 해남의 문도들이 악착같이
따라붙고 있었다.
순간 조절과 윤종의 눈에 같은 빛이 어렸다.
"사형!"
“그래!”
두 사람은 앞뒤 포진을 깨뜨리고 나란히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 이놈들!"
그리고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적의 지척에서 좌우로 갈라지며 붉은 매화검기를 흩뿌렸다.
"마, 막아!"
"이 개 같은!"
창귀대원들의 단단한 진형이 순간적으로 살짝 갈라지며 좌우로 쏠렸다. 그 순간.
"꿰뚫습니다!"
해남을 대동한 백천이 그 미세한 틈으로 단번에 파고들어 검을 휘둘렀다.
파아아아앙!
조걸과 윤종이 만들어 준 틈을 간결한 일검으로 벌린 백천은 제게로 날아드는 도를 무시하며 진각을 내밟았다.
"어딜!"
"웃기지 마라. 이 새끼들아!"
필사적으로 따라붙은 곽환소와 이자양이 백천에게 날아드는 도를 쳐 냈다.
그리고!
파아아아아아앗!
곽환소와 이자양을 믿고 뻗어 낸 백천의 검 끝에서 붉은 꽃잎이 뿜어져 나왔다. 눈 덮인 화산의 봉우리를 연상케 하는 흰 백사장에 붉디붉은 매화가 피어났다.
사라라라락!
매화나무가 일순 환상처럼 흐드러졌다가 이내 사라져 갔다. 하지만 꽃잎들은 사라지지 않고, 남해의 바람을 타고 사방을 휘감았다.
누군가의 눈에는 더없이 아름답게.
누군가의 눈에는 더없이 강렬하게.
그리고 누군가의 눈에는 더없이 위험하게!
"으아아아아아악!"
"이 이게!"
"아악!"
진형의 한중간에서 터져 나온 백천의 낙매분분(紛紛).
이 검은 전장에 더없이 익숙한 창궈대원들마저 몸을 날려 자리를 이탈하게 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길이 열리자 백천은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쳤다.
“배를 탈취한다! 달려!"
"예!"
백천을 선두로 한 해남의 제자들이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용처럼 한 덩어리가 되어 창귀대가 세운 붉은 벽을 꿰뚫었다.
파아아아앗!
앞을 막아서는 이를 단숨에 베어 날린 백천이 땅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해안에 정박한 커다란 만인방의 배가 저 앞에 있었다.
"앞으로!"
"예!"
곽환소와 이자양이 튀어 나갔다. 그리고 막아선 이들에게 파도와 같은 해남의 검을 휘둘렀다. 두 사람의 얼굴엔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카강!
도와 검이 맞부딪히며 만들어진 찰나의 틈, 백천은 곽환소의 어깨를 밟으며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엇?"
“뭐!"
순간적으로 드리운 그림자에 놀란 이들이 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그들이 본 건.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을 등진 한 검수의 모습이었다.
"타아아앗!"
백천이 노호성을 내지르며 검을 떨쳤다. 그 궤적을 따라 생겨난 반월형의 검기가 뜨거운 해남의 대기를 가르며 쇄도했다.
카가가가가가강!
만인방의 배를 고정하고 있던 굵은 닻줄이 단번에 끊겼다.
몸을 회전시키며 사뿐히 내려선 백천이 즉각 검을 휘두르며 창귀대원의 등을 갈랐다.
치열한 전장에 어울리지 않게 화사하게 웃은 그는 나직이 속삭였다.
“너희도 뺏기는 기분을 느껴 봐야지."
이 말이 저들의 귀에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