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1화. 살려 보내지 않는다. (1)
쿵!
땅을 밟을 때마다 충격이 다리를 타고 가슴까지 치밀었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지금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이유는.
‘더 빨리!’
발은 미친 듯이 땅을 박차고 있건만, 이상하게도 몸은 평소보다 더디기 그지없게만 느껴졌다.
격전지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평소 같으면 한달음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터.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아무리 달리고 또 달려도 도무지 거리가 좁혀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그새 약해지기라도 한 것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곽환소는 알고 있다. 그가 느린 게 아니라 저들이 빠른 것이다. 그는 오히려 평소보다 더 집중하여 빠르게 달리고 있지만, 그저 저들의 능력이 그런 곽환소와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난 것뿐이다.
'빌어먹을!'
곽환소가 다급한 마음에 더 급히 바닥을 박찼다.
“사, 사형!"
등 뒤에서 숨넘어갈 듯한 비명이 들려왔지만, 속도는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
'여기는!'
쾅!
곽환소의 몸이 더욱 빠르게 앞으로 쏘아졌다.
'여기는 해남이다!'
화산이 그들보다 더 강할 수는 있다. 남궁이나 당가가 그들보다 강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다른 곳도 아닌 해남도를 지키는 전쟁이다.
설령 해남파가 저들보다 약할지라도, 저들에게 모든 걸 맡겨 둔 채 활약을 빼앗기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먼저 적들과 교전에 들어간 천우맹의 사자들은 곽환소의 그런 마음을 일절 모르는 것처럼, 이 순간에도 어마어마한 기세로 만인방도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흡사 해남의 제자들을 허수아비로 만들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이 말이다.
"으아아아아아앗!"
곽환소는 가슴이 터지도록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내달렸다. 금양백을 비롯한 장로들 역시 같은 생각인지,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적들에게 쾌속히 쏘아져 갔다.
‘더 빨리!’
마치 먹이를 노리는 표범처럼 달려 나간 곽환소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만인방도를 향해 단숨에 뛰어들었다.
"여기는 해남도다! 이 개자식들아!"
파아아아앗!
거친 파도를 닮은 해남파의 독문무공 장풍파랑검법이 전개되었다. 곽환소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파도 같은 검기가 순식간에 창귀대원을 뒤덮었다.
"어, 어엇!"
갑자기 밀려온 이들의 수에 당황한 것인지, 아직 천우맹의 맹도들이 습격을 가한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 저항을 하려는 듯 도를 들어 올렸던 만인방도는 곽환소의 검세에 하릴없이 휩쓸렸다.
"아아아아아악!”
길게 베인 가슴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동시에 곽환소의 가슴에도 뜨거운 열기가 치솟았다.
피!
정파의 맥을 잇는 해남의 제자로서 감히 입에 담을 말은 아니지만, 저 악도들의 피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그의 검으로 저들을 처단하는 이 순간을 얼마나 바라 왔던가?
쾅!
여세를 몰아 진각을 내밟은 곽환소가 목이 터지도록 고함을 쳤다.
“해남을 침범한 악적들을 모조리 물리쳐라! 천우맹에 뒤지지 마라!"
"예, 사형!"
곽환소도 곧장 앞을 향해 돌진했다. 피가 끓어오른다는 게 어떤 감각인지 이제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게 실전!'
그 순간 그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지금껏 자신이 제대로 사람을 베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음을 말이다.
그는 남해의 명문 해남파의 제자로서 평생 무학을 익혀 왔다. 그런 이가 사람을 베어 본 게 이번이 처음이라는 말은 어쩌면 다소 이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껏 해남의 제자들은 누군가와 목숨을 걸고 싸워 볼 일이 없었다. 우선 해남도 내에서는 다툼이 벌어지는 일이 잘 없었다. 그리고 해남이라는 섬의 특성상, 협객행을 나설 일도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처음 실전으로 상대하는 이들이 다름 아닌 저 사패련의 만인방이라니! 흥분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곽환소는 힘껏 검을 움켜잡았다.
이 먼 해남까지 화산의 무용담은 들려온다.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일들을 해 왔는지 곽환소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그런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무인 곽환소의 가슴도 벅차올랐다. 호승심 역시 끓었다. 언젠가는 그 역시 화산의 그들처럼 적과 맞서 싸우리라 수없이 다짐했다.
그 오랜 바람을, 오늘 바로 이곳에서 이루는 것이다.
‘나도 할 수 있다!'
곽환소가 이를 악문 채 벼락처럼 앞으로 달려들었다.
“타아아아앗!”
그의 검이 맹렬하게 휘둘러졌다.
대지가 발끝에 닿는 감각.
전신에 차오르는 충만한 내력의 기운.
손바닥에 잡히는 검병(劍柄)의 감촉!
그리고 무엇보다 뿌듯한 이 일체감!
검과 하나가 된다는 건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여전히 당혹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창귀대원의 머리를 향해 그의 검이 일직선으로 맹렬히 내리꽂혔다.
카아아앙!
그리고 그 순간, 곽환소는 손목을 파고드는 끔찍한 통증에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그의 검은 번쩍 들린 커다란 도에 가로막혀 있었다. 전력을 다해 내리쳤음에도 창귀대원의 도가 마치 단단한 암벽처럼 그의 검을 완벽히 막아 낸 것이다.
'아니 ......'
당황한 곽환소가 창귀대원의 눈을 보았다. 검과 도가 교차한 그 틈새로 붉게 핏발선 눈이 보였고, 그 순간 뜨겁게 끓어올랐던 곽환소의 피가 서늘하게 식기 시작했다.
창귀대원이 조소하며 중얼거렸다.
“이 애송이가.….”
쾅!
터져 나온 폭음과 함께 곽환소는 뒤로, 또 뒤로 정신없이 물러났다. 검에 맞닿았던 손바닥이 찢겼는지 검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하지만 곽환소는 고통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분노한 창귀대원이 노기를 터뜨리며 곧장 그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노오오오옴!"
콰아앙!
날아드는 도를 본능적으로 막아 낸 곽환소의 몸이 튕겨 나갔다. 검을 잡았던 우수가 어깨부터 통째로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내력끼리의 충돌을 이기지 못해 내상을 입었는지 목구멍에선 선지피가 울컥 솟았다.
'가 강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강하다. 조금 전까지 무력하게 휩쓸리던 이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어째서?'
그 순간 곽환소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이들이 나약해 보인 건 그저 이들을 몰아붙이는 천우맹의 맹도들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은 누가 뭐라 해도 천하를 공포에 떨게 만든 저 만인방의 방도들인 것이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감히 곽환소가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처음 그의 검격이 통했던 건, 이들이 앞서 쏟아지던 공격 때문에 넋이 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면에서, 오로지 실력으로만 맞붙는다면 결코 이들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흥분 때문에, 그리고 첫 공격이 성공적으로 먹혔다는 자신감 때문에 순간적으로 그 사실을 간과하고 만 것이다.
'이, 이런 실수를……'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후회란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죽어라!"
제 실수를 제대로 후회할 시간도 없이, 창귀대원이 날린 도격이 그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큭!"
카강!
곽환소가 어떻게든 검을 뒤틀어 그 도를 막아 냈다. 내력을 한껏 밀어 넣은 검은 다행히도 날아드는 도의 궤적을 비틀어 놓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그의 검이 튕겨 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순간 텅 비어 버린 목을 향해 창귀대원의 도가 처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다시ㅇ날아들었다.
“사, 사형! 안 돼에에……”
세상이 느려진 듯했다.
놀란 이자양의 비명이 흡사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길게 늘어졌다. 섬전처럼 날아들던 칼도 파리가 앉을 수 있을 만큼 느릿느릿 다가오는 듯했다.
'아...…'
하지만 그 세상 속에서 느려진 건 곽환소도 마찬가지. 아무리 악을 쓰고 몸을 뒤틀어도 목으로 날아드는 도를 피해 낼 도리가 없었다.
'빌어먹을‥…'
곽환소가 죽음을 직감하며 눈을 질끈 감으려는 순간, 시야에 무언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검?'
흰빛을 띤 검이 빠른 속도로 날아들어 곽환소의 목을 노리는 도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곽환소가 보기에 그건 너무도 무력한 저항 같았다. 힘과 힘의 격돌이라면 가느다란 검보단 중병인 도가 우위를 점한다는 게 뻔한 상식 아닌가?
그러나 이내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은 그런 상식을 완전히 부숴 놓았다.
카아아앙!
검과 도가 맞부딪히는 순간, 검이 살짝 비틀리며 도에 실린 힘을 모조리 흘려 냈다. 그와 동시에 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기가 무거운 도를 종잇장처럼 뒤로 튕겨 내었다.
'뭐?'
창귀대원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곽환소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손목이 움찔움찔 떨리는 것으로 보아, 조금 전 곽환소가 느꼈던 고통을 저 창귀대원도 똑같이 받고 있는 듯했다.
도를 튕겨 낸 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파아아아앗!
흰 검신이 움직이며 허공에 환상과도 같은 궤적을 그려 냈다. 직선 같으면서도 또한 곡선 같았고, 날카로우면서 동시에 부드러웠다.
목으로 날아드는 검을 보며 창귀대원은 기겁하여 목을 꺾어 피했다.
스슷.
예리한 검날이 창귀대원의 목을 스치며 지나갔다.
또다시 세상이 느려진 듯한 감각 속에서 곽환소는 똑똑히 보았다. 창귀대원의 피부가 갈라지는 광경과 그 갈라진 상처에서 몇 방울의 피가 튀어 오르는 모습까지 말이다.
‘피했……’
곽환소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
창귀대원의 목을 스쳐 지나갔던 검이 허공에 우뚝 멈춰서더니, 이내 처음 찔렀던 속도보다 배는 빠르게 뒤로 당겨졌다.
그 순간 곽환소는 보았다.
찌르고 들어갈 때와는 확연히 다른 궤적을 그리며 회수된 검이 이내 창귀대원의 목을 베어 내는 광경을 말이다.
서걱!
일격을 피했다는 안도감이 여실히 묻어나던 창귀대원의 얼굴에 경악이 서서히 번졌다. 그 경악은 천천히 절망으로 바뀌어 갔고, 그 후엔 선명한 공포로 변했다.
털썩.
쓰러진 창귀대원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흰 모래로 스미며 번졌다.
곽환소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아 올랐다. 죽을 위기에서 살아 돌아왔기 때문이 아니다.
'이게…… 이들의 실력.'
그는 똑똑히 보았고, 느꼈다. 천우맹의 일원들과 그 사이에 얼마나 어마어마한 거리가 존재하는지.
여기 있는 이들 중, 지금 쓰러진 이가 일 검이 아닌 이 검에 당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곽환소 역시 공포에 질려 시간이 느려진 듯 느껴지지 않았다면 처음에 날린 일 검으로 창귀대원의 목을 베어 낸 줄 알았을 것이다. 혹시라도 나중에 이자의 시신을 확인할 일이 생기면, 그제야 목을 벤
상처가 하나가 아닌 둘임에 의아해했겠지.
그는 깨달았다. 진짜 실력이란 눈에 보이게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찰나의 순간에 숨어 있음을.
"괜찮습니까?"
"…… 예? 아…… 예!"
곽환소가 멍하니 시선을 들었다. 새하얀 영웅건을 두른 한 미남의 모습이 보였다.
"아..….”
“혼자 싸우는 게 아닙니다! 사형제와 함께 싸우는 겁니다. 이건 곽 소협의 싸움이 아니라 해남파의 전쟁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곽환소가 넋 나간 얼굴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화답하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주었다.
"그럼..…."
몸을 빙글 돌린 사내. 백천이 가볍게 검을 휘둘러 끝에 묻은 피를 털며 말했다.
“배를 탈취하러 갑시다."
"......예!"
먼저 달려 나가는 백천의 등을 그저 바라보던 곽환소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고함쳤다.
“장문대리의 뒤를 따라라!"
"예, 사형!"
푸른 무복을 입은 해남의 제자들이 해안으로 밀어닥치는 거친 파도의 형태로 창귀대원들을 덮치고 들었다.
푸르른 파도 위에 포말처럼 흩어지는 백색 검광, 그 남해의 정경 위로 붉은빛 띤 꽃잎이 화사하게 피어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