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0화. 알아서 하시겠죠. (5)
금양백이 넋이 나간 얼굴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저, 저…... 만인방이…...'
일방적이다. 광동 땅에서만큼은 사신보다 더 큰 두려움의 대상인 만인방이 말 그대로 농락당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가 비무대회에서 청명의 실력을 눈으로 본 게 불과 몇 해 전이다.
물론 강해졌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당연히 강해졌을 것이다. 그만한 재능을 가진 이가 시간이 흐를수록 강해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조차 못 했다. 조금 전 그가 눈으로 직접 본 청명의 실력은 그가 예상했던 바를 어처구니없을 만큼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맹세컨대 만인방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구파일방 중 가장 잘 알고 있는 문파는 누가 뭐래도 해남이다. 그리고 또한 맹세컨대 금양백은 단 한 번도 이렇게 만인방이 무참하게 당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장문인."
대체 화산검협은 어떤 무학을 익혔기에……
“장문인!"
자신을 부르는 격한 목소리에 금양백이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장로가 다급히 그의 팔을 잡고 흔들고 있었다.
“명을 내려 주십시오, 장문인!"
"며, 명?"
"저기 안 보이십니까!"
그제야 금양백의 시야에 주변의 상황이 똑똑히 들어왔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창귀대를 덮치고 있는 천우맹도들의 모습이 말이다.
"저희도 가야 합니다!"
"그, 그렇지! 아, 아니! 하지만 신호가……”
바로 그때였다.
앞으로 달려들던 백천이 허공을 향해 검을 높게 찌르며 휘둘렀다. 그러자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검기가 폭죽처럼 흩뿌려지더니 이내 해남의 하늘을 수많은 매화 옆으로 수놓았다.
자세를 낮추고 있던 금양백이 그 광경을 보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신호! 이보다 더 확실한 신호가 대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공격해라. 어서! 저 배를 탈취해야 한다!"
"예!"
매복하고 있던 해남의 문파원들이 금양백의 우렁찬 고함에 분분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들이 채 발을 떼기도 전에 다른 쪽에 매복해 있던 곽환소와 그의 사형제들이 이미 달려 나가고 있었다.
“더 빨리 달려라! 단숨에 몰아친다!”
"예, 사형! 으아아아아아!"
금양백이 땅을 박차며 버럭 소리쳤다.
"뭐 하느냐! 제자들보다 늦을 셈이냐!"
그 외침에 장로들도 이를 악물고 속력을 높였다.
지금 이곳에 있는 해남의 제자들은 물경 이백이 넘는다. 하지만 조금 전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아무리 인원에서 압도한다고 해도 저 장귀대를 향해 지금처럼 무작정 달려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인방에 대한 두려움이 가슴속에 분명 남아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해남의 제자들은 일말의 두려움 없이 전력으로 창귀대를 향해 흡사 경쟁이라도 하듯 뛰어들고 있다.
만인방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선봉에 선 이가 어떤 이인지 확인하고 이해한 순간부터, 만인방은 더 이상 대적할 수 없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게 된 것이다.
달리는 중에도 그들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앞서 달려든 천우맹도들이 창궈대를 덮치는 모습이.
"아-미-타-불!"
뭉혼하기 그지없는 불호 소리와 함께 황금빛 불광이 해안을 뒤덮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해안 일부가 터져 나가며 새하얀 모래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불광에 직격당한 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피떡이 되어 드넓은 바다로 튕겨 나갔다.
풍덩!
이내 커다란 물보라가 마치 축포처럼 솟구쳤다.
"아니, 치사하게 이러기 있습니까, 스님!"
가장 먼저 공격을 시작한 이는 혜연이었지만, 가장 먼저 적에게 가 많은 이는 당연하게도 조걸이었다.
“눈물 나게 반갑다! 만연방 새끼들아!"
선두로 치고 나간 조걸이 단번에 검을 내질렀다.
파아아앗!
수십 개로 빠르게 분열한 검영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창귀대원들을 향해 맹렬하게 쏟아졌다.
"아아아악!"
"이 이놈이!"
눈으로 뒤쫓을 엄두도 나지 않는 쾌검!
하지만 그 쾌검을 위해 극도로 앞으로 쏠린 무게중심은 그 즉시 반격을 불러왔다.
"주제도 모르고!"
창귀대원들이 앞으로 쑥 나와 있는 조걸의 상체를 향해 발작적으로 도를 내질렀다.
“제발 좀!"
카카강!
하지만 그 도들은 조건의 몸에 채 닿기도 전에 뒤에서 튀어나온 유려하게 흐르는 검에 부딪혀 모조리 튕겨 나갔다.
“뒷일을 생각하고 움직이라고!"
"아, 사형이 막아 주잖습니까!"
"하......"
한숨을 쉰 윤종은 재차 검을 떨쳐 조걸의 얼굴로 날아드는 검을 후려쳤다. 저 미친 사제 놈은 제 얼굴로 검이 날아들어도 막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검을 찔리 대고 있었다.
"하핫! 이 몸이 화산의 조걸이시다!"
"크아아악!"
검에 가슴을 꿰뚫린 창귀대원이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빌어먹을! 덮쳐라! 위로...…!"
말을 하던 이가 별안간 고개를 위로 휙 들어 올렸다. 그들이 점거하려 했던 허공에서 웬 그림자가 조용히 빠르게 드리워지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어, 언제......'
태양을 반쯤 가린 채 낙하하는 가녀린 인영이 보였다.
그리고 그게 그가 살아서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
서걱!
낙하하며 창귀대원의 목을 말끔히 베어 버린 유이설은 땅에 닿기도 전에 지체 없이 몸을 회전시켰다.
촤아아아아악!
바닥을 쓸어 내듯 회전한 그녀의 검이 주변에 있는 창귀대원들의 발목을 여지없이 갈라 냈다.
"아아아악!"
" 크아아아악!"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 후 가장 낮은 곳을 공격한다. 더없이 단순하지만, 또 동시에 가장 효과적인 검. 더구나 지금과 같은 난전 속에서는 더더욱 효과적인 일검이었다.
"아래다!"
"이 빌어먹을 년이!"
몸을 한껏 낮춘 유이설을 향해 창귀대원들이 악을 쓰며 칼을 내지르려는 순간, 그들의 귓가에 부드럽고도 섬뜩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사라라락!
무언가 다가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챈 이들은 기겁하며 빠르게 몸을 피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유이설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이들은 연이어 허공에서 쏟아지는 당소소의 매화검기를 피해 내지
못했다.
"하압!"
사라라라락!
짧고 당찬 기합에 이어 당소소의 매화분분(梅花紛紛)이 온 하늘을 가득 채우는 꽃비처럼 쏟아졌다. 환상처럼 피어오른 매화검기는 채 몸을 빼내지 못한 창귀대원들을 자비 없이 휩쓸었다.
서걱서걱 서걱!
"으아아아아악!”
"아아아악!"
검기가 몸을 꿰뚫는 소리와 처절한 비명이 뒤섞여 울려 퍼졌다.
“무, 물러나!”
"물러나지 마라!"
창귀대의 부대주 허맹이 목이 터지도록 고함을 쳤다.
"이 멍청한 놈들아! 몇 놈 안 된다! 수로 찍어 눌러! 틈을 주지 마라!"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는 허맹도 알고 있었다. 저 망할 꽃잎 같은 검기는 뭉쳐 있는 이들에게 더없이 효과적이다. 개인과 개인의 싸움에서보다 집단과 집단의 싸움에 훨씬 더 효율적인
검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지금 허맹은 이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저 뒤에서 악을 쓰며 달려오고 있는 해남파의 모습을 똑똑히 봤기 때문이다.
잔뜩 기세가 오른 저들이 이곳에 도달할 때까지 이 망할 놈들의 수를 줄여 놓지 못한다면 그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달려들어라, 이 새끼들아! 물고 늘어져!"
그 명에 독기를 품은 이들이 이를 악물고 당소소에게 몸을 날렸다.
휘이이이잉!
하지만 그 순간 그들의 머리 위로 작은 단환들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그리고 이내 펑 소리와 함께 터졌다.
"뭐, 뭐야!"
“독분이다! 빌어먹을 물러서!"
단환에서 뿜어져 나온 분홍빛 연기가 달려들던 창귀대원들을 집어삼켰다.
“안 되지. 우리 동생한테 상처라도 나는 날에는 아버지가 날 죽이려고 들 거거든."
당패가 여유롭게 혀를 차며 다시 소매 안으로 손을 쑤셔 넣었다. 앞쪽에서 이리 기세 좋게 날뛰어 주면 뒤쪽에 있는 그는 공격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그런 면에서 그와 이렇게 궁합이 좋은 이들은
세상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본디 무학이란 이렇게 더없이 섬세……”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앞으로 뛰어나간 남궁도위가 내리친 검이 백색 검광을 내뿜었다. 말 그대로 집채만 한 검기가 그의 앞을 막아선 창귀대를 단번에 휩쓸어 버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고막을 찢는 듯한 폭음과 함께 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 버린 몸뚱이가 참혹하게 비산했다.
“……하지 않아도 되지. 어, 그래.”
당패가 조금 풀이 죽어선 꼬리를 내렸다.
솔직히 저건 반칙에 가깝지 않은가? 이러니 당가가 그렇게 절치부심했음에도 저 무식한 놈들을 한 번도 못 이겼지.
그리고 이대로라면 그의 대에서도 당가가 남궁세가를 넘어서는 건 요원해 보였다. 가문이야 어떻게 기웃대 볼 수 있다 해도 그가 저 괴물 놈을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파아아아아아앗!
그때 백천이 전방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검 끝에서 붉은 꽃잎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선명하게 붉고 아름다운 꽃잎들이 환상처럼 적들을 휩쓸어 갔다.
그 검은 남궁도위처럼 패도를 추구하진 않지만, 배는 더 화려하고, 배는 더 정확했다.
"몰아쳐라!"
범이 포효하듯 우렁차게 외치며 모두를 독려하는 백천의 뒷모습을 보며 당패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말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재능 없는 인간은 서러워서 살겠는가.
“에이!"
그는 이내 신경질적으로 손에 든 비수를 전방에 발출했다.
범충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왜……"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왜 여기에 너희가 있는 것이냐! 왜!"
참지 못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설령 해남파 전체가 매복하다 불시에 그들을 덮쳤다고 해도 이리 쉽사리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상대하는 이들의 면면은 창귀대 홀로 감당하기에 너무도 거대하고 버거웠다.
화산검협 청명과 화산의 오검, 남궁과 당가의 소가주, 소림의 신성인 혜연까지.
그 하나하나가 각 문을 대표하는 고수들이다. 그런 이들이 해남과 함께 손을 잡고 싸우는데, 만인방도 아니라 만인방의 일개 대가 뭘 어떻게 하겠는가?
“왜!”
범충이 다시 한번 이를 갈며 끓는 목소리로 외치자 청명이 피식 웃었다.
“내가 왜 너 같은 사파 놈한테 그런 것까지 알려 줘야 하지?"
"이......."
"개소리하지 말고, 할 짓이나 하지? 더 기다려 주기도 지겨우니까."
청명의 검 끝이 범충을 겨누었다. 범충은 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너무도 간명했다.
범충은 가슴팍에서 기다란 대롱을 꺼내 신속하게 그 끝에 달린 줄을 당겼다.
퍼펑!
대롱 끝에서 뿜어진 불꽃이 허공으로 높이 치솟았다.
신호탄을 터트렸으니, 이제 적이 침입했다는 사실을 본대가 알았을 것이다. 아니, 이미 백천이 쏘아 낸 검기로 알아차렸겠지만 이로써 더 확실해졌겠지.
“...... 웃기지 마라. 애송아."
범충이 독기를 담아 말하며 청명을 노려보았다.
“무슨 짓을 꾸미는 건지는 몰라도, 이곳까지 발을 들인 이상 너희는 반드시 죽는다! 무슨 수를 써도 살아서 장강까지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너뿐만 아니라 너희 모두 이곳에 발을 들인 걸 후회…….”
파아아아앗!
그 순간 범충이 제 얼굴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투두둑!
사선으로 길게 베인 그의 얼굴에서 붉은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청명이 대수롭지 않게 대충 검을 흔들어 보였다.
"아, 미안."
"......"
“사파 새끼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구역질이 치밀어서 말이야. 특히 만인방인지 쥐새끼 굴인지 하는 놈들은 더 그렇더라고.”
"이……”
“유언은 그게 전부야?"
"뭐......"
그 순간 청명의 검이 환상처럼 범충을 향해 날아들었다.
범충은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올려 청명의 검을 막아 냈다.
카캉!
하지만 청명의 암향매화검은 범충의 검을 단번에 양단하고는 그대로 목까지 파고들었다.
서걱!
한껏 벼려진 날이 살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제목에서 울려 퍼진 죽음의 신호에 전율할 틈도 없이 범충의 등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내가 명색이 도사니까 명복은 빌어 드리지. 잘 뒈져라, 머저리 새끼야."
그게 범충이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