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8화. 알아서 하시겠죠.(3)
"자, 장문인."
"……"
"어떻게 합니까?"
다급한 어린 그 목소리에 금양백은 대답을 내어 놓지 못했다. 그저 창귀대 앞에 홀로 선 청명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생긱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앞에 선 적은 다름 아닌 그 만인방이다. 아무리 일개 대라고는 하지만, 저 전력만으로도 중소문파 한 개 정도는 순식간에 몰살시키고도 남는다.
그런데 그런 디들 앞에 대책 없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심지어 적의 본대가 아직 채 멀어지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장문인!"
다시 한번 다급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금양백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워, 원래 계획이 무엇이었더냐?"
"저쪽에서 신호를 주면 단숨에 해안으로 달려가 배를 탈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원래 계획은 분명 그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리되니 근본적인 의문이 하나 생겼다.
"그 신호라는 게 정확하게 뭘 의미하는 거지?"
"……"
"지금 나가야 하는 건가?"
그 말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용할 신호라는 건 애초에 뻔하디뻔한 법이다. 누군가가 고함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가면 거기에 보조를 맞춰 함께 뛰쳐나가면 된다.
고민할 것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예상과 너무도 달랐다. 저 만인방의 무력대를 상대로 오직 한 사람이 산책하듯 휘적휘적 걸어 나가는 광경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 일단은……"
장로 중 하나가 주저하다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지켜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직 다른 천우맹 사람들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요."
금양백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청명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체 저자는……'
황당하고, 또 공포스럽다.
저 무책임한 해위가 더없이 황당한 동시에, 저 작은 행동 하나 때문에 모든 계획이 어그러질까 봐 더없이 두렵기도 했다.
"그런데……"
"음?"
"……저들은 왜 저러고 있는 겁니까?"
그 말에 금양백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전방의 상황을 주시했다.
'그러고 보니……'
화산검협 청명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게 어슬렁어슬렁 접근했다. 그러니 저들 역시 청명이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광경을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이상한 것은 바로 이 부분부터다.
만인방은 피에 굶주린 살귀들. 사파 중에서도 가장 거칠다고 소문이 자자한 광동의 악귀들이다.
그러니 금양백이 아는 그 만인방이라면 자신들에게 적의를 가지고 접근하는 이를 빤히 지켜보고만 있을 리 없다. 평소 같았으면 이미 달려들어 갈기갈기 찟어 놓았겠지.
그런데……
'왜 움직이지 않지?'
금양백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본다 해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저들, 만인방도에게 있어서 저 작은 청년이 어떤 존재인지.
그들에게 있어 화산검협이라는 이름이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모르기 때문에.
⁂ ⁂ ⁂
"……화산검협."
창귀대의 대주, 독비검귀(獨譬劍鬼) 범충(范充)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째서 저자가 여기에……'
만인방의 창귀대.
대 이름 앞에 만인방이라는 소속이 붙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창귀대는 천하만민의 두려움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다.
힘없는 양민들은 당연히 그들을 저승사자처럼 무서워하기 마련이고, 웬만한 힘을 갖추어 떵떵거리는 무인들조차도 만인방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그 꼬리를 슬그머니 내리는 법이므로.
독비검귀 범충은 자신할 수 있었다. 창귀대라는 이름은 두려움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결코 두려움을 느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순간, 범충은 세상의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화산검협이 누구인가.
흑룡채에서 사패련주 장일소와 정면으로 맞붙었으며 수로채를 무력으로 뚫어 낸, 신화적인 일을 벌인 자다.
그 이전엔 그들과 같은 급인 만인방의 적사대를 격파했고, 화산으로 쳐들어간 무력대들을 모조리 고혼으로 만들어 만인방에 흔치 않은 패배라는 낙인을 새긴 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련주와 손을 맞춰 마교를 무찌른 자.'
그가 항주에서 내보인 신화적인 무력은, 그 지옥 같았던 격전을 목격한 이들로부터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그때 장일소와 함께 항주로 향했던 건 장일소에 대한 충성 하나로 지옥 불에도 기꺼이 몸을 던질 수 있는 이들이었다. 장일소를 경외하다 못해 맹신하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의 입에서 련주에 비해 단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는 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자. 그런 자가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피가 차갑게 식어 가고, 전신의 털이 삐죽삐죽 곤두섰다.
적을 앞에 두고 단 한 번도 두려움을 느껴 본 적 없는 범충이지만, 검은 무복과 붉은 매화의 문양 앞에서 평소와 같은 태연함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했다.
사파인들에게 저 무복은 사신의 복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습게도 범충은 힘없는 양민들이 그들을 볼 때 느끼는 심정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곳에서 사무치게 실감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손에 식은땀이 촉촉하게 배어났다.
조금 전까지 꽤 떠들썩하고 어수선했던 해안에 쥐 죽은 듯한 고요가 내려앉았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밀려오는 파도 소리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창귀대의 대원들조차 숨을 죽이고 있다는 의미다. 적을 앞에 두면 한시도 참지 못하고 달려드는 굶주린 승냥이처럼 굴던 놈들이 범을 본 토끼 새끼처럼 몸을 바짝 웅크리고 떨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범충은 이를 두고 화를 내며 꾸짖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당장 대주인 그부터 이 상황 앞에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는데 대체 누굴 탓하며 힐난한단 말인가.
'신호……'
마른침을 삼키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려던 그는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깨물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지금 적은 혼자다.
물론 그 뒤에 얼마나 되는 이들이 숨어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지금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오로지 화산검협 한 명뿐이었다.
그런데 대체 뭐가 겁이 나서 본대에 알릴 신호탄부터 찾고 있는가? 명색이 만인방의 창귀대, 그 대주를 맡고 있다는 이가 단 한 사람을 감당하지 못해서 구원부터 요청할 생각을 한단 말인가?
이건 광동에서 악명을 날리는 무인이었던, 그리고 장일소가 손수 임명한 창귀대의 대주로서 자부심이 대단했던 범충에게 참을 수 없는 수치였다.
"화산검협."
입술을 비집고 나온 갈라진 목소리에 청명이 반색했다.
"오?"
그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어렸다.
"이제 나도 꽤 유명해진 모양이네. 설명 안 해도 바로 알아봐 주고."
"……"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까지는 조무래기 새끼들한테도 일일이 설명하느라 귀찮았거든."
"……네놈이 왜 여기에 있지."
청명이 어깨를 으쓱한다.
"뭐, 사파 새끼들도 들락거리는 곳에 내가 못 올 이유라도 있나?"
"……"
"아무튼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청명이 슬쩍 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범충의 몸이 절로 움찔 경련을 일으켰다.
지척에 선 적이 자신을 앞에 두고 고개를 돌린다? 이건 지독하다는 말로도 다 수식할 수 없는 무시였다. 하지만 노기를 참기 힘든 듯 제 검 손잡이를 콱 움켜쥐었던 범충은 차마 검을 검집에서 뽑아내지 못했다. 그저 힘껏 움켜잡기만 할 뿐.
"흐음."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린 청명의 입에서 낮은 비음이 새어 나왔다.
"너무 거리가 벌어져도 안 되니까."
중얼거린 청명이 시선을 드는 그 순간, 범충은 보았다.
등골이 오싹할 만큼 서늘하게 가라앉은 청명의 두 눈을 말이다.
그 눈빛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뒤틀린 입술 사이로 드러난 청명의 하얀 이가 순간적으로 너무 섬뜩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범충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그리고 그건 그의 의사와 전혀 다른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창귀대의 전투 신호는 언제나 동일했다. 그가 뒤로 한 발 물러나는 것은 적을 치라는 신호였다. 언제든, 어디서든.
이 동작이 신호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다. 창귀대는 결코 적을 앞에 두고 물러서는 일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특히나 대주인 범충이 적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기세에 밀려 뒤로 물어난다는 건 창귀대의 머릿속에서는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주가 물러나는 모습을 본 이 중 하나가 당연하다는 듯이 청명을 향해 돌진했다. 지독할 정도로 쌓아 올린 훈련의 결과였다. 상황을 가리지 않고 몸이 먼저 움직여 버린 것이었다.
"안……"
범충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러 버렸는지를 깨달았다. 하지만 전력으로 돌진하는 이를 잡기에는 이미 늦어 버린 뒤였다.
"죽어라아아아아!"
찢어지는 듯한 기합과 함께 해남의 푸른 하늘을 향해 치켜올렸던 도가 더없이 강맹하게 내리그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파아아아아앗!
섬전보다 더 빠르게 번쩍인 검광(劍光)이 도를 잡은 손목을 그대로 가르고 지나갔다.
서걱.
"끅……"
끔찍한 소리와 나직한 신음이 울렸다. 내뻗었을 때보다 더 빠르게 회수된 검광이 재차 내질러졌다. 그리고 하나 남은 손목마저 정확하게 갈랐다.
서걱!
힘이 빠진 손아귀에서 도가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 도가 허공으로 날아오르기도 전에 연이어 뻗어 나온 검광이 달려든 이의 몸을 가르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끄……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비명이 해안에 내려앉은 고요를 처참하게 깨부셨다.
"아아아아아아악!"
검이 거죽을 가르고 근육을 뒤틀며 헤집는다. 말로 차마 표현할 수조차 없는 끔찍한 격통 앞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비명을 내지르는 것뿐이었다.
순식간에 전신의 힘줄이 끊긴 이가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 제게 벌어진 일이 믿을 수 없기 때문인지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턱.
그리고 그 순간, 청명의 암향매화검이 꿇어앉은 사내의 목에 닿았다.
한없이 냉정한 눈으로 사내를 내려다보던 청명이 입술을 뒤트는 듯 웃더니 나직이 말했다.
"모자라."
서걱!
파아아아앗!
쩍 갈라진 사내의 목에서 뜨거운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흰 백사장 위로 검붉은 피가 흩뿌려저 얼룩졌다.
털썩.
사내의 몸이 맥없이 무너지며 넘어갔다.
무심한 눈으로 시신을 바라보던 청명이 서서히 시선을 옮겼다. 거의 넋을 놓은 채 그를 바라보는 창귀대를 향해서.
"……이정도로는 안 들리지."
청명이 이를 드러내며 신랄하게 말했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살기가 북풍한설처럼 창귀대를 뒤덮었다.
"더 크게 질러 봐. 그러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순간 청명의 두 눈에 섬뜩한 빛이 번뜩였다. 이내 가그 창귀대를 향해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돌진했다. 단숨에 창귀대의 전열 사이로 파고들었다.
청명의 암향매화검이 중천에 뜬 태양처럼 등근 호를 그려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