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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57화 (1,258/1,567)

1257화. 알아서 하시겠죠.(2)

사패련의 군세가 섬 안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는 이자양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사형."

"……"

"이러면 망한 거 아닙니까?"

이자양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애초에 그들이 세운 계획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해안에 상륙한 사패련이 배를 둔 채 해남파가 있는 오지산으로 향하면 적당히 상황을 지켜보다가 배를 탈취하여 내륙으로 향한다.

더없이 간단하지만, 또 더없이 확실한 게획이었다.

이유? 이유가 간단하다.

사패련의 입장에서는 해남을 근거로 살아가는 해남파가 본산을 버리고 강남으로 진격할 거란 생각조차 하지 못할 테니까.

당장 해남파인 그들도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미친 계획인데, 사패련이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둘 리가 있겠는가?

결심까지가 무척 어려울 것이나, 각오만 할 수 있다면 실패하기가 더 어려운 계획이었다.

그런데……

"저놈들이…… 배를 지키는데요? 들킨 것 아닙니까?"

곽환소가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계획을 들통난 건 아닐 것이다. 들통이 났다면 병력을 저것만 남길 리 없으니까. 오히려 해안을 철통같이 지키며 우리를 찾아내려 했겠지."

이자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곽환소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계획이 틀어진 건 사실 아닌가?'

배를 지키는 창귀대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납덩이치럼 무거워졌다. 저들의 복색으로 보아 만인방임에 틀림없다. 만인방의 방도들이 저만큼이나 남아 방비한다면 단숨에 배를 탈취한다는 그들의 계획은 이뤄지기 힘들 게 분명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자야으이 콧잔등을 타고 땀이 흘렀다.

해남의 제자들 사이에서는 나름 지낭(智囊:지혜 주머니)으로 불리는 이자양이지만, 이 상황에서는 마땅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물론 해남의 전력을 동원한다면 저들을 무찌르는 게 어렵지는 않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해남은 구파일방 중 하나인 강력한 문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숨에 전투를 끝낼 정도는 아니다.

상대 역시 사패련의 수장인 만인방의 방도들 아닌가?

시간을 조금만 지체하면 해안을 떠났던 만인방의 주력들이 상황을 눈치채고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끛장이다.'

지형의 이점을 안고 싸운다 해도 승리를 바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해안이라는 개활지에서 만인방에게 앙쪽으로 협공을 당했을 때 무슨 꼴이 벌어질지야 너무도 뻔하다.

"일단은 최대한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사형."

"기다린다고?"

"예. 만인방의 본대가 섬 깊숙이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남은 이들을 공격하고 있단는 사실을 알아챈다고 해도 지원을 오기까지 시간이 걸릴 테니까요."

그 틈을 타 재빠르게 저들을 정리하는 수밖에 없다.

"……피해가 커질 텐데."

"다른 방법이 없잖습니까."

곽환소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든 빠르게 배를 탈취하려 했던 이유는 만인방의 본대가 섬 깊이 들어가는 것 역시 달갑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만인방의 목표는 해남파의 본산이 있는 오지산이다. 하지만 그들이 오지산으로 향하는 길에도 사람은 살고 있다.

사파 놈들이 화산이 없는 동안 섬서에서 무슨 일이 벌였는지 똑똑히 전해 들은 곽환소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사패련 놈들이 양민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다른 수가 없는가?'

하지만 이자양의 말 역시 일리가 있다. 어설프게 일을 서두르다 이 섬에 갇히거나 합공을 당해 전멸한다면 오히려 피해가 더욱 커지고 말 것이다.

'장문인께서는?'

곽환소가 고개를 돌려 반대쪽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들과 병력을 나눠 매복하고 있는 금양백 쪽에서도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아마 마찬가지로 혼란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그리될 겁니다."

"응?"

"공격 신호는 천우맹 쪽에서 내려 주기로 했으니까요. 우리라면 몰라도 천우맹이 해남의 양민들을 걱정해서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잖습니까."

"……"

이자양이 어쩐지 분노한 얼굴로 짧게 이를 갈았다.

"저 망할 만인방 놈들이 일을 저지를 대로 저지르고 나면 그제야 싸우겠다고 나서겠죠. 그게 합리적이니까."

곽환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자양의 말은 앞뒤가 맞질 않는다. 이자양 역시 이 상황에선 최대한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란 사실을 분명 안다. 그럼에도 저렇게 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이 근처였나?'

이자양이 해남에 입문하기 전에 살던 마을이 해안에서 오지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기 때문이다. 만인방이 오지산을 향해 직선으로 진격한다면 어떻게든 이자양이 살던 마을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곳에는 다름 아닌 이자양의 가족이 살고 있다.

머리로는 합리를 논하고,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논하나, 가슴은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자신의 침묵 때문에 제 가족들이 변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누가 냉정할 수 있겠는가?

"자양……"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자양이 미미하게 신경질 섞인 목소리로 차갑게 잘랐다.

"뭐가 우선인지 모를 멍청이는 아닙니다. 제 가족이라고 해서 해남의 다른 양민들에 비해 특별히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등신처럼 못 참고 튀어 나가 일을 그르치는 짓거리는 하지 않을 테니까요."

말을 끝낸 이자양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곽환소는 그런 이자양에게 어떤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그저 잘게 떨리는 사제의 어깨를 꽉 잡아 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참아라."

"……안다니까요."

왜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참아 내야 한다. 참지 못하면 더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차라리 지휘권을 천우맹이 가져간 게 다행입니다. 장문인께서 지휘권을 가지고 계셨다면, 저는 이미 장문인께 달려갔을지도 모르니까요."

이자양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웃음이 더욱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곽환소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바로 그때였다.

"아니. 잠시만요, 사형. 진짜 괜찮은 겁니까?"

"……응? 왜 그러느냐?"

함께 있던 다른 제자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시간을 끌어서 될 일이 아니잖습니까?"

"응?"

"잊으셨습니까? 우리가 저 배에 구멍을 다 뚫어 놨습니다. 지금이야 떠 있지만, 곧 다 가라앉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이자양과 곽환소의 얼구링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너무 긴장한 탓에 그 사리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배, 배를 모두 부수자는 걸 우리가 이게 낫다고 굳이 구멍을 뚫었는데…… 시간을 끌면 그것 때문에 다 들킬 겁니다. 그럼……"

이자양과 곽환소가 낭패감 어린 얼굴로 서로 마주 보았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저들이 시킨 대로 그냥 배를 부술 것을! 뭐 하러 고집을 부렸다는 말인가?

"화, 화산은? 화산은 이걸 알고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아니, 알더라도 배가 언제 가라앉을지는 정확히 모르겠죠. 구멍을 뚫고 준비한 건 저희니까."

"아, 알려야 하지 않나?"

"어떻게 알립니까? 지금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는데! 그들으 저 앞쪽에 있잖습니까?"

"이런……"

"내, 내가 괜한 일을 해서……"

일이 단단히 틀어졌다는 걸 직감한 이자양이 흔들리는 눈으로 애타게 앞쪽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

"……어?"

이자양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저…… 저거…… 저?"

"응?"

곽환소가 의아한 얼굴로 이자양을 보았다. 이자양의 얼굴은 그새 귀신이라고 맞닥뜨린 듯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왜 그러느냐?"

"저, 저…… 저게 뭔……? 저 미친…… 저 미친놈이?"

"미친놈?"

이곳에 미친놈이라면…… 설마?

곽환소는 이자양이 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휙 돌렸다.

"……저."

그리고 그 순간, 곽환소의 눈이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커졌다.

해안으로 향하는 내리막길, 한 사내가 뽑아낸 검을 어깨에 대충 걸친 채 터덜터덜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화, 화산…… 화산검협?"

"저, 저 미친놈이 대체 저게 뭔……?"

두 사람의 입에 쩍 벌어졌다. 청명의 표정은 그 와중에도 심드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   ⁂   ⁂

"쯧."

만인망 창귀대의 부대주 허맹(許孟)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혀를 찼다.

"빌어먹을."

영 못마땅한 것 투성이었다.

그 먼 장강에서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는데 막상 도착한 해남에서는 배 지키는 역할이나 하고 있어야 한다니, 기분이 좋으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왜 하필 우리냐고."

"할 말이 있으시면 군사 계실 때 하지 그러셨습니까?"

"빌어먹을.그 바늘로 질려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양반한테 무슨 말을 하겠어."

허맹이 짜증 어른 얼굴로 제 뒤에 있는 배를 흘겼다.

"여하튼 군사는 이게 문제라니까. 이깟 배를 누가 노린다고. 정 불안하면 몇 놈만 남기면 될 일이지. 대를 통째로 빼서 배를 지키라고 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쉿.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련주께서 계셨으면 이런 하찮은 건 신경도 쓰지 않으셨을 텐데, 내가 이래서 군사와 같이 움직이는 걸 싫어한다니까."

이번에는 주변의 다른 이들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배를 잃어 좋을 건 없잖습니까."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해남이 어디야? 섬 아니야! 섬에 천지로 널려 있는 게 배인데, 잃으면 다시 구하면 그만이지."

"군사께서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빌어먹을."

허맹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투덜거렸다.

"기껏 해남까지 와서 이제 좀 피 맛을 보나 했더니, 섬 구경이나 하다 돌아가게 생겼구만."

"어차피 군사와 같이 온 이상, 같이 올라가도 제대로 놀지 못할 거 아닙니까."

허맹이 짜증 어린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응?'

그때 문득 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해안에 맞닿은 드넓은 초지, 그 끄트머리에 우거진 수풀을 해치며 한 사람이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저건 뭐지?"

"……해남 놈이겠죠. 배라도 타러 온 모양인데."

"멍청한 놈이 제 명을 재촉하는 군. 할 짓도 없는데 저 놈이나 가지고 놀아야……"

잘 만났다는 듯 입술을 핥으며 팔을 겉어붙이던 허맹이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음?'

터덜터덜 걸어오는 이의 복색이 어쩐지 익숙했기 때문이다.

'저거…… 무복인가?'

일반적인 양민들의 복색과는 확연히 다른, 활동성을 중시한 무복. 그것도 검은색 무복이었다.

여기까지는 사실 특이한 게 없다. 검은색 무복이야 중원의 무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복장 중 하나니까. 게다가 해남도 나름 넓은 섬이니 해남파에 속하지 않은 낭인 하나쯤 있다 해서 이상할 건 없지 않은가?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저거."

"예?"

"저거 혹시 매화냐?"

허맹의 물음에 모두의 고개가 격하게 돌아갔다. 그들의 시선이 터덜터덜 걸어오는 이의 가슴에 집중되었다.

"……맞는 것 같은데요?"

"마, 맞습니다. 매화입니다."

"매화라고?"

천하에 수많은 문파가 있지만, 검은 무복과 매화 문양을 제 상징으로 삼는 문파는 오직 하나뿐이다.

"화, 화산?"

하지만 그 화산의 무복이 왜 이런 곳에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부, 부대주!"

"음?"

"저, 저 인간…… 저거! 그, 그놈입니다! 그놈이요!"

"그놈이라니?"

"화, 화산……"

"음?"

"화산검협!"

화산검협이라는 네 글자가 해안에 진을 치고 있던 이들의 가슴을 뀌뚫고 지나갔다.

그 네 글자를 듣는 것만으로도 딱히 긴장하지 않고 풀려 있던 그들의 전신 근육이 전투에라도 들어간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화산검협이라고?"

"예! 화산검협입니다!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 그놈이 여기에 왜……?"

하지만 이들이 상황을 유추하는 것보다 사내가 다가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미처 방비를 끝내지도 못한 그들의 지척에 도착한 청명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긴장감 어린 눈빛으로 경계하던 창귀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이, 너희. 비명은 좀 지를 줄 알아?"

"……뭐?"

그 뜬금없는 말에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되물고 말았다. 청명이 덤덤하게 말했다.

"잘 질러 봐."

그의 어깨에 걸처져 있던 검이 천천히 내려왔다.

"먼저 간 새끼들 귀에도 똑똑히 들리도록 말이야."

뜨거운 햇볓을 받은 청명의 검이 섬뜩한 빛을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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