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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254화 (1,255/1,567)

1254화. 그리고 살기 위해서다!94)

"뭔데?"

청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곽환소가 조금 우물쭈물하다 물었다.

"다들 이곳에서 저희와 함께 싸우기로 결정하신 거잖습니까?"

"말했잖아. 또 말해 줘?"

곽환소가 손을 황급히 내저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오신 겁니까? 저희와 협상이 결렬 되는 한이 있더라고 개인으로  싸우겠다는?"

그 질문에 청명이 더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니."

"……예?"

"아무 생각 없었는데?"

"……"

"말했잖아. 우리는 여기 도착하기 직전까지 상황이 이렇게 될 줄도 몰랐다니까? 저 장일소 미친 새끼가 미친놈인 줄은 알았지만, 미쳐도 정도껏 미쳐야지. 미친, 장강에 대치가 이어지고 있는데 병력을 뒤로 돌려서 미친놈처럼 쳐들어오는 및니 짓을 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미치지 않고서야."

"……미쳤다는 말 좀 그만해라. 청명아."

"듣고 있으니까 머리가 이상해지는 기분이야."

"이해하십쇼. 장일소 세 글자만 나오면 저놈도 좀 맛이 가 버리잖습니까."

곽환소가 눈을 끔뻑였다.

"그럼 그날 협상이 결렬되고 다로 회의하신 뒤 결론을 내리신 겁니까?"

"아니."

"예?"

"딱히 뭐 회의라고 할 만한 건 없었는데?"

"……그럼?"

"그냥 이제 슬슬 가야 하지 않냐고 했는데, 아무도 안 가더라고. 그래서 뭐 그렇게 됐지 뭐."

"아, 아니. 그게 무슨……"

"거, 세상 복잡하게 산다."

청명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너희는 뭐 대단한 논리나 입장이 있어서 장문인 다라서 강남 가겠다고 나선 거냐?"

"……그건 아닙니다."

물론 나름의 논리도 있었다. 하지만 곽환소 역시 제 행동에는 논리보다 충동이 더 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왜 우리한테서는 논리를 찾아?"

"좀 찾고 삽시다…… 제발."

"사파 새끼는 아가리 닫으시고."

"끄응."

청명이 슬쩍 곽환소를 돌아보며 말했다.

"물론 뭐 시작부터 어떻게든 도와 보자고 한 건 아니었지. 그런데 뭐 좀 툭탁대다가 좀 화도 내다가, 어찌어찌 흘러가다가 보니까 어느새 어떻게 싸워야 할까 논의하고 있었던 거지."

"저는 계속 반대했습니다!"

"누가 저 사파 새끼 주둥아리 좀 막아."

남궁도위가 임소병의 입을 움켜잡고 질질 끌고 가자 청명이 속이 후련하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뭐 대단하게 생각할 것 없어."

"……어떻게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영 이해를 못 하네."

"예?"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는 지금 너희와 같이 죽어 주겠다고 이러는 게 아냐."

"……"

"직접 겪어 보니 강남의 방비가 생각보다 허술했고, 잘만 하면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을 뿐이지."

곽환소는 얼빠진 얼굴로 청명을 보기만 했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눈앞에 있으면 내가 죽기 전까지는 도우려고 하는 게 사람 아냐?"

"그건 그렇죠……"

"너희가 생각하는 죽기 전까지와 우리가 생각하는 죽기 전까지가 조금 다른 것뿐이야. 괜히 이상한 기대 같은 거 하지 마. 해남이고 뭐고 모조리 죽을 판이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칠 테니까. 애초에 그럴 수 있는 놈들만 해남으로 온 거고."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말이 쉽지, 그게……"

"근데 이 새끼 진짜 말귀를 못 알아 처먹네?"

"예?"

"뒈지면 그만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까지 정파로 누릴 건 다 누려 놓고, 마지막에는 밥값도 못 하고 자기만 만족하면서 멋지게 뒈지면 다 끝나는 거냐고. 남은 정파 놈들이 사패련이랑 싸우느라 피뚱을 싸든 말든?"

곽환소가 입을 다물었다.

"웃기고 있네. 너희는 등골이 아예 뽑히도록 싸워야 해. 죽더라도 한 놈이라도 더 끌고 지옥으로 가야지. 그게 검을 들고 잘란 척한 놈들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야."

"……"

"그리고 멍청한 짓거리도 작작 해야지. 너희가 그렇게 뒈지고 나면 그 사파 새끼들이 해남ㅇ르 건드리지 않고 그냥 순순히 물러날 것 같아? 그래도 나름 강남에 있다는 놈들이 사파 놈들의 생리를 어떻게 이렇게 모르냐. 등신도 아니고, 진짜."

곽환소는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청명은 짧게 혀를 차는 걸 끝으로 몸을 돌려 휘적휘적 다른 곳을 향해 걸어가 버렸다.

백천이 작게 웃으며 다가와 곽환소에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말투가 원래 저런 놈이니까."

"아뇨. 말투보다는……"

오히려 그 내용이 더 충격적으로 와닿았다.

'남은 이들이라.'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들이 우려한 남은 이들은 해남도의 사람들뿐이었다. 천하가 어찌 될지, 남겨진 정파들이 어떻게 싸울지 같은 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죽더라도 싸움은 이어진다. 특히나 이들 천우맹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사패련에 맞서 싸울 것이다.

오직 해남파와 해남도의 상황만을 우려했던 것이 문득 부끄러웠다. 이 얼마나 짧은 생각이었던가.

섬사람들을 차별한다도 육지의 사람들을 그토록 욕해 왔음에도, 막상 위기가 닥치자 그들의 머리에도 육지의 사정 같은 건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싸워야죠."

곽환소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백천이 빙긋 웃었다.

"그걸로 됐습니다."

"저, 그런데……"

"예?"

"하나만 더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강남으로 진입하는 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막상 강남에 들어가고 나면 상황이 달라지잖습니까. 저들 역시 우리가 제 땅에 들어왔다는 걸 알게 될 터인데."

"그렇겠죠."

"그럼 당연히 장강의 방비를 단단히 하려 들 것인데, 그걸 저희만으로 뚫어 내는 게 가능합니까? 차라리 운남 쪽으로 우회를 하는 편이……"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마지막에 뚫어야 하는 건 똑같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진격로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 많이 시달릴 뿐입니다. 가능성을 다지자면 저들이 제대로 방비하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장강까지 도달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게다가……"

백천의 눈빛이 살짝 어둡게 가라앉았다.

"적의 중심을 휘저어 놓고 그 혼란을 장강의 대치로 이어 가지 못한다면 저들에게도 여력이라는 게 생갈 겁니다. 그렇게 되면…… 쓸데없는 짓을 할 확률도 높아지겠지요."

곽환소가 입을 다물었다.

이들이 말하는 '쓸데없는 짓'이라는 게 무엇인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달아나기 급급해 우회로를 선택하고 사패련 측에 여유를 주게 된다면, 그 분노가 해남도에 남은 이들에게로 쏠릴 수도 있다.

그리되면 해남파가 입어야 할 피해를 온전히 해남도가 받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백천은 적의 중심부를 휘젓고 장강으로 향해 천우맹과 사패련의 대치를 격화시켜서 사패련이 병력을 뒤로 돌릴 염두를 내지 못하게 만드려는 것이다.

'나는 육지의 사정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이 사람들은 이 와중에도 해남에 남을 이들을 걱정하고 있다. 그렇기에 조금 더 위혐을 무름쓰는 한이 있더라도 사패련의 시선이 해남에서 떼어 놓으려는 것이다.

"……가능하겠습니까?"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 할 일이죠. 다만……"

"다만?"

백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여기에 죽고 싶어 안달이 난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화산의 제 일 원칙은 협의를 관철하는 것도, 정의를 수호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일단 살아남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였다.

"저거, 저거. 이제야 뽈뽈 기어 오는 거 봐라, 저거!"

"응?"

청명의 외침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제법 잔잔해진 바다 한중간으로 작고 하얀 무언가가 빠르게 헤엄쳐 오고 있었다.

"백아야!"

"아이고, 백아야!"

"세상에, 진짜 왔네!"

오검이 너나 할 것 없이 해안으로 달려갔다. 당소소가 첨벙대며 바다로 뛰어들어 백아를 안아 들었다. 반쯤 탈진한 백아가 혀를 빼물고 그녀의 품에서 늘어졌다.

"사형! 얘 완전히 지쳤는데요?"

"……기특하기도 하지."

"저건 기특한 게 아니고 멍청한 겁니다. 나 같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튀었습니다."

"……그러니 백아가 너보다 똑똑한 거지. 그러다가 저 모진 놈 손에 걸리면 진짜 모피 되는 건데."

당소소가 백아를 안아 청명에게 데려다주자 청명이 당소소의 품에 안긴 백아의 뒷덜미를 덥석 움켜잡고 들었다.

"잘 처리했어?"

탈진한 와중에도 정신이 번쩍 드는지 백아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뿌듯함이 가득 담긴 초롱초롱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칭찬을 해 줘야 할 때라는 듯이.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청명은 기대를 품은 이에게 처절한 배신감을 안겼다.

"자, 자. 정신 차려 봐."

키이!

"이거 보여? 이거?"

청명이 손에 들린 작은 연통을 가볍게 흔들고는 백아의 목에 채웠다. 제 목에 감기는 연통을 보며 백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키이?

"그거 중요한 거니까. 잘 전달해."

키잇?

"이제 가."

백아가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커다랗고 까만 눈을 반짝이며 작은 머리통을 갸웃거리는 게 더없이 귀여웠지만, 그 안에 담긴 실상은 좀 처절했다.

"왜 이렇게 못 알아처먹어? 다시 가라고."

키이?

"뭐 해?"

키……이?

그 순간 모두는 보았다. 눈처럼 흰 백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모습을 말이다.

'저거 털 아닙니까? 털이 어떻게 파랗게 질립니까?'

'야수궁주님은 저런 걸 봤을까?'

'말하면 누가 믿어나 줄까?'

그 순간 백아가 발작하며 소리를 질렀다.

키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동물은 사람의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은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저 울음소리를 정확히 해석할 수 있었다.

"욕이네."

"욕인 것 같은데?"

"욕이 확실합니다."

아마 사람의 말이었으면 욕설, 그것도 차마 귀를 열고 들을 수 없는 쌍욕이었을 것이다.

"근데 이 새끼가!"

청명이 백아를 냅다 집어 던졌다.

키이이이이이!

멀어지는 백아를 향해 청명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돼지처럼 살이 뒤룩뒤룩 찌도록 먹여 주고 재워 줬더니, 호 사에 겨워서 맛탱이가 가 버렸나! 이게 어디서 하악질이야!"

"청명아…… 말은 바로 해야지. 쟤는 운남에서 더 잘 먹고 잘 살았다."

"솔직히 쟤는 와서 고생만 했지……"

"자기도 지금쯤이면 왜 왔나 싶을 거야. 아니, 훨씬 전부터 그랬겠지."

물론 그 말이 청명이 놈의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백아는 몸을 휙 돌려 착지하고는 분기탱천하여 씩씩거리다 다시 달려왔다. 백아를 덥석 낚아챈 청명이 조그만 얼굴을 제 바로 앞까지 바짝 가져왔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가서 전…… 악!"

그 순간 맹렬하게 휘둘러진 백아의 앞발이 청명의 뺨을 후려쳤다. 불의의 일격을 얻어맞은 청명의 고개가 휙 돌아간다.

주변에서 환소성이 터졌다.

"오!"

"반격했다!"

"크으, 오래 참았지. 솔직히 칠 때도 됐어."

그 순간 청명이 눈에 불을 켜고 백아를 노려보았다.

"이 새끼가?"

키이이이이이!

인간 같은 짐승과 짐승 같은 인간이 악다구니를 쓰며 싸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백천이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짐승이랑 진지하게 싸우지 말라고……'

아무리 영물이라도 그렇지.

후욱! 후욱!

한참 드잡이하던 청명이 지쳐서 헥헥대는 백아의 뒷덜미를 낚아채고는 이를 빠득빠득 갈아붙였다.

"아오! 시킬 것만 없었어도 진짜 오늘 족제비 하나 수장시키는 건데!"

키이!

"똑바로 전달해. 늦으면 넌 진짜 통구이 되는 거야. 알았어?"

키이이이이!

"확, 씨! 말대꾸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백아는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기한 모양이었다.

"가! 빨리!"

키이이이이이이이!

바닥에 내려선 백아가 원독에 찬 울음을 토하고는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모두가 그 모습을 아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장강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도착하자마자 다시 가네."

"……아무리 미물이라도 이게 시킬 일인가 싶어요."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다."

"애도."

모두가 숙연한 와중에 청명만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댔다.

"하여튼 저게 점점 빠져 가지고는!"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

'둥물 학대범.'

'인성 쓰래기!'

그렇게 모두가 바다 저편으로 멀어지는 백아의 모습을 이련하게 바라볼 때였다.

"……사숙."

"나도 봤다."

윤종의 놀란 목소리에, 백천이 잔뜩 굳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들이 바라보던 바다 저 멀리 ,선단이 작은 점처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패련이다."

분위기가 다소 느슨해졌던 해안에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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